패션 이미지를 재정의한 한 1960년대 사진작가

펠리니 등의 영화 거장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지안 파올로 바르비에리는 환상, 웅장함, 스펙터클을 작품에 담아냈다.

사진작가 지안 파올로 바르비에리(Gian Paoplo Barbieri)는 1943년 파시스트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자신의 당에서 축출된 지 불과 몇 달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했을 때 겨우 여덟 살이었다. 2년 후 잔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독재자는 국가를 원치 않는 비참한 전쟁에 끌어들인 뒤 연이은 패배로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폐허는 카이사르 제국의 잔재와 맞먹는 수준으로 비참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다시 일어섰고, 전례 없는 성장의 시기를 거쳐 세계 무대에서 예술, 문화, 비즈니스의 강국으로 다시 자리매김했다. 1960년대 초, 이탈리아는 또다른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신화적인 위치에 올라섰다. 바르비에리는 “그 시기는 경제 기적의 시기였고, 이탈리아는 고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특별한 나라였다”고 회상한다. “특히 거리, 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이 즐비한 로마는 신문, 사진, 영화 등 미디어의 활약을 통해 ‘돌체 비타(dolce vita)’의 무대가 되었다.”

전 세계가 아름다움과 화려함, 욕망과 절망을 담은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걸작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의 렌즈를 통해 영원한 도시의 부활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멋쟁이 칼럼니스트가 7일 밤낮으로 로마를 여행하며 사랑과 행복을 찾아 ‘달콤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과정을 좇는다. 눈부신 풍경, 아름다운 여성, 무모한 열정, 그리고 참혹한 결말을 예고하는 매혹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달콤한 인생’은 퇴폐미를 매혹적인 로마 스타일로 표현해냈다.

‘달콤항 인생’이 칸과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을 때 바르비에리는 영화가 소재로 한 바로 그 사교계를 누비며 현실에서 달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밀라노에서 자란 어린 시절 영화와 연극에 빠져 배우의 꿈을 찾아 로마로 왔다. “어릴 적의 어느 날 밤 형이 비아 칸투(Via Cantù)에 있는 영화관에 데려갔던 기억이 난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얀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흑백 이미지가 번개처럼 번쩍이는 장면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도로시 라무어(Dorothy Lamour)와 존 홀(John Hall)이 주연한 ‘허리케인(The Hurricane)’이라는 영화의 모든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바로 그 영화를 통해 나는 남해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나에게 그 발견은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영감을 받은 바르비에리와 그의 친구들은 극장에서 본 연극과 영화를 재연하기 위해 ‘트리오(Trio)’를 결성했다. “내 가장 큰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지만 사진은 항상 내 일상을 함께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바르비에리는 가족 소유의 건물 지하실을 사진 스튜디오로 개조했다. 필름 누아르와 오손 웰즈(Orson Welles) 같은 감독에게서 일찍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할리우드 잡지를 사서 표지 사진을 따라 찍어 보기도 했다. “침대 옆 탁자에서 빼 온 전구를 난로 파이프 안에 넣고 영화관과 극장에서 보았던 것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며 조명을 실험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바르비에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의상, 세트, 배경, 조명 등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수제작도 불사하는 끈기로 이어졌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윽고 그의 삶을 집어삼켰다. 고급 직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에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원자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극장 활동 때문에 학교를 1년이나 결석한 나는 낮에는 직물 도매 창고를 운영하던 아버지를 도와 일하고 밤에는 혼자 공부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틈만 나면 우리가 연기하기로 한 캐릭터의 의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천을 훔치곤 했다. 그 후에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부터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e)’, ‘선셋대로(Sunset Boulevard)’, ‘물랑루즈(Moulin Rouge)’,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 등 다양한 작품을 촬영했다.”

바르비에리는 매일 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돌아왔다. 15세 무렵, 밀라노의 만조니 극장(Manzoni Theatre)에서 엑스트라를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마침내 영화계에 뛰어들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매일 극장을 방문했다. 어느 날 운이 좋게도 그 곳에서 왕의 근위병 역을 맡을 키가 큰 엑스트라를 찾고 있었는데, 바르비에리가 그 조건에 딱 맞았다. “오디션에 나갔더니 수석 엑스트라가 나를 보고는 영화 ‘메데아(Medea)’의 왕자 역에 딱 맞다고 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와 왕을 연기한 메모 베나시(Memo Benassi)와 함께 작업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로덕션의 세트 디자이너는 당시 거장 중 한 명인 마리오 키아리(Mario Chiari)였다.”

꿈이 결실을 맺자 바르비에리는 영화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로마로 이주했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네치타(Cinecittà)의 스타들의 사진을 찍고 하숙집에 직접 만든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했다. 그 무렵 바르비에리는 밀라노에서 근무하던 골동품 갤러리 주인의 초대를 받아 로마의 달콤한 삶을 처음 맛보면서 점차 로마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그는 종종 나를 로마의 집으로 초대했는데, 그 집은 ‘달콤한 인생’의 영향을 받은 사치스러운 파티를 주최하는 고급 주택 중 하나였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 중 한 번은 매우 고상한 한 신사가 들어와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내 아버지에게 실크를 공급했던 바르비에리 테수티(Barbieri Tessuti)와 친척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브라함 테수티(Abraham Tessuti)의 구스타프 줌스테그(Gustav Zumsteg)였다. 그는 내가 로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그림, 도자기, 사진 등 나의 관심사를 나열했다.”

줌스테그는 즉시 비상한 재능을 눈치 채고 바르비에리의 작품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찍은 별 관심 없는 단순한 사진이라고 설명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어쨌든 그에게 사진을 보여줬고,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신은 놀라운 감성을 지녔어요. 정말 패션에 재능이 있군요’라고 말했다. 패션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는 정말 놀랐다. 이탈리아에는 아직 패션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잡지들은 프랑스로부터 화보를 구입해서 실었다. 이후로 그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고, 곧 나는 패션 사진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일념 하에 밀라노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그는 컬렉션 촬영 보조로 일하기로 한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소속 사진작가 톰 쿠블린(Tom Kublin)에게 오전 11시까지 파리로 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첫날, 그는 파란색 재킷과 거북이 등껍질 안경, 교회용 구두 등 최고의 복장을 하고 나타났지만 쿠블린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다. “그는 즉시 다시는 그런 차림으로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며 이틀 동안 나를 수습으로 두고 관찰할 거라고 했다.”라고 바르비에리는 말한다. “내가 만족스럽다면 컬렉션에 계속 참여하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밀라노로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사진과 패션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쿠블린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바르비에리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시작하고 싶어 밀라노로 돌아왔다. 그는 비알레 마뇨(Viale Majno)에서 다락방을 빌려 모델들과 테스트 촬영을 하고 귀족 가문 출신 여성들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그의 가족은 바르비에리가 회계사가 되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것을 선호하여 그의 꿈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비에리는 자신의 운명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가족의 정서적 및 재정적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양해야 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필요한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르비에리는 리네아 이탈리아나(Linea Italiana), 노비타(Novità) 등 당대 대표 잡지에 개인 작업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를 눈여겨본 리디아 타바키(Lidia Tabacchi) 감독을 알게 되었고, 그는 내게 외주 일감을 주어 그 세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작업을 하게 되었고, 1965년 노비타가 콘데 나스트(Condè Nast)에 인수되었을 때 이탈리아 보그(Vogue)의 첫 번째 표지를 촬영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신세대 패션 포토그래퍼의 선봉에 선 바르비에리는 연극, 영화, 판타지, 웅장함, 스펙터클에 대한 평생의 사랑을 자신의 작품에 결합하여 이름을 남겼다. 그의 최신 개인전인 ‘Unconventional’은 펠리니 영화처럼 매혹적이고 다층적인 그의 작품을 조명하며 사진 예술에 대한 그의 특별한 공헌을 기념한다.

위대한 거장답게 바르비에리는 유머와 상상력, 꿈과 환상을 환상적인 태피스트리로 엮어 사진에 담아냈다. “펠리니는 순수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다가 파멸을 향해 점점 더 피상적인 껍데기로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진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존재했거나 집단적 상상력에만 속했던 세계에 대한 비전, 그러나 동시에 실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전이다.”

바르비에리는 또한 새로운 시각적 표현법을 내세우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진을 재해석하는 신세대의 스타일을 포용한 동시대 사진작가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의 작품에 주목했다. “나는 패션 산업의 ‘경박한’ 이미지와 시사 이슈의 ‘도전적인’ 이미지 모두에 동등한 품격을 부여하는 아베돈의 재능을 존경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우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잔인함과 고통의 대비가 완벽에 가까운 구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패션 사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한 바르비에리는 화보 촬영장을 전통적으로 배우가 맡았던 역할을 모델이 연기하는 하나의 영화 세트장으로 탈바꿈시켜 허구와 사실의 경계에 있는 절묘한 세계를 구축했다. “꿈은 광고가 파는 것들로 만들어진다.”라고 그는 말한다. “특히 미디어와 대중문화, 미니스커트 덕분에 점차 형식적인 틀을 버리고 자유를 더 많이 표현하는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했다. 나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강하게 끌렸기 때문에 사진에서 이러한 측면을 전면에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내 목표는 여성들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싸워온 전사로서 가능한 한 강인하게 돋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 85세가 된 바르비에리는 변화와 진화가 창의성의 필수 요소임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누렸던 자유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지난 황금기를 되돌아본다. “화려함에는 한계가 없고,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은 이들의 모든 면을 채색할 수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끝없는 탐구는 지식을 이끌어내는 주요한 엔진이다. 호기심을 멈추지 말고 항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멈추지 마라.”

‘지안 파올로 바르비에리: Unconventional’은 2023년 4월 23일까지 밀라노의 29 아트 인 프로그레스 갤러리(The 29 Arts in Progress gallery)에서 전시된다. 이 전시회의 작품들은 포토런던(PhotoLondon)에서도 전시될 예정이다. 2023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코트야드 파빌리온 G25 스탠드(stand G25, Courtyard Pavilion)에서 열린다.

All images © Gian Paolo Barbieri, courtesy of the Fondazione Gian Paolo Barbieri- 29 Arts in Progress.
에디터 Miss Rosen
번역 Kim Yong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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