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가 미식 중흥 부를까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은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예능이다. 12부작으로 편성돼 9월17일부터 10월8일까지 4주 만에 막을 내렸다. 짧다면 짧은 분량이지만 〈흑백요리사〉의 영향력은 어지간한 장수 예능 이상이다. 방송에 나온 대사들이 유행어로 쓰이고 편의점 등에서 협업 상품을 출시한다. 출연자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몇 달치 예약이 가득 찼다. 미식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리라는 예상도 나온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비영어’ 프로그램으로 한정하면 방영 기간 내내 〈흑백요리사〉는 전 세계 최다 시청률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넷플릭스 공식 집계 자료). 영어 프로그램을 합쳐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OTT 시청률 집계 업체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10월 〈흑백요리사〉는 세계 50여 개국에서 TV쇼 부문 시청률 톱 10에 들었고, 한국과 타이완·홍콩·싱가포르 등지에서는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사실상 지난해 나온 〈피지컬 100〉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끈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다.
화제가 되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특히 ‘스케일’이 언급된다. 출연자들이 동시에 쓰는 대규모 주방이나 그들을 비추는 수많은 카메라 등 세트장부터 압도적이다. 출연진 이름값도 높다. 심사위원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와 안성재 셰프는 물론이고 심사를 받는 요리사 역시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자타가 공인하는 유명 요리사 ‘백수저’뿐만 아니라, 제작진이 재야의 고수로 분류한 ‘흑수저’ 요리사 중에도 이미 널리 알려진 이가 많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넷플릭스의 자본력이 가져온 ‘재료’ 못지않게 제작진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출연진의 면면을 봤을 때 심사 결과로 ‘생사’가 결정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프로그램 속 여러 장치가 서바이벌 형식의 맛을 잘 살렸다고 말했다. “그 자체로 치열한 경쟁인 오디션 프로그램들과 달리 〈흑백요리사〉는 ‘경쟁적 구조’만 활용해 몰입도를 높이는 프로그램에 가깝다. 서바이벌이라는 구조는 프로그램을 계속 보게 만들었지만 ‘도대체 누가 1등을 할 것인가’보다는 ‘어떤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이목이 쏠렸다.” 경연 프로그램은 포화 수준이지만 독창적 경쟁 방식으로 극복했다는 설명이다. “크리에이터들을 앉혀놓고 요리를 먹게 하는 데서 경연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가 빛났다. ‘먹방’ 하는 이들이 음식을 시켜서 먹으면 그 자체로 또 다른 콘텐츠가 된다.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팬덤을 통해 SNS에서도 2차로 입소문이 돈다. 그 밖에 팀을 이룬 대결이나 블라인드 테스트 등 여러 변주를 준 것도 특징이다.”
‘큰돈을 들여서 잘 만든 TV 프로그램의 인기’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례적인 현상은 TV 밖에서 벌어졌다. 이른바 ‘도장 깨기’가 유행하고 있다. 방송 출연자들의 식당에 모두 방문해 음식 맛을 보려는 이가 늘고 있다. 대부분의 식당은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다. 식당 예약 앱 캐치테이블은 10월8일 “〈흑백요리사〉 셰프(요리사)의 식당 검색량은 전주 대비 74배 늘었고 식당 평균 예약은 평균 148%, 최대 4937.5% 증가했다”라고 밝혔다. 경연에서 ‘상위 8인’에 든 요리사가 운영하는 한 식당은 전화 대신 온라인으로만 예약할 수 있다. 공연 예매처럼 정해진 날짜에 선착순으로 월간 예약을 한 번에 받았다. 10월10일 현재 이 식당은 어떤 날짜도 예약이 불가능하다. 11월까지는 예약이 꽉 찼고 12월 예약 접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저녁 식사 가격은 한 사람당 20만원대다.
방송 덕에 ‘파인 다이닝’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파인 다이닝은 직역하면 ‘좋은 식사, 정찬’쯤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를 필두로, 〈흑백요리사〉 경연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 다수가 파인 다이닝 출신이었다. 그러나 없던 유행이 방송 덕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오히려 코로나19 팬데믹 때 정점을 찍고 지금은 내려오는 추세”라고 말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탓에 해외 여행길이 막히자 파인 다이닝과 일식 오마카세, 고가 디저트에 돈을 쓰는 사람이 늘었다. 이때 생겨난, 적지 않은 레스토랑들이 최근 몇 년간 휴업·폐업했다. 업종 특성상 고가일 수밖에 없는 재료비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서다. 해외에는 ‘미쉐린 스타의 저주’라는 말도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 별(스타)을 부여하는 〈미쉐린 가이드〉에 수록된 식당이, 비용과 압박감 탓에 문 닫는 일이 늘면서 생겨난 말이다.
“불황으로 어려운 요식업계에 보탬 되길”
〈흑백요리사〉가 국내 식문화나 시장의 추세를 바꿀까? 요리사이자 음식 칼럼니스트인 박찬일 셰프는 방송의 인기와 별개로, 한국에서 미식에 대한 욕망은 무척 뿌리 깊다고 말했다. 일부 고위층이 찾던 ‘요정’이 지금과 같은 양식 레스토랑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시점은 해외여행 자유화부터다. “1990년대 미국이나 유럽에서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다. 유학생 등 해외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청담동 등지를 중심으로 이걸 공급했다. 외국 요리책을 보고 익히거나 고급 호텔에서 일한 외국인들에게 배웠다. 이때까지는 (고급 음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2016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이 들어올 즈음에는 외국에서 직접 경험을 쌓은 젊은 요리사도 많아졌고,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시장도 확보됐다.” 박 셰프의 말에 따르면 팬데믹이 끝나면서 미식이 몰락했고, 〈흑백요리사〉 덕에 다시 일어난다는 식의 평은 비약에 가깝다. 그는 “미식이 유행의 세계에 들긴 하지만 고급 식당이 급격히 생기고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마카세의 몰락은 과잉공급 탓에 일어난 문제라 좀 다르다. 전체 (미식)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10월7일 〈흑백요리사〉 기자간담회에서 PD들과 상위 8인 요리사들은 “불황으로 어려운 한국 요식업계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라고 입을 모았다. 한 출연자는 “방송 이후 식당에 손님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라고 말했다.
방송이 요식업계 전체에 어떤 식의 영향을 끼칠지는 알기 어렵다. 출연자들만 스타가 되는, 〈미쉐린 가이드〉를 대체할 ‘넷플릭스 가이드’가 될 수도 있다. 〈흑백요리사〉에 출연하지 않은 서울의 미쉐린 2스타, 1스타 레스토랑들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예약이 가능하다. 높은 방송의 인기가 일종의 팬덤으로 이어졌을 뿐 파인 다이닝이나 미식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는 평은 과대 해석일지도 모른다.
정덕현 평론가 역시 출연 요리사의 인기와 외식의 부흥은 별개라고 말했다. 다만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에서 방영됐다는 점에서 한식의 상품화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국내 일반 음식점보다는 해외에 진출한 한식 기업이 수혜자가 되기 좋다. 출연자인 (미국 국적 요리사) 에드워드 리가 꾸준히 한식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가 해외에서 새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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