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北으로 간 日‘신교향악단’(NHK 심포니 전신)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5.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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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1939년 입단한 조선인 유일 ‘신향’단원…광복 후 고려교향악단 악장,6.25이후 北 국립교향악단장
조선일보가 1935년9월 개최한 제1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쿠르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한 문학준. 연희전문 문과에 다니며 연전4중주단 리더로 활약하던 아마추어 음악도였다. 문학준은 1939년 9월 당시 일본 제1의 신교향악단에 조선인으론 유일하게 입단한 실력파였다. 사진은 조선일보 1935년 9월24일자 기사.

1939년 8월13일 낭보가 들어왔다. 연희전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이 조선인 최초로 일본 최고 연주단체인 신교향악단 제1바이올린주자로 선발됐다는 뉴스였다. 이 날짜 매일신보 기사(문학준군 영예, 동경 신교향악단 입단시험에 파스)는 ‘문학준군은 그동안 동경에서 세계적 제금가 악연(鰐淵)씨의 문하에서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지난 8일 반도인으로서는 최초로 신교향악단의 입단시험에 어렵지않게 통과’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8명이 함께 실력을 겨뤄 문학준만 통과했고, 지휘자 요셉 로젠슈톡의 찬사를 받았다고 전했다. 1926년 출범한 신교향악단(이하 신향·新響)은 창립 100주년을 코앞에 둔 NHK 심포니 전신이다. 경성방송국 중계를 통해 국내 음악팬에게도 익숙한 단체였다.

신향은 그해 6월 경성 연주회를 통해 교향악의 진수를 보여주면서 음악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터였다. 문학준은 이듬해 6월 두번째 경성 연주를 가진 신향의 정식 단원으로 고국팬 앞에 섰다. 로젠슈톡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5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을 연주한 신향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였다. 1939년 9월 입단한 문학준은 1945년 5월31일 자진 퇴단할 때까지 5년9개월간 신향에 몸담은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문학준이 도쿄 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1939년8월13일자.

◇계정식의 경성현악4중주단 활약

문학준(1914~1988)은 국내파 연주자였다. 1933년부터 연희전문 음악부에서 본격적으로 현제명,홍난파의 지도를 받았다. 그가 언제부터 도쿄에서 와니부치 겐슈(鰐淵賢舟)의 지도를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기껏해야 몇 달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문학준은 1939년2월까지 경성현악사중주단 멤버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경성현악사중주단은 독일 유학파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이화여전 음악과교수로 있던 계정식(1904~1974)이 주도한 실내악단이다. 문학준은 제2바이올린을 맡았고, 안성교(비올라), 김태연(첼로)이 멤버였다. 경성현악사중주단은 1938년12월~1939년2월 경성방송국에 매달 한차례씩 출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현악사중주를 연주했다. 1939년 3월부터 제2바이올린 주자가 김태섭으로 교체됐는데, 문학준의 도일(渡日)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준은 연희전문시절부터 현악4중주단 리더로 활약했다. 경성방송국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1934년2월26 일 연전사중주단 멤버는 문학준(제1바이올린) 김생려(제2바이올린) 이인범(비올라) 이유성(첼로)이었다. 베토벤의 가보트, 하이든의 미뉴에트처럼 소품 위주로 연주했다. (‘라디오’, 조선일보 1934년2 월26일) 문학준이 이끈 연전사중주단은 1934년 6월9일, 9월18일, 1935년 5월4일에도 경성방송국에 출연했다.(1936년3월4일에도 멤버 이름을 확인할 수없지만 ‘연전사중주단’이 출연했다.)

1940년6월 신향의 경성연주차 함께 온 문학준을 소개하는 매일신보 6월17일자 기사.악단의 규율과 통제가 군대 이상으로 엄격하다고 소개했다.

◇연전 음악부 주최 중등학교 음악회서 1등

전남 영암 출신인 문학준은 경성제1고보(경기고 전신)를 졸업한 뒤, 1933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1937년에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실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1929년1월21일 밤 마포 청년회관에서 열리는 음악과 동화대회에선 열다섯살 문학준이 바이올리니스트 대표로 소개됐다. 소파 방정환이 함께 연사로 나섰다.(’연강순회(沿江巡廻)로 동화대회개최’, ‘조선일보 1929년 1월18일)

경성제1고보 재학중인 1932년 6월 연희전문 음악부가 주최하는 제1회 조선 중등학교 현상음악회에서 1등으로 뽑혔다. 문학준은 독일계 작곡가 요아힘 라프(Raff)의 ‘카바티나’를 연주했는데 음정이 틀리는 곳이 있었지만 경연자 중 음폭이 제일 있었고, ‘익스프레션’(표현)도 어느 정도까지 발휘했다는 평을 받았다. 문학준은 안병소 홍난파 채동선에게 차례로 배웠는데, 경연 당시엔 채동선이 스승이었다. (‘전조선 남녀 중등교 현상음악회를 보고’, 동아일보 1932년 6월15일)

당대 조선의 대표적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레슨을 받을 만큼, 집안이 여유있고 실력도 뛰어났던 듯하다.

◇1935년 제1회 전조선 남녀 음악콩쿠르 1등

문학준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935년 9월19일~21일 조선일보가 개최한 제1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쿠르’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하면서부터다. 그해 7월 준공한 조선일보 태평로사옥 강당에서 열린 콩쿠르엔 피아노와 바이올린, 성악 3분야에 110명이 출연했다. 김영환 박경호 홍난파 계정식 현제명 김문보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심사를 맡았다. 문학준은 14명이 올라온 본선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했다. 피아노는 입상자가 없었고, 성악은 이인범과 고종익이 2위로 입상했다. 사실상 전체 1등이었던 셈이다.

홍난파는 심사평에서 ‘일등에 입상한 문학준군(文學準君)은 모든 점으로 보아서 예술가적 소질을 다분(多分)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제금학상(提琴學上)의 기교나 해석에 대한 조예가 또한 깊음을 알 수있다’고 호평했다. 그러면서도 ‘완강(頑强)한 용궁(用弓)과 바이브레이션의 필요 이상(必要以上)의 급속(急速)으로 인(因)하야 천래(天來)의 미음(美音)을 선상(線上)에서 뇌살(惱殺)시켜버리는 것은 가장 애석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무대에서도 좀 더 대담하게 연주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심사후감’, 조선일보 1935년9월29일)

문학준은 이듬해 콩쿠르에도 참가해, 바이올린 1위를 연속 거머쥐면서 그랑프리격인 사장상(賞)까지 받았다. 그는 ‘별로 숭배하는 음악가라고 따로 없다. 위대한 음악가는 다 숭배한다’면서 ‘앞으로는 들어앉아 공부만 하겠다’며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앞으로는 들어앉아 공부만 하겠습니다’,조선일보 1936년 10월28일)

◇연전 졸업후 철도국 취직

문학준은 1937년 연전 졸업후 철도국에 취직한 것으로 보인다.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12월 조선 불교 단체와 조선문예회 주최로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공연단이 파견됐다. 전 연희전문 교수로 소개된 현제명과 함께 문학준이 철도국 공무과 소속 직원으로 신문에 났다.(‘연극과 음악을 가지고 北支장병위문行’, 매일신보 1937년 12월19일) 총독부 산하 철도국에 취직했다는 얘기다. 위문공연은 12월22일 경성역을 출발, 봉천(선양)을 경유, 천진 북경 석가장 태원 등으로 20일간 이뤄질 예정이었다.

◇ ‘연습 또 연습’

문학준의 ‘신향’ 생활은 ‘연습, 또 연습’으로 바빴다. 로젠슈톡은 엄격한 지휘자였다. 매달 오디션을 통해 준회원, 정회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한번 단원이 됐다고 안심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경성 연주를 위해 내한한 문학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악단은 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것이 군대 이상이며 매년 정기 공연과 방송을 합해서 10회 연주를 하는데 연주마다 곡목을 교환하는 관계로 연구와 연습에는 상당한 노력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실력이 제일이니까 앞으로 동(同)악단의 확충과 한가지 조선인에게도 많은 가입의 기회가 있을 줄 압니다.’(‘신향의 이채,문학준군’,매일신보 1940년 6월17일)

입단 4년차인 1942년에도 ‘현재 나의 생활은 연습, 연주방송의 끊임없는 뒤푸리(되풀이)’라며 ‘기계’ ‘직공’을 자칭할 정도였다.(’음악苦',조광 제8권제1호,1942,1)

◇고려교향악단 초대 악장

8·15 전후 귀국한 문학준은 광복 한달만에 현제명 주도로 결성된 고려교향악단 초대 악장이 됐다. 고려교향악단은 창단 두 달 후인 11월 수도극장에서 계정식 지휘로 창단 공연을 가졌는데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이어 이듬해 2월16일~17일 제1회 정기연주회를 비롯, 1948년10월까지 정기공연 26회는 물론 수시로 특별연주회를 열었다. 1947년 6월 미소공위 재개 기념 연주, 1948년 1월 시공관에서 열린 광복 후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반주 등이다. 문학준은 악장으로 연주했을 것이다. 1948년 10월 고려교향악단이 활동을 마무리하자 이듬해 12월 옛 고려교향악단 멤버인 계정식 김생려가 결성한 서울교향악단에 합류했다.

문학준은 현악4중주단(문학준, 최영우,이재옥,김준덕)을 결성, 1948년 12월24~26일 ‘음악애호구락부’ 주최로 충정로 문화의집에서 열린 ‘실내악의 밤’에 출연했다. 이듬해1월2일 같은 곳에서’문학준 4중주단 연주회’를 열었다. 문학준은 1950년4월10일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서울교향악단과 함께 리사이틀을 열었다. 바흐의 협주곡 2번 E장조, 베토벤 협주곡 D 장조 를 연주했다.(‘문학준 제금독주회’, 조선일보 1950년4월6일)

◇서울대, 연희대 음악학부 교수

문학준은 현제명이 주도해 1945년 12월 인가를 받은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진으로도 합류했다. 이 학교는 1946년 8월 개교한 서울대에 흡수,통합되면서 음악교육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문학준은 1948년 작성된 음대 교수 명단에 조교수로 올랐다. 그러면서 1946년 연희대 음악부 주임교수로도 활약했다. 광복 직후 대학이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두 학교에서 모두 활약하게 된 듯하다.

문학준은 6.25 직후 월북했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1950년 8월부터 조선인민군협주단 관현악단 악장 겸 지휘자, 국립교향악단 악장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문학준의 월북 이유는 불명확하다. 서울에 남았다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끌려간 건지, 아니면 이전부터 사회주의를 동경했는지 알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을 갈구한’베토벤’을 존경한다던 바이올리니스트가 주체사상의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수없다. 1960년대 이후 그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1970년대~1980년대 북한을 오간 작곡가 윤이상도 문학준을 만날 수없었다고 한다. 한때 국내 최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문학준은 이렇게 남북 음악계에서 모두 잊혀졌다.

◇참고자료

허지연, 근대 음악사의 분단 극복하기: 월북 음악가를 통해 본 1940년대 음악계, 민족과 음악 제60호, 민족음악학회, 2020,10

이경분, 문화,정치적으로 본 신교향악단의 경성연주회(1939~1940), 한국예술연구 제29호,2020

문학준, 음악苦, 조광 제8권제1호,19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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