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도 후반작업도 척척…100% AI 제작 장편 곧 나와

김태훈 기자 2025. 8. 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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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생태계 판 흔드는 AI <상> 콘텐츠 산업 전방위적 침투

- 때론 각본가로, 때론 캐스팅 디렉터로
- 기획부터 완성까지 전 시스템 AI 활용
- CJ ENM 제작 ‘캣 비기’ 화제 되기도

- 영화제작사·방송사 다양한 기술 시도
- 긴 호흡 서사 풀기 어려운 점 등 한계

통통한 고양이 ‘비기’가 골목길에서 정체불명의 달걀과 마주친다. 다리가 달린 이상한 모양의 달걀이 깨지자, 그 안에서 병아리 ‘앨리’가 등장한다. 비기와 앨리의 좌충우돌 모험이 시작되는 특별한 순간이다.

지난달 부산영상위원회가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서 진행한 ‘AI 전문인력 양성교육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AI 기술을 활용한 촬영을 하고 있다. 부산영상위원회 제공


이 장면은 CJ ENM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캣 비기(Cat Biggie)’의 한 장면이다. 에피소드 30편이 각 2분 분량으로 구성된 ‘캣 비기’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캐릭터 디자인을 직접 수작업 한 것을 빼고는 기획부터 완성까지 제작 전 과정에 인공지능(AI) 기술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원은 단 6명, 제작 기간은 5개월에 불과했다. 기존의 애니메이션에 평균 20~30명의 인력이 투입돼 1년 이상 작업하는 것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효율성을 보여준다. 비록 장면 곳곳에 등장인물의 어색한 모습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기존의 제작 시스템을 AI로 바꿀 수 있음을 입증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이미 실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은 AI가 영화·영상 콘텐츠의 판을 뒤집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험적 기술로 여겨졌던 AI는 어느새 영상산업 전반에 침투했다. 이미 시나리오 집필부터 배우 캐스팅, 후반 작업, 홍보·마케팅까지 기존의 제작 과정 전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100% AI 기술로 제작한 장편영화도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저예산 영화부터 OTT 대작까지 AI 활약

CJ ENM이 지난달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한 AI 애니메이션 ‘캣 비기’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AI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영역은 ‘기획’ 단계이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산업 구조 속에서 AI는 콘텐츠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하고 위험 부담을 줄이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됐다. 2013년 넷플릭스가 선보인 미국 정치 스릴러 ‘하우스 오브 카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작품은 1990년 영국 BBC의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넷플릭스는 기획 초기 단계에서 자체 이용자 데이터를 분석해 리메이크작의 흥행 가능성을 예측했다. 그뿐만 아니라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배우 케빈 스페이시, 감독 데이비드 핀처의 캐스팅도 결정했다. AI가 ‘캐스팅 디렉터’ 역할까지 한 셈이다.

또 AI는 기존 영화 시나리오를 학습해 제작자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각본가’의 역할도 한다. 스위스 피터 루이지 감독의 ‘더 라스트 스크린라이터’(2024)는 생성형 AI ‘챗GPT’가 각본가로 영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며 화제를 모았다.

현재 AI 활용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후반작업이다. 시각 특수효과(VFX)와 음성 변환, 작곡 등 복잡한 공정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예산과 시간, 기술적 한계로 포기해야 했던 장면이 생성형 AI를 통해 구현할 수 있게 됐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영원한 항해자 에테르나우타’(2025)의 경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을 생성형 AI 기술로 구현해 사실감 있게 만들어냈다. 이는 넷플릭스 콘텐츠 사상 최초로 AI 기반 VFX 기술이 적용된 사례이다.

주연 배우들의 헝가리어 발음을 보정하기 위해 AI 음성 변환 기술을 활용한 영화 ‘브루탈리스트’.


유대계 헝가리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브루탈리스트’(2024)는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펠리시티 존스의 헝가리어 발음을 원어민처럼 보정하기 위해 AI 음성 변환 기술을 활용했다. 또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건축 도면 제작에도 생성형 AI가 일부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부분이 논란이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주요 부문을 석권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국내 콘텐츠 업계도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춰 AI 기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디즈니+의 드라마 ‘카지노’(2022)에서는 배우 최민식이 30대 시절 역할로 등장했다. 1962년생으로 당시 60세였던 그를 디에이징(De-aging) 기술을 활용해 얼굴과 목소리를 30여 년 전으로 되돌린 것이다.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2024)에 등장한 눈 덮인 자작나무 숲 역시 생성형 AI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한겨울 설산의 모습을 담은 듯 생동감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CJ ENM 스튜디오 센터 내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부산 출신 감독과 지역 제작사가 손잡고 만든 ‘메이드 인 부산’ 영화 ‘원정빌라’(2024)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비의 30%가량을 절감했다. AI는 주로 후반 작업에 활용됐으며, 오프닝·엔딩 시퀀스를 비롯해 영화에 등장하는 4개의 주제 이미지 등을 생성형 AI로 제작했다. OST 제작에도 AI가 투입됐다. 영화 내용과 콘셉트를 바탕으로 AI가 가이드 음악을 작곡했고, 이를 통해 영화의 톤과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구현했다. 연출을 맡은 김선국 감독은 “작업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이미 영화 제작 현장에서 AI가 활발히 쓰이고 있다”며 “앞으로 영화계에서 AI 기술 활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0% AI로 만든 콘텐츠, 곧 관객과 만나

단순한 제작 보조를 넘어 AI 기술로만 콘텐츠를 완성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MBC의 장수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지난 6월 국내 방송 최초로 생성형 AI 기술로 제작한 드라마타이즈 콘텐츠(한 편의 드라마처럼 서사와 줄거리를 갖춘 콘텐츠)를 방영했다. 재연 배우 대신 AI가 만든 가상 인물이 출연해 우주 유영에 성공한 소련의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이야기와 100여 년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벌어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생생하게 구현했다.

배우 나문희의 디지털 초상권을 활용해 제작한 AI 영화 ‘나야, 문희’.


지난해 12월에는 배우 나문희를 주인공으로 한 AI 영화 ‘나야, 문희’가 극장에서 개봉됐다. 국내 최초로 실제 배우의 디지털 초상권을 정식 계약해 제작된 AI 영화로, 실제 나문희가 출연하지 않았지만 AI 기술을 활용해 나문희의 모습과 음성을 구현한 단편영화 5편을 옴니버스 방식으로 구성했다.

물론 아직 AI 콘텐츠의 한계도 명확하다. 현재 시중의 생성형 AI로 한 번에 구현할 수 있는 영상 분량은 5초 내외로, 캐릭터와 배경의 일관성을 유지하거나 긴 호흡의 서사를 풀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 음성 생성이나 변환 역시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진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장르에서 활용할 때 특히 이런 단점이 두드러진다. 아직은 AI가 작업 일부분에서만 활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라면 머지않아 AI가 콘텐츠 제작 공정의 중심으로 들어설 것으로 본다. 국내 대표 미디어 콘텐츠 기업 CJ ENM은 최근 ‘AI 스튜디오’로 전환을 선언했다. 지난 6월 3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본사에서 열린CJ ENM 컬처토크에서 CJ ENM 신근섭 전략기획 담당은 “AI 기술, 콘텐츠 기획, 사업 역량을 모두 겸비한 전문 크리에이터를 양성하고 AI 콘텐츠에 특화된 조직을 확대해 글로벌 AI 스튜디오로 도약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캣 비기’에 이어 올해 안에 AI로 만든 장편 영화 ‘아파트’를 선보일 계획이다.

최근 CJ ENM과 AI R&D 프로젝트를 수행한 OGNR랩(AI 스튜디오) 심재홍 대표는 “결국 AI는 영화·영상 콘텐츠 제작의 중심에 설 것”이라며 “국내 영화계가 계속해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AI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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