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고문피해자’ 한둘이 아니다…치유센터 제때 세웠더라면
고문피해자 문국진 지원 모임 결성
다른 피해자들도 찾아와 사례 누적
1994년 최영미·김복영 등 8건 발표
고문 뒤 정신이상…끝나지 않는 고통
화성 연쇄살인 범인 몰린 김종경씨
심령술사 꿈 내용 따라 용의자 지목
경찰들 가혹한 고문에 허위자백까지
87년 박종철 죽음 뒤 “고문근절” 여론
그 이후로도 수사기관 고문 지속돼
피해자도 정신이상 후유증 속앓이만
고문피해 치유센터 건립 노력은 실패로
문국진씨의 아내 윤연옥씨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1980년대 ‘운동권’ 사람들에게 자행된 무자비한 투옥과 고문의 현장 속에서 한 인간이 이렇게 처절하게 파괴되었음을 세상에 알리고, 인간성을 파괴한 잔혹한 고문과 고문의 두려움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킨 사람을 미친 척한다며 방치한 살인적 행위에 대한 진상이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국회 청원과 사례 발표회
소송 제기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이하 모임)으로 고문 피해자들이 찾아왔다. 모임에서는 고문 피해자들 사례를 수집하면서 고문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국회에 촉구하기로 했다. 1993년 12월29일에는 박정기, 인재근, 최의팔, 서준식, 최민화 등 1214명이 연명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 청원은 임채정 의원 외 국회의원 78명에 의해서 국회에 정식 소개되었다.
청원의 내용은, ①고문 후유증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 ②고문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 대책 수립, ③고문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보상 실시, ④고문의 근절과 고문 피해자에 대한 치료와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⑤유엔 고문방지협약 가입, 국가 차원의 고문 근절 의지 천명 등이었다. 이 중에 이뤄진 것은 1995년 1월에 국회 비준을 받아서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것 외에는 없었다. 그만큼 정부도 국회도 고문 피해자 모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었다. 만약 이때의 청원을 접수한 국회가 적극적으로 청원을 심의하여 특별법을 만들었다면, 특별법에 의해서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전수조사가 실시되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지원이 시작되었다면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도 모임은 꾸준히 고문 피해자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고문 피해자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일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임은 1994년 4월11일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등과 공동으로 ‘건강세상을 위한 치과의사회’ 강당에서 ‘고문 후유증 사례 발표 및 토론회’를 열었다. 이 보고회에서는 8건의 고문 피해 사례를 발표했다. 이 중 몇건의 사례를 소개한다.
1980년대 초, 여대생이었던 최영미씨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인천분실 지하실로 끌려가서 11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는 최씨가 입을 열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을 다녀온 이후 최씨는 발작을 하는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다.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던 그의 아버지가 86년에 돌아가시는 일까지 있었다.
김복영씨는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1986년 서울 명동 4·19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경찰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고, 구속된 뒤 구치소에서 집단 폭행 등 고문을 당했다. 3개월간의 구치소 생활 뒤에 출소하였는데, 그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는 일기에서 “너희들은 항상 나의 뇌수에 칼침을 꽂고 나의 꿈은 항상 피비린내로 얼룩졌다”고 썼다. 이후 김씨는 가족들의 지극한 간호와 돌봄에도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강환웅씨는 중앙대학교 학생으로 1986년 11월 서울 신길동 학생시위 때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노량진경찰서에서 혹독한 폭행을 당했다. 구속되어 영등포구치소 수감 중에는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많이 풀어 먹여놓고 거꾸로 매달아 놓아 음식물을 토”하게 하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3개월의 복역 뒤 집행유예로 출소하였지만,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 몰린 김종경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5일 동안 조사를 받았던 김종경씨의 경우는 매우 황당한 사례였다. 심령술사가 꿈에서 사건의 범인으로 ‘김종경’이라는 사람을 지목받았다면서 서대문경찰서에 제보했다. 당시 사건 범인을 잡으면 1계급 특진을 하는 등의 포상에 눈이 어두워졌을까?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심령술사의 말만 듣고, 전기공으로 일하고 있던 김종경씨를 임의동행 방식으로 끌고 가서 5일 동안 고문을 가해서 범인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았다고 하니 안 그러겠는가. 김씨는 한순간에 흉악한 살인범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하지만, 김씨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고, 법원으로부터 38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대문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던 후유증으로 사건 4년 뒤에 생을 마감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고문 근절에 대한 여론이 높았음에도 여전히 고문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당시 모임에 온 사례들은 다른 고문 피해자들에 비하면 고문의 강도가 약한 것들이었다. 조작 간첩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십일 동안 밀실에서 가했던 고문이나 반국가단체·이적단체 등의 사건에서 자행되었던 고문에 비하면 약한 사례들일 것이다.
1993~94년 당시에는 고문을 당했다고 공공연히 드러내고 얘기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운동사회에서는 고문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한 것이고, 그것은 곧 운동가로서 나약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또 고문 후유증의 다수는 정신이상 증세이므로 이런 증세를 보인다고 알리는 것을 무척이나 꺼렸다. ‘미친 놈’ 취급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문피해자와 가족들은 되도록 이런 사실들을 감추려고 했다. 가족들은 쉬쉬하면서 이웃들 몰래 정신병원을 찾았다. 그렇지만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그때는 트라우마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던 시절이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던 정신과 의사들이 제대로 치료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어떤 피해자 가족들은 병원에 가도 낫질 않으니까 점집을 찾아가거나 무당을 찾아가 굿을 벌이기도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문국진씨의 사례는 이와 같은 처지에 있던 고문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었다. “한 인간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더 이상 주저앉아 지켜보지 못하겠다”며 문씨 사건을 공개한 윤연옥씨의 뒤에는 문씨의 연세대학교 동기들이 있었다. 그들은 1993년부터 최근까지 후원금을 모아서 30년 동안 그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런 주위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이 한 사람을 살렸다.
흐지부지된 고문 피해자 치유센터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에서는 고문 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를 만들려고 의논했다. 다른 나라들에는 고문 피해자 치유센터가 있었다. 심지어 방글라데시와 같은 후진국에도 있는 고문 피해자 치유센터가 우리나라에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길승 선생님을 비롯한 의사, 변호사 등과 몇몇이 수차례 치유센터 건립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지만, 결실은 보지 못했다.
모임을 통해서 만들고 싶었던 고문 피해자 치유센터는 2013년에 들어와 광주에서 트라우마 센터가 만들어져 시범 운영되다가 올해 7월에는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가 정식 건립되어 개관했다. 센터의 자리는 5·18 당시 광주국군병원 자리였다. 이 센터는 5·18 피해자를 비롯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제주도에는 제주 4·3피해자들을 위한 트라우마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고문에 대한 기록을 집대성한 이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박원순 변호사다. 10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서 2006년에 ‘야만시대의 기록-고문의 한국현대사’ 3권을 펴냈다. 1권은 총론이고, 2권은 일제시대에서 박정희 정권까지의 고문 사례를 정리했고, 3권은 전두환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까지의 고문 사례를 다뤘다. 이 역작은 ‘국가보안법 연구’ 3권과 함께 그가 남긴 중요한 인권기록이다.
이렇듯 나의 생활은 고문 피해자 모임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니 컴퓨터 회사 일에 자꾸 소홀해갔다. 사장님이신 김거성 선배는 어떤 눈치도 주지 않았지만, 회사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나는 1994년 8월1일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로 들어갔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이철규가 김건희 대변…이원모 배지 달아주려고 저 XX 떨어”
- 잃어버린 고양이 ‘서울~부산 2번 왕복’ 거리 주인 곁으로
- 사라진 필리핀 가사관리사 2명…졸속 도입이 부른 ‘예견된 이탈’
- 이거 가짜 뉴스 아냐?…배추 한포기 ‘2만원’
- 인력 부족한데…수사관·변호사를 공수처장 비서로
- 문 전 대통령 “검찰, 이재명에게도 이러는데 국민한테는 얼마나…”
- 당장 내년에 써야 하는데…아직 실물도 없는 AI 교과서
- 아이유 넘어선 아이유…콘서트 이틀간 10만명 ‘신기록’
- 일본 멸망 위해 아침 저녁으로…‘멸왜기도문’을 아시나요
- “오빠 사랑해♡”…22만 유튜버 작품에 낙서한 남녀 붙잡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