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O 리포트] 주주 자본주의와 국민연금의 굴욕

금융지주, 외국인 76% 대 국민연금 9% 대결

주주 찬성률(88%), 특별결의(66.7%) 무력화

도덕성 아닌, 수익성 기준 주주자본의 승리

매년 3월은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집중되는 시기다. 이 주총 시즌에서 항상 최대 관전 포인트는 자본시장의 큰 손인 국민연금(NPS)의 행보다.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주총 거수기’라는 오명을 달고 살며 의결권 행사에 소극적이던 국민연금이 지난해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상법 개정 등 제도 정비를 거치며 적극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올해 3월 주총 ‘빅 시즌’ 결과는 참담했다. 특히 금융지주를 비롯한 주요 금융사의 정기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눈에 크게 띄지 않는다. 4대 금융지주(KB, 신한, 하나, 우리)의 최대주주로서 ‘자본시장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국민연금의 위상이 사실은 ‘종이 호랑이’ 취급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이 ‘기업가치 훼손’이나 ‘내부통제 부실’을 이유로 주요 금융사 현직 CEO 연임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시장은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인 주주들은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를 등에 업고 현 경영진의 성과와 주주환원 정책에 박수를 보내며 국민연금의 영향력을 무력화시켰다.

시장에서는 ‘주주 자본주의의 승리’이자 ‘연기금의 굴욕’이라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주인 없는 회사’의 지배구조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추진하는 금융당국의 제도 개선(특별결의, 이사 임기 단축 등)이 외국인 중심의 ‘주주 동맹’에 밀려 실효성이 크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대주주의 고립과 무기력

지난달 금융사 주총에서 국민연금은 상당 지분을 보유한 주요 주주지만 의견이 최종 관철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2025년말 기준 국민연금은 KB금융(8.68%) 신한금융(9.03%) 하나금융(8.66%) 우리금융(6.69%) 미래에셋증권 (6.91%) 한국금융지주(13.35%) 대신증권(5.98%) 등 국내 유력 금융사의 최대 주주 내지 핵심 주주다. 그러나 실제 주총 표결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이 부결로 이어진 사례는 전무하다.

신한금융 진옥동 회장 연임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는 진 회장이 과거 신한은행장 시절 라임 사태와 관련해 주의적 경고를 받은 이력을 근거로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가치 침해 이력이 있는 자’로 규정하며 연임에 반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주주들의 88% 찬성으로 무력화됐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주총 특별 결의 기준(66.7%)을 압도적으로 넘는 수치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결된 사례는 더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자사주관련 정관 변경과 김미섭 사내이사 선임건, 대신증권 양홍석 사내이사 선임건, KB금융의 이사 보수 한도 산정 기준건 등 국민연금이 반대한 회사측 안건이 모두 가결됐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2024년 국민연금이 반대 의견을 표명한 안건 중 관철된 비율은 4%에 불과했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무시되는 비율이 96%에 달한 것이다.

외국인 주주 자본의 헤게모니

최대주주 국민연금이 이처럼 무기력한 이유는 명확하다. 금융사의 지분 구조 때문이다. 4월 현재 국내 4대 금융지주의 외국인 지분율은 평균 63%에 달한다. 특히 외국인이 선호하는 KB금융은 76%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 수준이다. 외국인 주주들은 국내 정치 지형이나 정서적 책임론보다는 철저한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기준으로 행동한다.

4대 금융지주 모두에서 5%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글로벌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비롯해 캐피탈그룹, JP모건체이스 등이 국내 금융시장의 실질적인 지배자다. 이들은 디지털 전환이나 ESG인프라 구축 등 장기적 투자 가치도 고려하지만 본질적으로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 환원 성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최근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이나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99.3%)이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배경에는 취임 후 달성한 사상 최대 실적과 밸류업 프로그램 대응이 있었다. 외국인 주주 눈에는 이들 경영진이 ‘기업가치 훼손자’가 아니라 주가와 배당을 끌어올린 ‘유능한 경영자’였다.

글로벌자문사의 보이지 않는 손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금융 시장의 복잡한 지배구조와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 글래스 루이스(Glass Lewis) 등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지난 주총 시즌에서 이들 자문사는 주요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 안건에 대해 일제히 ‘찬성’ 권고를 냈었다.

이들의 논리는 단순 명료하다. 경영상 실책이 법적 결격 사유로 이어지지 않는 한, 실적 개선과 주주 친화 정책을 펼치는 경영진을 굳이 교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도덕적 잣대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 외국인 주주들은 글로벌 자문사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철저히 실리적인 선택으로 거대한 ‘의결권 방어선’을 구축한다. 국민연금이 신한금융 지분 9%를 가진 최대주주로서 강하게 반대했지만 블랙록과 캐피탈 그룹 등 외국계 자본 연합이 60~70% 지분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승부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날 수 밖에 없다.

특별결의제도 무용지물, 규제의 역설

‘주인 없는 회사’ 문제를 개선할 묘책으로 금융 당국이 추진하는 ‘주총 특별결의’ 계획 역시 금융지주 주주 구성 특성으로 미루어 보아 현실성이 의심된다. 현재 일반결의 요건(1/4 이상 출석, 과반 찬성)을 강화해 CEO가 연임하려면 ‘1/3 이상 출석, 출석 주주 2/3 이상 동의’로 변경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3연임 시에는 출석 주주의 3/4 이상 동의를 받거나 법적으로 아예 금지하는 방안까지 거론된다고 한다.

하지만 법적 금지는 물론 최근 주총 찬성률 수치를 보면 이러한 대책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진옥동 회장(88%) 임종룡 회장(99.3%) 빈대인 회장(91.9%) 연임 찬성률이 모두 당국의 가이드라인 수준인 특별결의 요건(66.7%)을 거뜬히 넘는다. 외국인 주주들이 지금처럼 현 경영진을 지지하면 특별결의제도 도입은 유명무실한 규제만 하나 더 추가되는 모양이 된다. 오히려 특별결의 요건을 충족한 회장들에게는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죄부가 될 뿐이다.

규제의 역설은 사외이사 임기 3년 단임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른바 ‘거수기 이사회’ 문화 개선이 취지지만, 임기를 지나치게 단축하면 금융업 전문성을 쌓기도 전에 교체돼 오히려 경영진 견제 역량만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외부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초빙하는 이유는 전문가 식견을 활용해 경영 리스크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다.

단순한 독립성 확보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경영진의 ‘이너 서클’을 감시할 수 있는 권한과 지원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굴욕을 성찰의 기회로

국민연금이 주요 금융지주 주총에서 거듭 패배한 것은 주주 자본주의 원리가 잘 작동한 결과다. 외국인 주주 70% 시대에 최대주주라는 명분만으로 시장을 움직이려던 시대는 끝났다.

이는 금융사들이 시장 기대에 부응해 성과를 내고 있고, 시장은 이들의 경영 연속성을 중요하게 판단한다는 증거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특별결의제도나 이사 임기 제한 등의 규제는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지배구조 선진화의 핵심은 제도의 문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문턱을 넘는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공정한가에 달렸다.

국민연금이 ‘정권의 대리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수익자의 장기가치를 극대화하는 진정한 ‘파수꾼’으로서 시장의 다른 투자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주주 자본주의는 냉정하지만 정직하다. 실적과 배당 그리고 투명한 소통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표로 움직인다. 국민연금이 다음 주총에서 굴욕이 아닌 금융회사 지배구조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협업’의 성공 기록을 남기길 기대한다.

허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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