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최고의 한국 영화에 도전장을 내민 작품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 롯데엔터테인먼트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787] <콘크리트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2023)

글 : 양미르 에디터

기술의 발전으로 21세기 들어 수많은 '디스토피아' 한국 영화들이 관객을 찾아왔다.

어떠한 재난으로 지구 혹은 한반도가 마비된 상황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작품들은, 이상하게 관객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기술력'의 발전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관객에게 크게 설득되지 않는 세계관을 만들었다거나, 관객의 심리를 대변하는 캐릭터를 만들지 못한 경우가 있었던 것.

대표적인 작품이 연상호 감독의 <반도>(2020년)였고, 조의석 감독의 <택배기사>(2023년)였다.

두 작품은 '시각 효과 부분'만큼은 칭찬받았으나, 할리우드 유수의 디스토피아에서 본 듯한 클리셰 대사들, 혹은 세계관을 옮기는 과정에서 '한국화'가 제대로 되지 못해 나온 한계가 눈에 보이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런 단점을 완벽히 상쇄한 작품이었다.

작품을 만든 엄태화 감독은 이미 우리 사회의 '비주류 계층'에 대한 장편 영화들을 줄곧 연출해 왔었다.

장편 데뷔작 <잉투기>(2012년)는 '잉여'라 불리는 청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재밌게 담았고, 첫 상업 영화 <가려진 시간>(2016년)은 아이의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한쪽이 치우친 의견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한 작품으로 한국 '영어덜트' 판타지의 진화를 보여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대지진으로 모든 건물이 박살 난 가운데, 천운처럼 아파트 한 채만 무너지지 않고 남았다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는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의 제작진이 직접 만들었다는 서울의 아파트 역사로 출발한다.

<모던코리아>가 한국의 다이나믹한 역사를 과거 KBS가 남긴 자료들로 재구성해 보여준 대표 다큐멘터리 시리즈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엄태화 감독이 <모던코리아> 제작진에게 사료를 요청한 이유는 확고해 보였다.

현실에선 볼 수 없을 대재난을 보여주지만, 작품은 엄연히 현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소개한 것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아파트가 지닌 의미는 단순히 '의식주'에서 '주'를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다.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가 된 아파트는 지어진 장소, 건설 브랜드, 매매 방법, 면적 등에 따라 '계급'이 되었으며, '권력'이 됐다.

어느 겨울날, 대지진 이후 홀로 서 있는 '황궁 아파트'는 연식은 좀 된 것 같은 '서민'들이 주거하는 복도형 아파트로, 바로 옆에는 새로 들어선 '드림팰리스'('황궁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했었다)가 있었다.

평소 '드림팰리스' 사람들을 비롯한 주변의 생존자들은 겉은 멀쩡한 '황궁 아파트'를 향해 모여든다.

일시적 '공생'은 이뤄지지만, 식량과 식수가 조금씩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아파트 주민들은 1207호에 사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의 주도로 회의를 시작한다.

'금애'는 새로운 주민 대표로 902호 주민 '영탁'(이병헌)을 추천했다.

'영탁'은 망설임 없이 화염에 휩싸인 집 안에 들어가 단숨에 불길을 진압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목받았고, 투철한 희생정신을 인정받아 주민 대표로 선출됐다.

주민 대표의 자격으로 이뤄진 투표 끝에 외부인을 '방출'하자는 결과가 나오고, 20년 가까이 일한 '경비원'을 포함한 외부인은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사이 602호에 사는 '민성'(박서준)은 의경 출신에 공무원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주목받았고, '영탁'에 의해 방범대 반장을 맡게 된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내 '명화'(박보영)와 함께 생존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민성'은 헌신적이며 거침없는 '영탁'에 점차 동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추위에 오갈 곳 없는 외부인에게 방 한 칸 내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간호사로 다친 주민들을 돌보는 데에도 앞장선 '명화'는 시간을 거듭하며 변해가는 '민성'과 주민들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그러던 중 903호 주민 '혜원'(박지후)이 기적적으로 생존해 홀로 아파트로 돌아오는 일이 벌어진다.

'혜원'은 새롭게 생긴 '주민 수칙' 아래 이전과 달라진 주민들과 아파트 생활 등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 지옥 같은 바깥세상을 뒤로 한 채, '마을 잔치'처럼 춤과 노래를 부르며 낙관적으로 살아가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을 보며 오히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언제나 그랬듯이, '디스토피아' 소재 영화의 특징은 '사람'이 '재난'보다 더 무섭다는 걸 극대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데 있다.

마치 <태조 왕건>(2000년~2002년)의 '궁예'(김영철)가 인심을 얻고 폭군이 되어가는 것처럼, 영화는 '영탁'이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낸다.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단연 '민성'과 '명화' 부부의 선택일 것이다.

'민성'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당장의 안위를 위해서 '윤리적 가치 판단'을 접는 선택을 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명화'는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질 수 있겠으나, 나만 살아남기 위해 흔들리는 사람 사이에서 꿋꿋하게 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엇갈리는 부부의 '답답한' 선택과 미래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부의 선택을 어떻게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이는 단순히 '사회 풍자'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게 하려는 감독의 세심함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술은 거들뿐'(물론, CG로 만들어진 지진 장면은 훌륭한 수준이다), 기술의 자랑보다는 디테일한 이야기에 조금 더 촛점을 맞춘 작품이다.

오히려 기술의 분량을 줄이면서, 사람들의 대화에서 나오는 묘사들이 더 강력해지는 힘까지 장착한다.(이를테면, 과연 서울역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만 이런 상황일까? 등이 있겠다)

그렇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흥미로운 한국 사회의 윤리 실험, 그리고 그 실험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어우러진 이번 여름 최고의 한국 영화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작품이 됐다.

한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 후속편이 현재 제작 중인데, 마동석, 이희준이 주연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2023/08/12 CGV 구로

콘크리트 유토피아
감독
엄태화
출연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이서환, 강애심, 이효제, 김주승, 김병순, 이선희, 권은성
평점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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