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가을 정취 짙어지게, 후각 사로잡는 ‘만리향’ [ESC]

한겨레 2024. 10. 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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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목서
흰꽃 은목서, 주황색꽃 금목서
샤넬 넘버5, 금목서향 모티브로
목서향 펩시콜라, 중국서 판매도
목서와 구골나무의 교배종인, 흰 꽃이 피는 은목서. 천리포수목원 제공

지난해 고등학교 때 친구 세 명과 2박3일로 여수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모두 고향이 강원도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쭉 서울에서 살아온 탓에, 남부지방에서만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생경한 정취를 굳이 꼭 집어내 이야기하는 것이 여행 내내 하나의 놀이가 됐다.

한 친구는 유람선을 타고 여수 반도를 바라보며 “맨날 탁 트인 동해 수평선만 봤는데, 여기는 시야에 섬이 걸리는 게 신기하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친구는 낙지 전골을 호로록 들이켜며 “낙지를 이렇게 한 번에 많이 먹어보는 건 처음이야”라고 했다. 여수 밤바다가 선사한 말랑한 기분에 취해 함께 숙소로 돌아오는 길. 어두운 골목길에서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반들반들한 잎을 본 내가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여기에는 먼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네. 나 먼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둔 거 처음 봐.”

나무껍질이 코뿔소 가죽과 닮아

남부지방인 여수는 중부지방보다 겨울이 따뜻하다. 상록활엽수의 월동이 가능하기에 먼나무와 같이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나무를 가로수로 심을 수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무를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고, 나무를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깨닫지 못했을 사실이다. 지금도 한겨울 추위를 버티기 위해 두꺼워진 가죽질의 잎을 보고 있자면 여수의 가로수길 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호랑가시나무, 구골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다정큼나무….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짙은 푸른빛을 선보이는 다양한 상록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10월 그윽한 향기로 수목원 탐방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서는 더욱 특별한 매력이 있다.

꿀풀목 물푸레나무과에 속한 목서(木犀)는 중국 원산으로, 나무껍질의 색상과 무늬가 코뿔소(犀牛)의 가죽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매끈한 회색 가지가 코뿔소 가죽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어로는 프래그런트 올리브(fragrant olive), 스위트 올리브(sweet olive), 티 올리브(tea olive)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같은 물푸레나무과에 속한 올리브 나무와 열매가 비슷하게 생겼고, 동시에 진한 꽃향기의 특성을 잘 표현한 이름이다. 목서의 학명(Osmanthus fragrans) 역시 향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스메’(osme)와 꽃을 의미하는 ‘안토스’(anthos)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흰 꽃이 피어 은목서라고 불리는 것은 목서와 구골나무의 교배종이다. 주황색 꽃이 피는 금목서는 중국 원산이다. 무척 향기로워 그 향이 만리까지 퍼진다고 해서 ‘만리향’(萬里香)이라고도 불리는 목서는 매년 10월이 되면 수목원 탐방객들의 후각을 사로잡는다. 복숭아향이나 오렌지향, 또는 자스민향과도 비슷한데, 명품 브랜드 향수인 샤넬 넘버5가 금목서 향을 주요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중국에서 왕족과 귀족을 위해 재배된 목서는 당나라 시기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송지문은 목서의 향을 두고 “중추절 목서꽃은 저물고, 천상의 향은 구름 너머로 향하네”라고 표현한 한편, 송나라 대표 시인 양만리 역시 “지상이 아닌 달에서 온 향기는 온 산을 만개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의 목서 사랑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목서향을 가미한 커피, 목서 케이크, 목서 푸딩 등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들이 중국 전역에서 사랑받고 있다. 2020년 글로벌 기업 펩시는 목서향을 첨가한 콜라를 중국에서 판매하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개발되어 판매된 최초의 로컬 콜라맛이었다. 지난 2022년 항저우 장애인아시안게임 당시 금·은·동 메달에는 항저우의 도시화인 목서 꽃잎이 수놓아졌고, 축하 꽃다발에도 목서가 장식됐다. 대만의 오래된 결혼 풍습에는 신부가 사랑과 신뢰를 상징하는 목서 화분을 준비해 새 가족들에게 선물하는 문화가 있다.

수목원이 자리한 충남 태안은 위도상 중부 지역에 속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성 기후인 덕분에 다양한 남부수종이 잘 자라는 곳이다. 은목서보다 내한성(추위를 견뎌 내는 능력)이 훨씬 약하지만 더욱 진향 향기를 내뿜는 금목서도 10월이 되면 수목원 곳곳에서 향을 드리운다. 천리포수목원의 식물 이력관리시스템을 보면 1972년 처음으로 금목서를 들여왔는데, 약 20여년 가까이 온실에서 키우다 1991년 수목원 노지에 심었고 1년 뒤 바로 고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 수목원에 남아있는 금목서는 추위를 버티고 살아남은 개체들이다. 사실상 금목서가 자랄 수 있는 지리적 한계가 천리포수목원 정도까지인 셈이다.

건조한 바람·추위에 약한 상록수

주황색 꽃이 피는, 중국이 원산지인 금목서. 천리포수목원 제공

목서는 3~12m 높이로 자라며, 가죽질의 잎 상단 또는 전체에 미세한 톱니가 있다. 네 갈래로 갈라지는 작은 꽃은 잎겨드랑이에 10개 정도씩 모여 핀다. 목서는 기본적으로 정갈한 수형을 유지하기 때문에 관리하기 쉬운 수종이다. 탐방객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가지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비옥하고 배수가 잘되는 양지에서 잘 자라는데, 상록수인 만큼 건조한 바람이나 추위에는 약하다. 토양이 습해 생육이 불량한 경우에는 곰팡이병이나 해충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한 번 자리를 잘 잡으면 가뭄이나 해충 피해에도 잘 버티는 편이다.

수목원에서는 큰 연못부터 약 70m 오솔길을 따라 200여 그루의 은목서가 줄지어 심겨 있다. 지난 1998년 수목원 옆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원래 심겨 있던 산사나무 수 그루를 수목원 비공개 지역으로 옮겨심었고, 산사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돌담과 펜스를 세워 도로와 경계를 지었다. 아이비나 등나무와 같은 덩굴 식물을 심었지만 조금 허전해 보였고, 수목원 외곽을 차폐하는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향기도 즐길 수 있는 상록수를 고민하다 2013년 은목서를 들여와 돌담 아래 줄지어 심었다. 높이 1m 남짓했던 은목서 묘목은 10년이 지난 현재 성인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자랐다. 덕분에 가을이 되면 탐방객들이 달콤한 목서향에 감탄하며 지나가는 공간이 되곤 한다.

역대급 무더위에 사람뿐 아니라 식물도 지쳤던 여름이 겨우 지난 느낌이다. 수목원이 자리한 충남 태안은 지난 8월 한 달간 여섯 번의 폭염 경보가 내려졌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 불과 하루였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더위에 지쳐 축 늘어진 나무들이 걱정스러웠던 것만큼 수목원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결실의 풍경은 더욱 큰 선물처럼 느껴지곤 한다. 짧아서 더 애틋한 이 시기, 우리 주변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가을 정취를 열심히 느껴보자. 짙은 목서향도, 노랗게 물들며 떨어지는 가로수 은행잎도, 가을 햇살에 붉게 익어가는 마가목 열매도, 서늘한 가을 바람에 더욱 푸른 빛을 내뿜는 상록수 이파리도 모두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니 말이다.

황금비 나무의사

한겨레 기자로, 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 말 없는 나무가 좋아서 나무의사 자격증을 땄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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