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젊은이의 피’와 ‘리영희의 혼’ 먹고 자랐다

고명섭 기자 2024. 10. 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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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S] 커버스토리 ‘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거짓·폭압, 권력 판칠수록…푸르게 타오르는 진실의 불꽃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나 애국이나 그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고 리영희 선생 2004년 인터뷰, 리영희 재단 갈무리)

시인 김지하는 ‘1974년 1월’이라는 시를 이렇게 시작했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왜 1974년 1월은 죽음이었던가. 그 두 해 전 10월, 박정희는 보통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헌법을 폐지하고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었다. 이듬해 8월 국외에서 반유신 투쟁을 하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수장될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대학생과 지식인의 반유신 저항운동에 불을 질렀다.

유신정권은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 2호를 공포해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이들을 처벌할 근거를 만들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유신이라는 어둠에 들던 작은 빛마저 막아 없앤 꼴이었다. ‘빛의 죽음’이었다. 그해 4월3일 유신정권은 청년·학생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다며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발표했다. 구속자가 180여명에 이르렀다. 정권은 이 사건의 배후로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라는 단체도 조작해 발표했다. 인혁당 관계자 8명은 이듬해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자마자 모두 사형당했다. 긴급조치는 유신체제라는 거대한 감옥 안의 감옥이었다.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1974년 봄 ‘전환시대의 논리’ 출판기념회에서 리영희(왼쪽 둘째) 선생이 염무웅·한남철·백낙청 등 당대의 지성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리영희재단 제공

그 암흑의 1974년 6월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언론인 리영희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이 책은 유신체제의 한복판에서 터진 지적 다이너마이트였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신을 가두었던 무지의 장벽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책이 일으킨 폭발력으로 유신이라는 감옥이 일거에 흔들렸다. 암흑 속에 다시 빛이 들기 시작했고 반유신 항거의 의지가 잠을 깨고 일어났다. 궁정동에서 유신을 끝내는 총성이 울리기 5년 전에 리영희의 첫 책은 천둥처럼 울리며 유신의 심장을 강타했다. 올해는 시대를 깨워 세상을 바꾼 그 책이 태어난 지 50년 되는 해다. 이 기념비와도 같은 저작의 출간 50돌을 기려 리영희 재단과 창비가 손잡고 오는 16일 오후 창비서교빌딩에서 ‘전환시대의 동아시아와 한반도’, ‘전환시대의 미디어와 저널리즘’을 주제로 삼아 토론회를 연다.

1974년 출간된 언론인 리영희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한겨레 자료사진

이 저작은 왜 그토록 무섭게 폭발했는가? 폭발물의 성분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이 책의 제1부를 이루는 ‘강요된 권위와 언론 자유’는 1971년 6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폭로된 ‘펜타곤 페이퍼’(미국 국방부 극비문서)를 분석한 글이다. ‘펜타곤 페이퍼’는 미국 정부가 20년 가까이 감추어온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속속들이 담은 문서였다. 이 문서의 폭로로 거짓과 속임으로 쌓은 권위의 성채가 무너졌고, 문서 안에 적재된 미국의 음모와 흉계의 실상은 언론과 시민의 양심을 깨워 미국이 이끈 추악한 전쟁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둘러싸고 닉슨 행정부와 ‘뉴욕타임스’가 벌인 법정 다툼만 건성으로 보도했지, 그 문서가 품은 진실 자체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리영희는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된 직후 4천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문서 전체를 입수해 내용 하나하나를 철저히 파헤쳐 국내에 처음으로 알렸다. 이어 이듬해와 그다음 해에 연달아 ‘베트남전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계간 ‘창작과비평’에 발표했다. 이 글들을 채우는 역사적 사실들은 거의 모두가 미국 정부와 의회의 공식문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대 진영’의 선전물에서 가져온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세 편의 글은 허위와 기만의 장막을 찢어내고 베트남전쟁의 시작과 끝을 한눈에 보게 해주었다. 베트남전쟁을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 진영의 성스러운 전쟁’으로만 알았던 사람들은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베트남전쟁의 진실에 충격받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펜타곤 페이퍼’ 폭로의 충격

1989년 7월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 계획으로 구속(국가보안법 위반)된 리영희 논설고문이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리영희가 알린 베트남전쟁 20년을 요약해보자. 비극의 서막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식민주의 침략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베트남 민중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 식민 지배를 거부하는 민족해방투쟁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프랑스 본토가 독일군에 넘어간 뒤 독일과 손잡은 일본이 베트남 북부를 점령했다. 호찌민과 베트남 민중은 전민족적 항일단체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월맹)을 결성해 무력투쟁을 벌였다. 조선 독립군의 투쟁과 다를 바 없는 항일전쟁이었다.

1945년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베트남 민중은 민족이 해방되고 나라가 독립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호찌민을 주석으로 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물러났던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프랑스는 옛 종주권을 주장하며 1946년 다시 베트남을 점령하고 남쪽에 괴뢰정부를 세웠다.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 처절한 해방전쟁을 벌였다.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결전에서 항복하고 그해 7월 제네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1956년까지 베트남 전역에서 총선거를 치러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배신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철수했고, 프랑스의 뒤를 봐주던 미국이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미국이 벌인 여론조사를 보면, 베트남 민중의 83%가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지지했다. 여론조사 결과에 놀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제네바협정을 팽개치고 남베트남의 ‘사이공 정권’을 앞세워 군사적 개입을 본격화했다. 베트남을 ‘반공 군사 전초 기지’로 만드는 것이 미국의 목표였다. 베트남 민중의 통일 염원은 미국의 안중에 없었다.

베트남 민중은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해 다시 봉기했다. 당시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 31명은 모두 프랑스나 일본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들이었고 제국주의 점령 시기에 하나같이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미국이 지원하는 사이공 정권의 장교단에서 독립운동가 출신은 육군 중령 한명뿐이었다. 베트남전쟁은 반제국주의 독립투사들과 제국주의 하수인 출신들의 싸움이었다. 남베트남의 사이공 정권은 미국의 압도적 지원을 받았지만 끝없는 부패와 가혹한 탄압으로 민중의 지지를 완전히 잃었다.

‘반공’ 우상을 깨부순 망치

1989년 7월 리영희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이 법정 피고석에 앉기 전 방청석을 돌아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터졌다. 미국 정부는 통킹만 공해상을 순찰하던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을 확전 명분으로 삼아 미국은 ‘북폭’(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했다. 남베트남 정권을 고무하고 민족해방 세력을 제압하려는 군사 공격이었다. 1966년 한해에만 미국은 폭탄 64만톤, 포탄 50만톤을 북베트남에 쏟아부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쓴 65만톤의 두배에 이르는 양이었다. 그러나 북폭의 빌미가 된 ‘통킹만 사건’은 실체가 없는 사기극이었다. 이 사건이 전면전을 감행하려고 미국이 사전에 계획한 조작사건이었음이 훗날 ‘펜타곤 페이퍼’ 폭로로 모조리 드러났다. 베트남전쟁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멋대로 짓밟은 반인간적 전쟁이었다.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반전 평화 운동의 격랑이 일었다. 미국 대학생 25%가 소집영장을 거부했고 27만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징집을 피해 잠적하거나 망명했다. 전쟁에 투입된 미군 가운데 30만명이 죽거나 다쳤다. 닉슨 행정부에 이르러서야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결심하고 1973년 2월 북베트남과 협정을 맺어 철군을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은 냉전 반공 이념에 사로잡힌 역대 미국 정부가 국민을 속여가며 벌인 허위와 기만의 전쟁이자 수백만 베트남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국토를 폐허로 만든 범죄적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파병 요구를 받은 박정희 정권은 상시 5만명의 전투부대를 보내 그 부도덕한 전쟁에 가담하고 ‘더러운 전쟁’을 ‘반공 성전’으로 미화했다.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한국 말고는 필리핀·타이·오스트레일리아밖에 없었다. 세 나라가 파견한 병력도 1천~3천명 수준이었다. 영국이 보낸 병력은 의장대 6명뿐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 언론은 반공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리영희의 글을 통해 처음으로 진상을 드러냈고 독자는 그제야 거짓을 거짓으로 알아보았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의 날카로운 눈이 두번째로 향한 곳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리영희는 이 책의 제2부를 현대 중국의 동향에 관한 다섯편의 논문으로 꾸렸다. 중국에 관한 오래된 고정관념을 철거하고 이성 위에 군림하던 반공 우상을 깨부수는 망치와도 같은 논문들이었다. 그러면 리영희는 언제 현대 중국에 관심을 품게 됐는가. 후에 감옥에서 쓴 ‘상고이유서’에서 리영희는 최전방에서 중공군과 전투하던 한국전쟁 경험이 중국 연구의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민족사의 비극이 한 젊은이를 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넣어 미래의 중국 문제 전문가를 키워낸 것이다.

한반도의 미래로 향한 눈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이후 부산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 통역장교 리영희 대위(오른쪽)가 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미국 육군 대장)의 연설을 통역하고 있다. 리영희재단 제공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리영희는 14살 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 해방을 맞은 리영희는 이듬해 국립해양대학교에 들어갔다. 무일푼 리영희에게 해양대학교는 국비로 다닐 수 있는 배움의 터전이었다. 1950년 대학을 졸업한 리영희는 안동중학교 영어 교사가 됐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피난 갔다. 거기서 ‘유엔군 연락장교’ 선발 공고를 보고 지원한 것이 운명을 바꾸었다. 장교 리영희는 이때부터 1957년 예편할 때까지 미군과 국군 사이를 통역했다. 전쟁 중에 ‘거창양민학살’ 같은 군사적 만행을 목격하고 이승만 군부의 부패와 타락에 몸서리를 쳤다. 또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고위 장교 통역을 맡아 미국 군부를 속 깊게 관찰했다. 이 경험이 약소민족을 장기판의 말처럼 여기는 미국의 제국주의 속성과 한-미 관계의 예속적 성격을 꿰뚫어 보게 해주었다. 중공군과 총부리를 마주 겨눈 최전방 경험을 포함한 7년의 군대 생활은 리영희를 현대 중국 탐구로 이끌었다. 군인 리영희 안에서 학자 리영희가 자라기 시작했다.

1957년 예편과 동시에 합동통신사 기자가 된 리영희는 외신부에 배속돼 제3세계에서 벌어지던 피압박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샅샅이 추적했다. 리영희의 관심은 특히 베트남전쟁과 함께 마오쩌둥의 현대 중국에 집중됐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결 속에서 중국이 열어가던 제3의 길에 모였다. 탐구가 진척되면서 시야가 국제관계 전반으로 넓어졌고 그 국제적 시야에서 리영희의 눈은 한반도의 남과 북이 만들어가야 할 미래로 향했다. 또 그럴수록 이웃 나라 중국을 연구할 이유도 뚜렷해졌다.

1964년 ‘조선일보’로 특채된 리영희는 외신부장으로서 국제문제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도하려고 분투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기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박정희 정권은 조선일보를 압박했고 리영희는 1969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이어 1970년 합동통신사로 돌아가 외신부장을 지냈지만 여기서도 1년 만에 다시 해직당했다. 그러는 중에도 중국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식지 않았다. 1972년 한양대 교수 자리가 나 둥지를 옮긴 뒤 중국 현대사를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20여년의 경험과 탐구가 맺은 결실이 ‘전환시대의 논리’ 속 중국 관련 논문들에 담겼다.

1998년 5월11일 리영희 선생이 한 해 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한겨레신문사의 주선으로 대담을 나누는 모습. 사흘 뒤인 14일 한겨레는 이 대담을 지면에 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리영희는 1840년 아편전쟁과 그 전쟁의 충격으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에서 관찰을 시작해 평등 대동 세상을 향한 중국 근대화 운동을 추적했다. 이어 1911년의 신해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마르크스주의에서 새 길을 찾은 중국 지식인들의 분투를 뒤따랐다. 중국 공산당의 투쟁과 승리가 중국 인민의 100년 소망이 이룬 결과임이 리영희 사유 지평에서 분명해졌다.

리영희는 중국 공화주의 혁명의 아버지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르크스주의 사상으로 난국을 돌파하려 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벌인 대결과 협력의 역사에도 주목했다. 1949년 미국 국무부가 펴낸 방대한 ‘중국백서’가 글을 뒷받침했다. 리영희는 미국에서 나온 공식문서를 근거 자료로 삼아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료하게 서술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1930년대 이후 항일전쟁 시기에 일본군을 물리치기보다는 공산당을 분쇄하는 데 더 큰 힘을 들였고, 1936년 이후의 국공합작 시기에도 걸핏하면 공산당을 적으로 몰았다. 국민당은 부패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민중을 배반하는 정책과 노선을 고집했다. 국민당은 민심에 뿌리박은 공산당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리영희는 1949년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혁명운동을 ‘인류사의 대실험’이라는 관점에서 집요하게 관찰했다.

미-중 관계의 변화도 리영희의 예민한 안테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애초 국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미국은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난 뒤에도 대륙 중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 중국에 대한 지지가 늘고 1960년대 말에 중국과 소련의 이념분쟁이 영토분쟁으로까지 번지자 미국은 중국 정책의 대전환에 착수했다. 그것이 1969년 발표한 ‘닉슨 독트린’이다. 이 독트린과 함께 닉슨의 아시아 정책은 커다란 변곡점을 그렸다. 중국은 1971년 유엔 총회에서 대만(중화민국)을 제치고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됐다. 1972년 2월에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함으로써 미-중 관계 정상화의 문이 열렸다.

기자·교수 해직 딛고 일으킨 들불

세상이 급변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국은 미-중 관계를 바꾸는 데 나섰을 뿐 아니라,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하고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일본에 넘겨주는 쪽으로 나아갔다. 미국의 정책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부추기는 꼴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말하는 ‘전환’은 바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거대한 변화를 가리켰다. 그런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통일의 길을 찾으려면 그 전환에 걸맞은 올바른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환시대의 논리’에 담긴 뜻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 변화를 ‘유신 쿠데타’의 빌미로 삼아 영구 집권을 꿈꾸며 국민을 무지의 감옥 속에 가두어두려고만 했다. 언론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우민화 정책을 지지하고 복창했다. 온 나라가 어둠이었다. 그런 암흑 한가운데서 리영희의 책이 솟아나 이성의 빛을 부르고 진실의 불을 밝혔다. 앎에 목마른 젊은이와 지식인 사이에 ‘전환시대의 논리’가 들불처럼 번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신정권은 탄압으로 답했다. 리영희는 이 저작이 나오고 2년 뒤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1988년 5월14일 밤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윤전실에서 막 찍혀 나온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들고 리영희(맨 오른쪽) 선생 등 창간 주역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탄압은 리영희를 꺾지 못했다. 1977년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이 잇따라 나왔다. 독자들의 반응은 함성과도 같았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말에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엮어 저자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정권의 수족이 된 검사는 문맥과는 아무 상관 없이 문장과 글자들을 따와 책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결론을 짜맞추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이적행위’가 되는 시대였다. 검사가 쓴 엉터리 기소장을 판사는 오자까지 그대로 베껴 판결문이라고 내놓았다. 리영희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창살 안에 갇혔다. 독재정권의 눈에 리영희는 그 두뇌를 어떻게든 사회와 격리해야 할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리영희가 지핀 이성과 진실의 불씨는 감옥 안에 있는 동안에 오히려 더 크게 타올랐다. 1980년대 초에 중앙정보부가 만든 자료 중에 대학생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책 30권의 목록이 있다. 그 첫번째가 ‘전환시대의 논리’였고 두번째가 ‘8억인과의 대화’였다. 세번째가 송건호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네번째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다섯번째가 다시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의 피와 함께 리영희의 혼을 먹고 자랐다. 리영희는 청년·학생·민중의 눈을 뜨게 한 ‘사상의 은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온 지 50년, 저자가 세상과 작별한 지 14년이 됐지만, 리영희의 꿈과 뜻은 후배·후학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다. 거짓이 활보하고 추한 권력이 위세를 부리는 시대일수록 리영희의 비판 정신은 민주·평화의 세상을 열망하는 함성 속에서 더 푸르게 타오른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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