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이 임윤찬을 이겼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던 시절 나는 한동안 똥인지 된장인지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와인에 대한 지식은 학습만화책에서 읽은 ‘빨간 건 고기랑 먹고, 하얀 건 해산물이랑 먹는다’는 정도밖에 없었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10년 넘게 마시다보니 왜 비싼 와인이 비싸고, 싼 와인이 싼지 정도는 알게 됐다.
임윤찬이 임윤찬을 이겼다
클래식 음악은 20년 넘게 와인보다 훨씬 가까이하고 살았으니 형편이 좀 낫다.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한 초기엔 연주회에 가기만 하면 얼마 안 있어 집중력이 떨어졌고, 졸기도 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연주를 듣고 내리는 평가는 거칠고 두루뭉술하다.
그런 ‘막귀’를 가진 나였음에도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대단한 연주가가 나왔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2년 전인 2022년 6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극도로 서정적인 선율로 듣는 사람을 음악 속 깊이 끌어들이고는, 절정으로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그 강렬한 에너지라니. 이렇게까지 관객을 흥분시킨다고?
같은 콩쿠르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연주한 걸 보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콩쿠르에 나와서 이 곡을 연주한다고? 피아노로 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곡을? 선곡도 놀라웠지만, 이런 곡도 자신에겐 전혀 어렵지 않다는 듯 미스터치도 없이 쳐내는 테크닉은 더 놀라웠다. 임윤찬은 이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만 18살) 우승, 신작 최고연주상, 그리고 청중상을 받았다.
2022년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10대 클래식 공연’에 임윤찬의 콩쿠르 연주를 꼽았다. 정식 공연이 아닌 콩쿠르를 꼽은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수많은 거장과 최정상 연주단체의 공연을 제치고 말이다. 그 후 2년간 그는 영국 위그모어홀과 프롬스 페스티벌, 미국 카네기홀,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등 세계 정상급 공연 자리에 초청받으며, 전세계가 주목하는 떠오르는 별임을 보여줬다.
국내 팬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공연 티켓 매진 속도 등을 보면 2015년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당시보다 임윤찬 팬덤이 더 강력한 것 같다. 요즘에 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도 어린 시절 이후로 피아노를 치지 않다가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연주를 보고 다시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사람이 있다. 학원에서 열린 연주회에 ‘쇼팽 에튀드(연습곡)’를 들고나온 사람도 있었고, 임윤찬의 해석을 따라 연주했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임윤찬이 또 하나의 눈부신 업적을 이뤄냈다. 2024년 10월2일 ‘그라모폰 뮤직 어워즈’에서 2관왕에 오른 것이다. 한국인 피아니스트로선 처음이고, 한 번에 상을 두 개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젊은 예술가 부문과 피아노 음반 부문을 함께 수상했는데, 피아노 음반 부문에선 최종 후보 3개 앨범 중 2개가 임윤찬의 앨범이었다. 임윤찬의 ‘쇼팽: 에튀드’가 임윤찬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한 표 차로 누르고 1, 2위를 나눠 가졌다. 임윤찬이 임윤찬과 싸운 격이었다.
악보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
그라모폰 뮤직 어워즈는 영국의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1977년부터 매년 수여하는 상이다. 한국인 수상자 중에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1990년 실내악, 1994년 협주곡), 첼리스트 장한나(2003년 협주곡)가 있다. 보통 ‘클래식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말하는데, 클래식 음악계는 규모도 그렇고 관심도도 영화계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힘들다. 하지만 그라모폰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인 건 사실이고, 나도 매년 수상작 중에서 못 들어본 음반들을 찾아 들어왔다.
‘쇼팽: 에튀드’ 앨범에서 임윤찬은 그의 말대로 듣는 사람의 귀를 강타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어? ‘쇼팽 에튀드’가 이런 곡이었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동안 ‘쇼팽 에튀드’는 명음반으로 꼽히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를 주로 들었는데, 이 연주는 에튀드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기술적으로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는다. 곡에서 한 발 떨어진 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폴리니의 담백한 연주를 나는 좋아하지만, 폴리니의 차가운 쇼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다.
반면 임윤찬은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뜨거운 쇼팽을 보여줬다. 임윤찬이 음반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쇼팽 에튀드’는 어릴 적부터 연습했던 작품이라 10년간 속에 있었던 용암을 이제야 밖으로 토해낸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 강렬한 에너지가 넘실대는 연주였다.
심지어 임윤찬은 ‘쇼팽 에튀드’를 악보 그대로 연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앨범에서 왼손을 연주할 때 템포와 세기를 다르게 하고, 악보에 쓰여 있지 않은 음표를 삽입했다.(구체적 설명은 안인모 피아니스트의 유튜브를 참고하면 좋겠다.) 임윤찬이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이그나츠 프리드만 같은 100년 전에 활동한 피아니스트들처럼 악보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한 것이다. 그가 2024년 전국 순회 리사이틀에서 연주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도 파격과 도발로 점철된 논란의 연주였다.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악보를 고쳐서 연주하는 것도 그렇다. ‘당신은 왜 음악을 존중하지 않느냐, 작곡가들보다 네가 더 낫다는 거냐’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청중과의 접점을 잃고 우주 미아가 돼버린 이단아를 우린 여럿 알고 있다. 하지만 임윤찬은 완벽한 테크닉을 앞세운 독특한 해석으로 대중부터 입맛 까다로운 평단까지 설득해내고 있다. 그를 천재 아티스트라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임윤찬에 대해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 데는 아직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현대 클래식 피아노계가 이제 막 등장한 신인에게 왕좌를 빼앗길 정도로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그리고리 소콜로프, 미하일 플레트네프, 언드라시 시프, 우치다 미쓰코 등. 노장부터 신예까지, 손에 모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기라성 같은 피아노의 거장이 즐비하다. 다들 각자의 스타일과 영역을 단단하게 구축한 이들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시간이라는 시험대
이들처럼 임윤찬도 시간이라는 시험대를 통과해야 한다. 물론 임윤찬이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보면 아찔할 정도다. 이제 막 성인이 된 20살 청년이 뜨거운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초년 성공은 인생의 불행’이라는 말은, 여기에 쓰기가 꺼려질 정도로 식상한 말이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긴 하니까.
실제로 클래식 음악계엔 젊은 시절의 탁월한 재능을 잃고 이상해져버린 이가 적지 않다. 임윤찬이 우승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기리는 반 클라이번부터도 그랬다. 미국인인 반 클라이번은 소련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만든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해 국민적 영웅이 됐다. 그것도 1958년 열린 제1회 대회에서. 그 뒤로 그는 콩쿠르 우승자가 새 곡을 공부하거나 연주회를 오랫동안 쉬면 대중의 조소를 받거나 관심에서 멀어질 거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수의 레퍼토리만 반복해 연주하다 퇴화해버렸다.
이보 포고렐리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80년 ‘쇼팽 콩쿠르’ 준결승에서 탈락했는데, 이에 항의하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심사위원직을 내던진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이다. 젊은 시절 빛나는 연주를 들려주던 포고렐리치는 그러나, 이제는 그런 천재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사생활도 복병이다. 2000년 쇼팽 콩쿠르 역대 최연소 우승자인 윤디 리는 연주력이 곤두박질치다가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춤추더니, 성매매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도 잇따른 사생활 문제로 많은 팬이 등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음악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도자 임윤찬을 보면 그런 걱정이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음악에 대한 순전한 사랑과 함께 겸손함, 성실함을 갖춘 그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팀 패리 그라모폰 부편집장은 시상식에서 “임윤찬이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 지켜보는 건 멋진 일일 것이다. 큰 대회 수상자는 오랫동안 커리어를 지켜나가기 쉽지 않은데, 그는 이를 뛰어넘었다. 앞으로 5년 후, 10년 후에도 그는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피아니스트 중 하나일 것”이라고 평가했는데, 빈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10년 뒤에도 흥미로운 피아니스트일 것”
사실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연주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 식견에 대해서다. 내가 좀더 이 곡에 대해 잘 알고, 다른 연주들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그가 펼쳐 보이는 세계를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임윤찬이 이 연주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더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내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이의 연주를 듣고, 더 깊이 음악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음악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것, 어쩌면 임윤찬은 이미 자신이 하려는 일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지훈 한겨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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