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양 건너 캐나다 오타와에서는 한국과 독일이 역사적인 수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총 12척, 사업비 240억 달러(약 35조 원)에 달하는 캐나다 차기 잠수함 사업(Canadian Patrol Submarine Project·CPSP)이 그 무대입니다.
35조 원이라는 숫자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 국방 예산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단 한 건의 방산 계약으로 집행하는 것입니다.
세계 방산 시장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최종 경쟁에는 한국의 한화오션과 독일의 티센크루프 마린 시스템즈(TKMS)가 올랐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지난 3월 2일 최종 제안서를 접수한 뒤 평가 절차에 들어갔으며, 오는 6월 말까지 우선협상대상자를 발표할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경쟁의 판도를 흔드는 결정적인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12척을 한 업체에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독일에 각각 6척씩 나눠주는 '분할 계약' 시나리오가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짚어보겠습니다.
"6~8년 걸릴 사업이 1년 만에"…캐나다 조달 역사상 전례 없는 속도
이 사업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추진 속도입니다.
캐나다는 통상 대형 무기 도입 사업에 6~8년이 걸리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방대한 검토 문서, 수백 페이지짜리 제안요청서, 수년에 걸친 평가 절차가 캐나다 방산 조달의 상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CPSP 사업은 완전히 다릅니다.
2021년 공식 출범 이후 2025년 2월 정보요청서(RFI) 접수를 마감할 당시 전 세계 25개 업체가 관심을 표명했고, 같은 해 8월에 이미 독일 TKMS와 한화오션을 최종 후보로 압축했습니다.
통상 수백 페이지에 달하던 제안요청서(RFP)도 단 58페이지로 간소화됐습니다. 핵심 절차가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진행된 것이죠.
한화디펜스 캐나다 대표이자 캐나다 해군 장교 출신인 글렌 코플랜드(Glenn Copeland)는 글로브 앤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업은 절대적으로 번개 같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캐나다 정부가 이 사업을 얼마나 급박하게 추진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입니다.
캐나다는 이 사업을 위해 아예 새로운 전담 기관인 국방투자청(Defence Investment Agency)까지 신설했습니다.
1억 달러 이상 규모의 방산 조달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 이 한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화오션의 승부수는 '납기'…"2032년 첫 인도, 2044년 전량 완납"
그렇다면 한화오션은 어떤 패를 들고 있을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속도와 실행력'입니다.
한화오션은 한국 해군의 최신 잠수함인 KSS-III 계열 기술을 기반으로 이번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KSS-III는 수중 배수량 3,000톤급으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한 잠수함 Air-Independent Propulsion(AIP) 체계를 갖춘 최신예 전투잠수함입니다.

한화오션이 제시한 인도 일정은 그야말로 파격적입니다.
2032년 첫 잠수함 인도, 2035년까지 최소 4척 배치, 2044년까지 12척 전량 완납이라는 스케줄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캐나다 조달 역사상 가장 빠른 잠수함 인도 일정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죠.
코플랜드 대표는 "우리는 캐나다에 시스템과 플랫폼을 정해진 일정과 예산 안에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할 기회라고 본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캐나다 승조원 훈련과 유지정비 체계를 포함한 통합 교육 프로그램까지 패키지로 제안한 상태입니다.
한화오션 입장에서는 단순히 잠수함을 파는 것이 아니라, 캐나다 해군이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완성형 시스템'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TKMS의 반격은 '나토 네트워크'…"노르웨이·독일과 함께라면 다르다"
독일 TKMS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승부를 걸고 있습니다.
TKMS는 현재 전 세계에서 180척 이상의 잠수함 건조 실적을 보유한 나토 잠수함 시장의 절대 강자입니다.
이번 사업에는 노르웨이 국영 방산기업 콩스버그 디펜스 앤드 에어로스페이스(Kongsberg Defence & Aerospace)와 팀을 이뤄 참여하고 있습니다.

TKMS가 캐나다에 제안한 것은 212CD 잠수함 플랫폼입니다.
독일과 노르웨이가 공동 개발한 최신형 잠수함으로, 나토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운용하는 검증된 플랫폼이라는 점이 핵심 세일즈 포인트입니다.
TKMS 최고경영자 올리버 부르크하르트(Oliver Burkhard)는 "캐나다가 이 프로그램에 합류할 경우 노르웨이와의 공동 생산 체계에 함께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더 나아가 부르크하르트 CEO는 "캐나다, 노르웨이, 독일 사업까지 합치면 앞으로 15년 동안 24척의 잠수함 건조가 가능하다.
이런 규모는 나도 처음 본다"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잠수함 한 종류를 파는 것이 아니라, 나토 동맹국들과 함께하는 대규모 방산 생태계에 캐나다를 초청하는 전략인 것이죠.
나토 회원국인 캐나다에게 '나토 표준 잠수함'을 운용하는 것이 얼마나 전략적으로 유리한지를 집중적으로 어필하고 있는 보입니다.
캐나다가 진짜 원하는 것은 잠수함이 아니다
이쯤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캐나다는 도대체 왜 이렇게 급하게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잠수함 성능 외에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TKMS의 부르크하르트 CEO는 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그는 "캐나다는 단순히 잠수함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방산 계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산업적 가치 전체를 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캐나다 정부는 이번 계약에서 산업 협력과 경제 효과를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율 관세 부과와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겠다'는 발언으로 상징되는 북미 안보 환경의 급변이 있습니다.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방산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절박감이 캐나다를 이 사업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캐나다는 잠수함 계약을 단순한 무기 구매가 아니라, 북극 안보 전략, 방산 산업 육성, 우주 발사 능력 확보, 미국 의존도 감소라는 네 가지 전략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수단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흥미롭게도 한화오션과 TKMS 양측 모두 캐나다 기업인 마리타임 론치 서비스(Maritime Launch Services), 노드스페이스(NordSpace) 등과 협력해 캐나다 자체 우주 발사 능력 구축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잠수함 계약이 우주 산업과 연결되는 구도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6척+6척 분할 계약', 세계 최초 전례가 될 수 있다
이제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핵심 변수, 분할 계약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캐나다 정부가 산업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화오션과 TKMS에 각각 6척씩 발주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분석이 현지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양측의 반응은 미묘하게 엇갈립니다. 한화 측은 "12척 전체 계약을 원하지만 캐나다 정부의 어떤 결정도 지지할 것"이라며 사실상 분할 계약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반면 TKMS 측은 부담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부르크하르트 CEO는 "주문 규모가 줄어들면 캐나다 산업계의 참여 구조가 바뀌고 프로그램 운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TKMS의 파트너인 콩스버그 역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잠수함을 동시에 운용할 경우 유지·훈련 비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분할 계약에는 분명한 단점이 있습니다. 한국형 잠수함과 독일형 잠수함을 동시에 운용하면 부품, 훈련, 유지보수 체계가 이원화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추가 비용을 낳습니다.
그러나 캐나다는 그 비용을 치르더라도 한국과 독일 양국의 기술과 산업 협력이라는 이중 효과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분할 계약이 현실화된다면, 캐나다 해군은 두 나라의 서로 다른 잠수함을 동시에 운용하는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오는 6월, 오타와가 내릴 결정은 단순히 어느 나라 잠수함을 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결정은 글로벌 방산 질서와 동맹 구조, 그리고 캐나다가 어떤 나라들과 함께 미래를 설계해 나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35조 원짜리 잠수함 계약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