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강국’ 마침표 찍은 ‘한강의 기적’
“한국어, 더 이상 진입장벽 아니다”
(시사저널=조문희 기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한국인에게 애국가 첫 소절의 의미는 남다르다.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한마디이면서도, 역사적 환경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1980년과 2000년, 2024년의 애국가가 그렇다.
1980년 애국가는 시체를 덮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 당시 열흘 동안 죽어나간 사람만 165명. 실종자, 부상자, 후유증으로 나중에 사망한 이들을 합치면 그 숫자는 천 단위로 불어난다. 관에는 태극기가 덮였고 유족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계엄령 위반 죄목으로 체포된 이들도 군사재판 선고 직전 애국가를 흐느끼며 불렀다. 이 장면은 작가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 속 절정 부분 중 하나다. 국가가, 군사정권이 짓밟은 인권을 모순적이게도 애국가가 보듬어주는 장면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인물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에 힘쓴 공을 인정받았다. 2000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 이후 김 전 대통령의 행진 당시, 교민들은 애국가를 열창했다. 이때의 애국가에는 국가에 대한 긍지와 보람이 담겨 있었다.
24년이 또 흐른 지금, 애국가는 다시 소환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풀어낸 작가 한강은 국가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40년 전 군사정권에 핍박받던 , 분단의 아픔을 지닌 나라였던 한국의 이미지는 이제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로 발돋움했다. 2024년 10월10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화 강국'의 마침표를 찍게 했다.
한강의 작품은 무엇이 다른가
한강은 문학계에서 '혁신가'로 통한다. 한강의 대표작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로 요약된다. 각각의 소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가부장제의 폭력성이다. 민감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작가가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에도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다고 믿게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은 평범하다.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마주하는 등장인물은 때로 강인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연약하고 여리게 묘사된다. 일례로 《작별하지 않는다》 속 화자인 경하는 작가인데, 이전 작품에서 학살을 다뤘다가 몸과 마음이 병들어간 캐릭터다. 한강 본인의 직전 작품도 《소년이 온다》였기 때문에 경하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하는 친구 인선이 키우던 새를 살려 달라는 부탁으로 제주에 내려갔다가 고립되는데, 폭설을 맞아 혼령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해진다. 생사의 경계에서 경하는 제주 4‧3사건을 직면한다. 4‧3사건 피해자 가족인 인선의 영혼을 통해서다. 경하와 인선은 고통에 작별하지 않고 나아간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대범함 그 자체다. 대표적인 게 《채식주의자》다.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묘사된 여자는 어느 순간 고기를 혐오하고 채식주의로 돌아선다. 여자의 형부는 그녀를 미적 대상으로 여기다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는데, 한강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남녀가 정사하는 장면을 한강은 꽃이 피어나는 장면으로 서술한다. 한강 특유의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꼽힌다.
이런 특성이 모여 작가 한강을 있게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공동 번역가인 페이지 아니야 모리스는 한강을 "몇 번이고 한국의 검열과 체면 문화에 맞섰으며 매번 더 강하고 흔들림 없는 작품으로 자신을 침묵시키려는 시도를 떨쳐낸 작가"로 평했다. 일본의 유력 언론 아사히신문은 "때때로 시선을 돌리고 싶을 정도의 폭력성이 묘사돼 있지만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로 따끔한 아픔이 몸 안에 들어오는 듯한 힘을 지녔다"며 "한강은 문학이라는 상상력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왔다"고 평가했다.
한강이 이끈 문학의 '혁신'
한강은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노벨상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한강은 아시아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서구권이 문학 분야를 독식한다는 비판을 깨뜨린 장본인이다. 당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아시아계 작가는 많았지만, 최종 영예는 한강이 안았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은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며 "그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강의 소설은 '순수문학'이다. 순수문학이란 오로지 문학, 텍스트로만 승부를 본다는 얘기다. 지금껏 'K컬처'라는 이름으로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영화 《기생충》, 아이돌 블랙핑크와 BTS의 음악에는 이미지나 선율 등 부가 요소가 있지만, 문학은 그 자체로 순수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문화계에 더 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반응은 즉각적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출판사 매출은 껑충 뛰었다.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국내 3대 서점 집계에 따르면, 수상 이후 닷새간 한강 작품은 종이책만 97만2000부 팔렸다. 베스트셀러 10위권은 모두 한강의 대표작이며, 품절 행진을 이어갔다. 해외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번역본뿐만 아니라 한국어 원문도 매진 행렬이란 보도가 이어졌다.
이제 한국 문화는 다음을 기약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마침표가 찍힌 이후 새로 이어질 문단, 다시 펼쳐질 페이지의 시작을 기대한다. 한국 문화의 벽으로 통했던 한국어, 한글의 복잡함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미 K팝 팬들은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를 만큼 친숙해졌다. 문화적 이해가 밑바탕이 된다면 언어는 소통 수단에 불과하다.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이 주변부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이광후 문화평론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 한강의 생각은 어떨까. 한강은 스웨덴 공영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평화롭고 조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다"며 "지금은 주목받고 싶지 않다. 이 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웨덴 한림원에 밝힌 소감에서는 "우리가 살인을 멈춰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배웠던 것들의 아주 분명한 결론"이라며 "적어도 언젠가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 오역일까 의역일까, '노벨문학상 1등 공신' 번역의 세계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있게 한 결정적 요인은 번역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제대로 된 번역이 없었다면 한강의 작품은 세계의 것이 아닌, '한국인의 것'으로 제한됐을 것이란 평가다.
현재 한국 문학 번역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과 교보생명이 운영하는 대산문화재단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그간 문학번역원은 2100여 건, 대산문화재단은 400여 건의 한국 문학 번역·출간을 지원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나온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문판은 2016년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작별하지 않는다》 프랑스어판은 2023년 프랑스 메디치상·에밀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받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의 밑거름이 됐다. 2016년 이후 한국 문학인의 국제 문학상 수상은 31건, 후보에 오른 것까지 더하면 97건에 달한다.
한강 작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번역가는 데버라 스미스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 등 다수를 영어로 옮겼다. 2010년 한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번역 일을 맡게 됐다. 한국어 문장을 토씨 그대로 옮기기보다, 서구 문화권에 맞게 재해석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그의 번역에는 '오역' 논란도 따라붙었다. 국내 문학계에서 제기한 《Vegetarian(채식주의자)》의 오역 사례는 100여 개에 달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처제의 남편'과 같은 호칭을 대신 사용하는가 하면, "냉기에 지쳐서 돌아왔다"는 문장에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를 추가해, 원문에 없는 문장을 끼워넣는 식이다. 점 하나로 의미가 달라지는 한국어 특성상, 한국어는 번역하기 까다롭다는 게 문학계의 공통된 반응이다.
다만 이 같은 논란은 곧 '의역'으로 치환된다. 원작의 맥락에 충실하되, 부분적 의역으로 작가의 생각을 더 뚜렷이 전달한다는 것이다. 데버라 스미스 본인도 "모든 번역은 창조적"이라며 "문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언어는 없으며 단어도 다르고 심지어 구두점조차도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당사자인 한강도 "몇몇 실수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수들이 이 소설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 장애물이 되거나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의 책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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