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까조차 칭찬하는 차" 아직도 많은 인기로 레전드 된 럭셔리 SUV 베라크루즈

반도체 대란 이전에도, 공급이 부족해 대란이 일었던 국산 차가 있었습니다. 바로 '현대 펠리세이드'인데요. 풀옵션 가격이 5,000만 원에 육박하는 대형 크로스오버가 이렇게나 엄청난 인기를 끄는 것에 '역시 나만 돈이 없구나.', '우리나라 소비자의 소득 수준이 이렇게나 높아졌구나.'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 소개할 이 차의 공백이 드디어 메워지는 것 같아서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낡아지기보다는 깊어지는 차들이 있죠. 주로 시대를 앞서갔다는 수식어가 붙는 모델들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 같아요. 한 세대를 끝으로 아쉽게 사라졌지만 아버지들의 가슴 한구석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던 차. 현대차를 유난히 싫어하는 분들 소위 '현까'조차 쉴드를 친다는, 이번 시간에는 현대차의 럭셔리 SUV '베라크루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제네시스 편에서도 언급했듯 당시 현대차에게게 저가 마케팅으로 얼룩진 브랜드 이미지는 주력 수출시장인 북미에서의 실적을 높이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그나마 지속적인 신차 투입으로 품질과 성능 면에서 서서히 인정받고 있었지만 판매량이 적더라도 상징성이 큰 브랜드 밸류를 끌어올릴 만한 고급 모델이 없는 것은 분명 약점이었죠. 아시다시피 북미 시장에 판매하던 '그랜저'를 제외하면 미쓰비시와 함께 만든 '에쿠스', 현대 전공의 마지막 유산 정통 SUV '테라칸'이 있었지만 두 모델 다 수출보다는 내수 시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특히 갤로퍼의 차체를 이용해 만든 테라칸은 고리타분한 디자인과 감흥 없는 상품성으로 '쌍용 렉스턴'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안방에서마저 실패했어요. 그래도 '투싼'과 '싼타페' 등 도심형 SUV 라인업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좋은 실적을 올렸고 자신감을 얻은 현대는 좋은 고급 SUV 라인업을 준비하는데 박차를 가합니다. 북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렉서스의 프리미엄 SUV 'RX'에서 힌트를 얻었고 이미 내수 시장에서 테라칸으로 쓴맛을 봤던 경험을 참고해 연비와 승차감에서 유리한 '전륜구동' 기반의 '모노코크', 도심형 SUV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프로젝트 'EN'이 시작됐고 2006년 양산형 모델인 '베라크루즈'가 그 모습을 드러냈죠. 산타페, 투싼 등 북미 전략 차종의 이름은 북미 지역 유명 휴양지에서 이름을 따왔던 전통을 이어 이번에도 멕시코의 휴양도시 '베라크루즈'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항만도시이자 아름다운 해변을 품은 관광도시답게 넉넉한 크기와 공간, 화려한 편의 장비로 무장한 이 차와 잘 어울렸죠. 그다음으로 '도요타 랜드크루저', 아니면 이거랑 헷갈리는 분들이 꽤나 있었는지 이 차를 베라크루'저'로 알고 계시는 분들도 종종 있었죠.

외관은 투박하기 그지 없던 테라칸을 떠올리면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신형으로 거듭난 산타페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곡선을 주로 사용해 거대한 덩치에서 오는 볼륨감은 최대한 살리면서도 투박해 보이지는 않았죠. 덕분에 SUV 특유의 거칠고 각진, 즉 마초 본능을 자극하는 디자인에 거부감을 느꼈던 여성 소비자들도 환영했습니다. 물론 여성 고객이 직접 이 차를 구매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량 구매에 있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배우자의 허락을 얻어내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했어요.

렉서스 RX를 다분히 의식한 듯한 전면부는 세로로 길게 찢은 헤드램프와 길게 늘어뜨린 라디에이터 그릴로 그동안 국산 차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그릴 하단에 포인트를 넣어 엠블럼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갈 수 있도록 유도했는데, 당시 브랜드 밸류를 높여야만 했던 현대차의 고민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현대네, 이런 차도 만들 줄 알아?' 이런 거죠.

이차의 성향은 측면에서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공기 저항을 고려해 한껏 누워 있는 A필러, 유려한 사이드 캐릭터 라인, 당시에는 거대했던 18인치 알루미늄 휠로 거친 들판보다는 잘 닦인 아스팔트 길이 더 어울리는 외모였지만 하단의 플라스틱 가니쉬를 덧대 약간의 거친 길은 거뜬히 달려줄 것 같은 든든함을 줬죠.

무게감이 돋보이는 후면부 역시 날개를 연상케 하는 LED 테일 램프, 대구경 듀엣 머플러로 한눈에 봐도 '고급 차량'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전통적인 SUV의 감각보다는 세단의 스타일링이 많이 가미된, 이후 등장한 '르노 삼성 QM5'가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키워드인 '도심형 크로스 오버'의 전형이었습니다.

또 당시 신세대 현대차 디자인에 발맞춰 화려한 기교나 장식이 절제되어 한결 단정한 느낌이었는데, 덕분인지 이 시기에 출시된 현대차들이 지금 봐도 딱히 질리지 않는 것 같아요. 거대한 덩치는 동급 최대 렉스턴을 전고 제외, 모든 면에서 압도했습니다. 지금에야 대형 SUV들이 흔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수입차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체감상 느끼는 크기가 어마어마했죠. 특히 전폭은 순정 사양으로 제공되는 사이드 스텝을 포함해 1,970mm, 무려 2m에 가까운 지금 봐도 넉넉한 수치를 자랑했는데,

당시 국산 승용차 중 베라크루즈보다 넓은 차는 '그랜드 카니발'뿐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차가 제일 큰 문제였어요. 일본 차의 영향을 받아 전폭이 대체로 좁은 편이었던 이전 세대 현대차에게 비해 당시 최신 현대차 특히 '그랜저TG'도 전폭이 크게 넓어지면서 주차에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가 속출했었죠.

베라크루즈는 여기에 한술 더 뜬 수준이었으니,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차는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법으로 지정된 주차 칸의 너비가 2.3m에 불과해 불편을 호소했고 '문콕 보험처리' 등으로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지자 지난 2017년에 와서야 법이 개정됐습니다.

지금은 20cm 늘린 2.5m 폭을 확보하도록 규정했죠. 이미 지어진 건물은 어쩔 수 없지만요. 또 이 문제는 나중에 펠리세이드가 그대로 이어가... 외관의 도시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이은 실내는 새로 출시된 플래그십 세단으로 보일 만큼 승용 감각이 두드러졌습니다. 'The LUV', 럭셔리 유틸리티 베이클이라는 슬로건처럼 에쿠스 못지않은 호화 사양으로 가득 채웠죠.

마찬가지로 '렉서스 RX'를 참고한 티가 팍팍 나는 센터페시아는 장식 요소를 최대한 절제한 외관처럼 그동안 고급 차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왔던 '우드 떡칠' 대신 푸른색 조명과 금속 느낌의 장식, 폭신한 우레탄 재질을 폭넓게 사용해 올드한 느낌을 덜어내고 세련미를 강조했습니다.

버튼류의 재질과 조작감은 차급을 감안하면 투박했지만 깔끔하게 정돈돼 원하는 기능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죠. 거대한 차체에서 비롯된 공간감이 더해져 마치 거실에 앉아 있는 듯 널찍했고, 블루&화이트 톤의 깔끔한 계기판, 문전석 메모리 시트, 7인치 DVD 내비게이션 등 고급 차에 걸맞는 다양한 편의 장비들을 적용했습니다.

또 현재 블루링크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는 '모젠 내비게이션'도 옵션으로 제공해 다양한 편의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물론 많이 비쌌고 불편한 데다가 요금까지 내고 써야 했던 기능이라 거의 선택하지는 않았지만요.

여기에 8개 스피커의 고급형 JBL오디오를 중간 트림부터 기본 적용하고 후석 승객을 위한 '후석 모니터'와 무선 헤드셋을 옵션으로 제공해 장거리 여행 시 즐거움을 더했죠. 물론 옵션 가격은 전혀 즐겁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요. 슬라이딩을 지원하는 후석은 2열 등받이를 상당히 큰 폭으로 조절할 수 있었고 '전륜구동'이라는 설계상 이점이 더해져 구색 맞추기에 가까운 다른 SUV들의 3열과 달리 실제로 탈 만한 공간을 제공했어요.

낮은 센터 터널과 넉넉한 전폭으로 깍두기 자리인 2열 가운데 앉아도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7명이 오롯이 탑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SUV였죠. 여기에 별도로 온도 조절이 가능한 공조 장치, 2열 열선 시트 등 차급에 기대하는 승객 편의성도 충실히 챙겼습니다.

거대한 덩치에서 짐작되듯 적재공간도 훌륭했는데요. 2열을 접으면 약간의 경사가 지기는 했지만 풀-플렛에 가까운, 미니밴 부럽지 않은 공간을 제공해 패밀리카와 업무용 차량의 구분이 없는 자영업 소비자, 캠핑과 낚시 등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기는 많은 아버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고급 트림부터 '전동 테일게이트'를 제공한 것도 차별화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후 등장한 '모하비'가 어른들의 사정으로 이 옵션을 빼고 등장하면서 당시 이에 가능한 차가 정말 몇 대 없었죠.

파워 트레인도 남달랐습니다. 국산 차 최초로 자체 개발한 'V6 3.0L 디젤엔진'에 아이신 '6단 자동변속기'를 맞물려 덩치에 걸맞는 강력한 힘을 제공했어요. 이 '승용형 S 디젤엔진'은 '피에조 인젝터'를 적용해 연료를 보다 정밀하게 분사할 수 있게 되면서 좋은 연비와 성능을 끌어냄과 동시에 배기가스까지 줄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덕분에 연식이 꽤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노후 경유차 규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죠. 이후 연식 변경을 통해 북미 사양인 V6 3.8L 람다 가솔린 사양이 추가로 투입되어 더욱 고급스러운 주행 감각을 원했던 소비자들에게 어필했지만 'SUV는 무조건 디젤'이었던 당시 분위기와 가뜩이나 디젤도 안 좋다고 말이 나오는 마당에 안 봐도 비디오인 놓인 처참한 가솔린 연비 덕분에 판매량은 저조했습니다.

여기에 적당히 높은 지상고와 주행 환경에 따라 구동력을 조절할 수 있는 상시 사륜구동 'AWD 시스템'을 탑재해 평소에는 세단처럼 편안한 주행이 가능하면서도 눈길이나 빗길 등 노면이 미끄러운 상황이나 약간의 험로를 돌파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높은 시트 포지션으로 시야가 시원했고 페달의 위치를 전동으로 조절해 키가 작은 운전자도 수월하게 운행할 수 있게 했죠. 앞서 이야기했듯 이 차량은 전륜 구동기와 모노코크 방식의 '일체형 차체'를 사용했고 '고급 패밀리 SUV'라는 콘셉트에 충실한 넉넉한 공간과 편안한 온로드 주행 감각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후륜구동 보디 온 프레임'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의 렉스턴과 모하비와 비교되며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견인 하중과 오프로드 성능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어요. 지금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모노코크 방식을 활용하면서도 충분한 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두 구조의 장점을 결합한 유니바디가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중대형 SUV에는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모노코크의 SUV는 연약하다'는 인식이 팽배했죠. 출시 이후 이렇다 할 페이스 리프트 한 번 없었지만 매년 연식 변경을 통해 감질나게 업데이트하면서 내실을 다져왔습니다.

2009년에는 패드림프의 호박색 반사판을 제거하고 휠 디자인을 변경해 깔끔한 인상으로 거듭났는데 디젤 엔진을 개선해 출력도 소폭 증가했죠. 여기에 지상파 DMB와 스마트키 시스템, AUX 및 USB 등이 추가됐고, 1년 후 버튼 시동 스마트키로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2012년 이후 출고된 차량은 모하비와 발맞춘 'S2 디젤 엔진'이 장착되어 출력이 상승했고 '유로5 배출가스 기준'까지 충족하면서 '환경개선부담금'이 면제됐습니다. 또 기존 아이신 6단 자동변속기가 현대파워텍의 6단 자동변속기로 교체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 꽤나나 큰 변화가 있었지만 외관의 변화는 새로운 18인치 휠이 전부였죠.

열선 스티어링 휠과 운전석 통풍 시트 등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옵션이 더해졌는데 조수석 통풍 시트는 2014년, 슈퍼 끝물이 되어서야 추가됐습니다. 뭐 하나 시원스레 바꾸는 게 아닌, 무슨 인질 협상하듯이 찔끔찔끔 추가하는 게 내수 판매가 주력인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인가 봐요. 또 수출형에는 버젓이 있는 '크루즈 컨트롤'이 끝내 안 들어간 것도 좀 어이없죠. 이름이 베라'크루즈'인데 말입니다.

- 멜론머스크의 이용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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