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다카시의 예술관과 2차대전의 연관성
무라카미 다카시 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이미지인 슈퍼플랫 플라워 (이번에 뉴진스랑 콜라보한 그 캐릭터)
다들 익숙한 이미지긴 하지만 정확한 이름까지는 몰랐던 케이스가 대부분일 덬들이 많을거임
근데..대체 슈퍼플랫이 무슨 뜻일까?
슈퍼플랫(super-flat)이란?
무라카미 다카시에 관심이 있다면 으레 “슈퍼플랫”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평생의 작품활동에 걸쳐 정립해온 독특한 예술론이다.
우선, 슈퍼플랫은 세계대전 후에 완전히 “평면화(flattened)”된 사회계급의 높낮이와 그에 따라 발전된 다양한 문화를 특징으로하는 일본사회를 상징한다.[i] 무라카미는 이러한 사회현상학적 관찰을 미술영역으로도 확장하여, ’저급한 것’ 또는 하위문화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요소들을 재포장하고 그것을 상위예술 시장의 영역에 소개한다. 그 일환으로 그는 자신의 ‘고급미술’ 작품들을 적절한 가격의 장난감, 티셔츠 등을 상품화함으로써 미술의 지평을 확장한다. [ii]
즉, 광의의 슈퍼플랫은 일본의 사회적 계급을 기반으로 한 취향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것을 뜻하고, 협의의 슈퍼플랫 이론은 고급미술과 대중상업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사적 평가기준의 평등함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무라카미는 일본의 하위문화 중 하나로 구분되었던 오타쿠 문화를 분석, 재해석하여 상위 문화인 ‘순수예술’의 범주에 끼워넣음으로써 문화와 취향의 경계를 평준화 시켰다. 나아가, 무라카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세계대전을 거쳐 무의식적으로 확산된 일본인들의 욕망과 트라우마를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해방적인’ 성향을 띄기도 한다. 무라카미는 본인의 작품들을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일종의 하위미술으로 여겨지며 무시당하고 ‘괴기스럽게’ 여겨졌던 일본 미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시대가 온 것”을 시사하기 위한 노력”이라 설명한다[iii].
http://www.theartist.co.kr/news/articlePrint.html?idxno=608
슈퍼플랫은 아무런 아이러니도 없이 온갖 종류의 울퉁불퉁한 의미론적 촉수를 싹트게 했습니다. 이제는 장르 간의 수평적 평탄화를 의미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높은 문화와 낮은 문화 사이의 수직적 평탄화; 귀여운 것과 포르노적인 것의 혼합; 반짝이는 색상의 평면; 일본의 피상적인 문화; 그리고 심지어 경제 거품이 터지는 일까지도요.
https://www.scmp.com/magazines/post-magazine/article/1104354/super-powered
즉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위계가 애매해지고 계급과 취향도 해체되어 ‘평평해진’ 일본 사회의 천박한 소비문화와 성도착증 등을 비판적인 시점으로 바라보기 위한 개념이라고 요약할 수 있음
일견 굉장히 건강해보이는 개념이지만, 문제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이러한 일본사회에 만연한 병폐의 근원으로 1945년의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발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임
우연히도 "Little Boy"는 2005년 뉴욕의 Japan Society에서 열린 무라카미 쇼의 제목이었습니다. 그것은 Fat Man의 형제, 고쿠라가 간신히 탈출하기 3일 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을 지칭합니다.
이 전시의 부제는 "폭발하는 일본 하위 문화의 예술"이었고, 무라카미의 "슈퍼플랫"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슈퍼플랫은 그가 2000년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던 그룹 전시의 이름으로 선택한 이후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언급되었습니다. 무라카미는 일본의 패배하고 전쟁이 끝난 후 애니메이션 중심 문화가 서구의 3차원 승리 제국과는 달리 2차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미국인과 영국인이 현대 미술을 창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완전 평탄합니다. 1987년 일본의 버블 경제 이후에는 기회가 있지만 그 전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https://www.scmp.com/magazines/post-magazine/article/1104354/super-powered
무라카미는 자신의 평면적이고 2차원적인 예술 스타일에 붙여진 이름인 “ 슈퍼플랫 ” 의 탄생 아버지입니다 . 슈퍼플랫은 일본 고전 예술의 평면 미학과 애니메이션, 만화를 포함한 2D 그래픽의 현대적 현상에서 이중적인 영감을 얻어 슈퍼플랫을 국가 연속성의 상징이자 디지털 시대의 글로벌 표현으로 만듭니다. 무라카미는 '꽃'을 통해 20세기 중반의 폭력이 일본인에게 남긴 흔적인 '집단적 트라우마'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완전 평면 미학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로, 꽃은 모두 평면적이고 밝은 보색이며 대담한 윤곽과 2차원적인 미소로 거의 너무 밝은 쾌활함을 발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꽃들의 중첩되고 소비되는 막힘은 “ 창조자, 소비자, 사회 모두의 억압된 무의식 ”을 압도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무라카미는 이 “억압된 무의식”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재앙적인 원자폭탄 투하와 그에 따른 미국의 헌법적 탈취로 정점을 이룬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패배의 트라우마라고 이해합니다. 이 최근 역사가 "거의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에, 무라카미는 이것이 민족 의식을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분열시키는 불협화음의 근원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는 카와이 문화의 복종과 애니메이션의 허무주의적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https://jetsettimes.com/travelers/artists/repressed-trauma-or-commercial-nonsense-investigating-takeshi-murakami/
이렇듯 무라카미 다카시의 예술관은, 현대 일본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의 근원이 원자폭탄으로 인한 궤멸적인 피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이러한 피해에서 비롯된 현대 일본 문화의 문제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하면서 전쟁의 무의미함을 역설하는 것에 근원을 두고있음
하지만 이런 무라카미 다카시 예술관의 맹점은,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늘 그렇듯 전범국인 일본의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이 전무하다는 점임
그렇기 때문에 무라카미 다카시에게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그의 예술관에 담긴 위험성과 자가당착적인 면모들을 주로 지적함
여기서 무라카미의 의식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일본의 오타 쿠 문화를 서구에 내다 판 그의 예술 기반이 ‘국가’를 중심축으로 설정되어 있다 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패전 후 일본문화는 ‘국가’라는 중심 기반이 빠져 있는 무능한 문화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길, “메이지유신 때는 국가라는 기반이 있었기에 일본화와 서양화도 태어났었던 것이고, 따라서 예술이 일그러졌어도 국가는 전진을 했다”는 것이다.77) 그러나 패전 이후 일본은 국가 기반 자체를 잃어버렸기에 무기력한 세계관만이 만연해졌다. 이런 세계에 서 예술은 망가와 아니메와 같이 주변부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전능한 현대미술의 총아로서 팝아트를 네오팝의 이름으로 되 새김질하고 있는 무라카미의 ‘위험한 징후’로서 속내가 드러난다. 그것은 무능한 오타쿠 문화의 가상세계 속이 아니라 진짜 ‘우주전함 야마토’로 부활해 전능해지 는 현실적 바람일 것이다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91998/1/04_%EB%AC%B4%EB%8A%A5%ED%98%84%EC%8B%A4%20%EC%A0%84%EB%8A%A5%EC%98%88%EC%88%A0%EC%9D%98%20%EC%97%AD%EC%84%A4.pdf
그러나, 앞서 언급된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들과 작가 본인의 의도 간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존재한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직접 작성한 글과 여타 평론들을 편집하여 출판한 책인 <Little Boy: The Arts of Japan’s Exploding Subculture>를 읽어보면, 그가 특정 문제의식을 지니고 일본의 시국을 비판 및 개선하기 위해서 그런 종류의 불편함을 생성한 것은 아니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오히려 일본문화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군사주의와 남성우월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화하고,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슈퍼플랫 이론에 대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후 일본인들의 억눌린 욕망이 내포하는 비평등한 요소들은 전혀 평등화 시키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슈퍼플랫한 것으로 포장, 문화의 표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이유에서이다.
슈퍼플랫의 비-슈퍼플랫함에 대하여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아니면 무라카미 자신도 그 아이러니를 인정해서인지, 이런 ‘비-플랫’한 이데올로기와 욕망이 내포된 작품들은 평면의 가로 형태가 아닌 세로 형태로 제작되었다.
남성들의 성적환상이 표현된 미스코코 작품들도 그러하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및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후폭풍들을 상징하는 듯한 작품들이 그렇다. 예를들어, 자료 3의 조각들은 얼핏, 일본의 전통우산이나 야자수 등을 떠오르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자폭탄 투하 직후에 뿜어져나온 독버섯구름의 형태를 한다. 마찬가지로, 방사능에 피폭된 돌연변이를 연상시키는 많은 작품들이 세로로 설치되어 있다.
사실, 전후 일본사회에서 하위문화로 분류되어 억지로 잠식된 그들의 무의식과 욕망은 대체로 ‘슈퍼플랫함’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의 패배로 인해 해소되지 않은 정복에 대한 갈망, 그것이 발생시키는 또 다른 보복적 지배욕구, 그리고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성적 시선은 본질적으로 평등성 추구하는 가치관이 아니다. 오히려,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답습하는 욕망들이다.
http://www.theartist.co.kr/news/articlePrint.html?idxno=608
물론 무라카미 다카시가 우익이다, 라고 단정짓기는 애매한 면이 있음
다만 그의 이러한 예술관에 담긴 의미가 한국인들에게는 충분히 불편한 지점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상기하고 비판적 소비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간단하게 이 글을 써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