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실험, ‘김건희’ 대신 ‘김정숙’ 넣기 [아침햇발]

이재성 기자 2024. 9. 1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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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한가위 명절 인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이재성 | 논설위원

문재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했지만, 여론의 반응이 뜨겁지 않다. ‘논두렁 시계’를 비롯한 선례를 통해 충분한 학습 효과가 쌓였고, 수사를 정치화하는 검찰의 행태에 대한 국민적 내성도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무혐의 처분(아직 최종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에 이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2심 재판 결과가 나왔는데도 오직 김 여사만 처벌하지 않는 불공정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의혹을 제기한 지 5년이나 지난 전 정권의 ‘캐비닛 사건’에 앞다퉈 뛰어들 만큼, 다수 언론이 무분별하지는 않은 것이다.

문 전 대통령 일가의 무죄를 확신해서라기보다는, 유죄가 분명해 보이는 윤석열 대통령 부인에 대한 검찰의 노골적인 봐주기가 법적 형평성 문제를 의제 설정의 최우선 고려 사항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한쪽에선 무차별 압수수색과 지인 괴롭히기, 피의사실 유포 등 전형적인 수법이 총동원되는데, 한쪽은 증거가 이미 다 나와 있고, 공범들이 유죄 선고를 받았는데도 마치 없는 일처럼 뭉개고 있는 검찰의 편파성을 국민이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처지를 바꿔보는 ‘역지사지 실험’은 다소 유치할 수 있지만, 사태를 단순화해서 객관화하는 데는 효과가 있다. 지금이 문재인 정부이고, 명품백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주인공이 김정숙 여사라고 가정해보자. 검찰은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명품백 존재 여부와 보관 위치부터 특정하고, 명품백 수수 현장 영상에 등장하는 내빈객 전원을 소환조사해서 선물 및 청탁 리스트를 만들어 이행 여부를 파고들었을 것이다. 각각의 스토리가 매체를 달리하며 선정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물론이다. 명품백을 돌려주려 했는데 깜박했다는 행정관의 휴대전화를 압수수색해 거짓 증언을 강요하거나 회유한 자가 있다면 증거인멸과 위증교사로 기소했을 것이다. 등등. 도이치모터스는 사건 규모가 너무 크니 지면의 한계상 가상 실험은 생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정숙’ 자리에 ‘김건희’를 넣는 역실험도 물론 가능하다.

실험 결과는 자명하다. 이른바 ‘친검무죄 반검유죄’라는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칙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를 비롯한 검찰개혁을 주장하면 반검이고, 검찰개혁에 반대하면 친검이다. 검찰은 스스로 ‘반검세력’을 찌르는 칼이자, ‘친검세력’을 지키는 방패가 된 지 오래다. 친검이라면 있는 죄도 뭉개고, 반검이라면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 그들은 이제 공정해 보이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 윤 대통령과 검찰의 반민주적 성채는 ‘법’과 ‘팩트’라는 두가지 기둥으로 지탱된다. 야당과 비판세력에 대한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실’에 굶주린 언론에 편집된 팩트를 제공함으로써 잃어버린 정국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게 아니라면 작금의 불통과 편파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윤 대통령은 검찰 권력에 기대어 야당을 무시하고 정치를 쓸모없게 만들고 있다. 윤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에 불참하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하기는 했지만,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검찰 권력을 통한 정적 제거와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범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재명이 야당 대표인 국회에는 가지 않겠다는 다짐이거나, 이재명 대표가 사법적으로 곧 단죄되리라고 믿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둘 다 아닐까. 협치는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당위이지만,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검찰권을 정치에 활용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 애초에 닿을 수 없는 이상향에 불과하다. 검사정권의 폐해 가운데서도 가장 위중한 해악이 정치 무력화다.

낡은 시대의 문을 쾅 닫고 나가라는 정언명령은 이미 내려져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검찰이 쥐고 흔드는 ‘팩트’의 조각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용기와 결단이다. 수사를 통한 여론 조작이 검찰개혁을 하나회 해체보다 어렵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애물이다. 사실을 입맛에 맞게 정렬한다고 진실이 될 수 없고, 거짓을 적당히 섞은 사실의 조합 역시 진실이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야말로 역사의 도돌이표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정말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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