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2년 10월 강원 철원 일대 해발 395미터 고지 하나에서 12일 동안 한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 사이에 24차례 주인이 바뀐 격전이 있었습니다. 고지 능선이 포격으로 깎이고 흙이 흰빛으로 변해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은 자리입니다.이 전투는 단순한 고지 점령전이 아니라 휴전회담을 앞두고 협상 테이블에서의 위치를 결정하던 마지막 격전 중 하나였습니다. 양측 모두 이 능선을 잃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군 9사단은 약 1만 4000명, 중공군 38군은 약 4만 명 이상이 이 고지를 두고 충돌했고 12일간 양측 사상자만 2만 명이 넘었습니다.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격렬한 고지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 전투를 기점으로 한국군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별칭을 부여받았고, 그 이름은 지금까지 9보병사단의 공식 명칭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2일간 24차례 고지 주인이 바뀌었다
1952년 10월 6일 첫 교전을 시작으로 10월 17일까지 12일 동안 백마고지 정상은 24차례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새벽에 점령했다 오후에 빼앗기고 다시 야간에 탈환하는 방식이 반복됐습니다.특히 야간 공격이 양측 모두에게 결정적이었고, 한 번의 진격으로 고지가 점령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정상 능선을 두고 능선 양쪽 사면에서 거리 수십 미터의 백병전이 이어졌습니다.

양측 약 2만 명의 사상자, 한국전쟁사 최대 격전 중 하나
이 12일 동안 한국군 측은 전사 1394명·부상 2700여 명을 기록했고, 중공군 측 사상자는 약 1만 4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양측 합계 사상자만 약 2만 명에 달했습니다.이 정도 규모는 사단급 충돌의 일반적 손실을 크게 넘는 수치였고, 한국전쟁 후반기 휴전회담을 둘러싼 마지막 격전이라는 정치적 무게가 있었습니다.

포격으로 능선 흙이 흰빛으로 변해 '백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12일간 양측이 백마고지에 쏟아부은 포탄은 약 27만 발로 추정됩니다. 능선의 흙이 모두 갈리고 잔해가 햇빛에 반사되어 멀리서 보면 흰 말 등처럼 보였다고 합니다.이 모습에서 '백마고지'라는 별칭이 생겼고, 그 이름이 9사단 자체의 별칭으로 이어졌습니다. 휴전 후에도 그 능선에는 오랜 기간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강승우 하사의 수류탄 자폭과 김교수 일등병의 통신 사수
전투 중반 한국군 측에서는 강승우 하사가 수류탄을 안고 적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어 진지를 무력화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군 1개 소대 진격이 가능해졌다는 보고가 남아 있습니다.또 김교수 일등병은 통신선이 끊긴 상황에서 수류탄 폭발음 사이에서 통신선을 잇는 작업을 계속해 부대 간 협조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전후 무공훈장이 추서됐습니다.

9사단이 '백마부대'라는 별칭을 받게 된 직접적 계기
백마고지 전투 직후 한국군 사령부는 9사단에 부대 표창을 수여하고 별칭을 부여했습니다. 이때부터 9사단은 공식 자료에서도 '백마부대'로 기재되기 시작했습니다.지금도 9사단 부대 마크에는 흰 말이 들어가 있고, 부대 역사관에는 1952년 백마고지 전투 일자별 기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만든 부대 정체성 가운데 가장 선명한 사례입니다.
휴전 직전의 격전이 만든 부대 정체성
백마고지는 한국전쟁이 휴전선을 향해 굳어가던 시기에 양측이 서로 절대 양보할 수 없었던 좁은 능선이었습니다. 12일간의 24차례 점령전은 군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휴전회담 위에 그어질 선을 결정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지금도 9사단의 정체성을 만든 자리이자, 한국전쟁사에서 단일 전투 사상자 규모로는 가장 큰 자리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휴전 7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능선의 모습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의 마지막 격전 중 하나이자 한국군 부대 정체성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사건입니다. 흙빛이 변할 만큼의 격전이 어떻게 부대의 이름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한국전쟁의 다른 비사들도 함께 짚어볼 가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