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첫 사랑의 맛’ 칼피스, 모던 걸의 입맛 사로잡다

1920년대 경성 밤거리에는 ‘감주’를 팔러다니는 장사꾼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중월간지 ‘별건곤’(1928년2월호)기사 ‘감주와 막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구루마에 끌고 다니는 ‘왜국수’ 장사가 생긴 것은 오래된 옛 이야기요, 약식 장사가 두부 장사처럼 외치고 다니는 것도 벌써 헌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번 세밑에는 ‘따끈따끈하구료’ ‘맛보고 사 잡수시오’하고 밤 깊은 골목을 요란히 외치고 다니는 감주 장사도 생겼다.’
이 ‘감주’의 매력(?)을 선전하는 데 신종 음료 ‘칼피스’가 등장한다. ‘사랑에 낯붉히고 안젓는 나어린 애인들에게 ‘칼피스’ 이상의 고마운 맛이 있을 것’이라는 표현이다. 청춘 남녀들이 ‘연애의 맛’을 느끼며 마시는 음료로 ‘칼피스’를 선전한 것이다.

◇박태원, ‘외설적 색깔, 싫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박태원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칼피스가 등장한다. 거리를 걷다 동창생을 만난 구보씨는 경성역 티룸에 들렀다. ‘의자에 가서 가장 자신 있게 앉아, 그는 주문 받으러 온 소녀에게, 나는 ‘가루삐스’, 그리고 구보를 향하여, 자네두 그걸로 하지. 그러나 구보는 거의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고, 나는 홍차나 커피로 하지.’
동창생이 권한 ‘가루삐스’, 즉 칼피스를 구보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색깔이 외설적이고, 입맛에 맞지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음료 칼피스를, 구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설’한 색채를 갖는다.또, 그 맛은 결코 그의 미각에 맞지 않았다.’
박태원은 ‘기호품일람표’(동아일보 1930년3월25일)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첫사랑의 맛을 잘 알고 있는 나, ‘칼피스’를 먹을 생각이 나지 않소.’ 같은 글에서 양식에는 홍차, 차와 케익을 맛보고 싶을 때는 ‘코코아’와 ‘슈크림’을 먹는다고 썼다. 커피는 맛이 검증된 단골 카페 이외의 장소에선 마시지 않는다고도 했다. 입맛 까다로운 ‘모던 보이’다운 취향이었다.

◇여름철 대표적 청량음료
칼피스는 사이다, 시트론, 평야수(平野水) 같은 탄산음료와 함께 1920년대 들어 이 땅에 소개됐다. 무더운 여름철에 많이 찾는 음료였다. 1930년 신문에 수박, 참외, 복숭아 같은 과일과 맥주를 소개하면서 ‘칼피스’를 포함시킬 만큼 신종 유행 음료로 떴다. 우유로 만든 음료인 만큼, 변질될 우려도 있었다. ‘우유를 원료로 한 산성 음료수 하면 ‘칼피스’ ‘렉키스’같은 것이 흔히 유행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어떤 때에 위험성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것들중에 흐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음료수의 여러가지 성분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흐리게 되는 나쁜 것들이 있습니다.’(‘우유로 만드는 음료 여러가지’, 조선일보 1930년 8월6일)

◇제비 다방엔 없다
칼피스는 경성 거리에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 ‘카페’ 메뉴판에 커피, 홍차와 나란히 이름을 올릴 만큼 유행했다. 박태원은 친구 이상이 운영했던 찻집 ‘제비’이야기를 조선일보에 쓴 적 있다. 이상이 죽은 후인 1939년이었다. ‘제비’의 메뉴는 언젠가부터 커피와 홍차, 딱 두 종류였던 모양이다.
' “무얼드릴깝쇼?” “저-나는 포-트랩, 자넨, 칼피스?” “지금 안되는 뎁쇼.무어 다른 걸루…” “안돼…그럼 소-다 스이.” “그것도 안되는 뎁쇼”, “그것두 없다?... 그럼 뭐는 되니?” 수영이는 눈썹 하나 까딱않고 천연스리 대답한다. “홍차나 고-히나.”'(‘제비’上, 조선일보 1939년2월22일)
제비 다방엔 없었지만, 카페나 다방에서 흔히 파는 메뉴였다.
칼피스는 카페나 바에서 남성이 술을 마실 때 동석한 여성들이 선택하는 음료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채만식의 신문연재소설 ‘염마’에도 남자는 위스키, 여자는 칼피스를 고르는 대목이 나온다. ‘허철은 위스키—를 섞은 홋트레몬을, 향조는 칼피스를 각기 한잔씩 앞에 놓고 앉았다. “참 당산은 친구도 업수?” 무얼 생각했는지 향초가 마시던 칼피스잔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염마’, 조선일보 1934년 9월14일) 술 자리에 합석했지만, 술에 약한 사람들이 주로 마셨다는 것이다.
◇'첫 사랑의 맛’으로 선전
칼피스는 우유에 유산균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 음료였다. 일본인 무역상 미시마 카이운(三島 海雲)이 1919년 7월 시원한 산미와 단 맛을 추가한 발효음료로 만들어 판매했다. 일본에서는 칼피스 광고에 ‘첫 사랑의 맛’이란 선전문구를 붙였다. 시원하고 달달한 맛을 ‘첫 사랑’에 연결시킨 것이다. 이 광고가 먹혔던지, 칼피스는 일본은 물론 조선과 중국, 만주에서도 인기 음료로 떠올랐다.
칼피스 광고는 당시 신문에 자주 실렸다. 칼피스가 온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면서 가장 맛있는 온도는 섭씨 14도라고 선전했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물의 온도와 같다고 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맛에 반한 사람들이 이 음료수를 찾기 시작했다. 칼피스는 건강 음료로 소개되기도 했다. 칼피스 광고는 ‘자강음료’(滋强飮料)란 문구를 내세웠다. 우유에 유산균까지 들었으니, 건강에 좋은 음료라고 생각할 만했다.
칼피스는 광복 이후에도 많이 팔렸다. 요즘도 ‘쿨피스’란 이름으로 나온다. 어쩌다 가게에서 눈에 띄면 ‘요즘도 이걸 먹나’ 싶은데, 새콤달콤한 추억의 맛이 떠오를 때도 있다. 예전 같은 인기는 덜하지만, 떡볶이 같은 음식을 먹을 때 매운 맛을 가라앉히는 데는 더할 수없이 좋다.
◇참고자료
城西人, ‘감주와 막걸리’, ‘별건곤’ 11, 1928.2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이경훈, ‘박태원의 카페, 구보의 커피’,’현대문학의 연구’74, 한국문학연구학회,2021
김동식, ‘1920년~30년대 대중잡지에 나타나는 음식표상-별건곤과 삼천리를 중심으로’ 684~685, 한국학연구 제44집, 2017
◇다음 링크(https://chosun.app.link/kichul)를 스마트폰에서 클릭하고 ‘조선일보 앱’을 설치하면, ‘모던 경성’에 나오는 100년 전 조선일보 기사 원문과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옛 기사보기’와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클릭은 조선닷컴에서만 가능합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팔면봉] 與, ‘현금 살포 의혹’으로 경선 중이던 현직 전북지사 전격 제명. 외
- [사설] 엉터리 음모론 퍼트리던 사람이 가짜뉴스 막는다니
- 트럼프 “이란 새 대통령, 휴전 요청... 호르무즈 열리면 검토”
- [사설] 전북·강원은 되고 부산은 안 되고, 특별법도 선거용인가
- [김창균 칼럼] 20년 전 위기 땐 영남 중진들이 黨 구하려 몸 던졌다
- [윤주의 이제는 국가유산] [50] 살구꽃 핀 덕수궁 석어당
- [동서남북] 김정은이 참수작전보다 두려워 해야 할 것
- 이재명‧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손하트’ 한 K팝 걸그룹 멤버
- 출생 시민권 취소한 트럼프, 현직 최초 대법원 변론 참석
- [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60] 장국영이 남긴 독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