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A 마운드에서 ERA 20.25를 찍은 투수가 있다. 4월 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산하 털리도 머드헨스는 그를 더블A로 내려보냈다. 수치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1이닝 3분의 1, 5볼넷, WHIP 4.50. 구단이 그를 내린 건 처분이 아니라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같은 투수가 오마하 스톰체이서스를 상대로 2이닝 무피안타 3탈삼진 퍼펙트 피칭을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트리플A 재승격 후 3경기 연속 무실점. 누적 7이닝, 2피안타, 볼넷 1개. 직구 최고 구속은 151.4km(94.1마일). 시즌 전체 마이너리그 성적은 13경기 ERA 1.64로 집약된다.
고우석(28)은 지난 6주 사이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됐다. 아니, 정확히는 다시 그가 원래 던지던 방식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깝다.
고우석의 미국 도전 3년은 단선적인 성장 곡선이 아니었다. 2024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2년 400만 달러 계약으로 첫발을 뗐지만,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된 뒤 오른손 검지 부상으로 방출됐다. 2025년 디트로이트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트리플A에서 시즌을 마쳤으나 ERA 4.46, 빅리그 콜업은 오지 않았다. 2026년 재계약 후 다시 트리플A로 시작했지만 첫 두 경기에서 ERA 20.25를 기록하며 세 번째 더블A행을 경험했다.

그사이 LG 트윈스가 손을 내밀었다. 마무리 유영찬이 팔꿈치 부상으로 이탈한 LG는 차명석 단장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고우석을 만났다. 복귀 의사만 있으면 자리는 준비돼 있었다. KBO 통산 139세이브, 검증된 마무리 투수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고우석은 거절했다. "아직 미국 야구에 대한 아쉬움이 짙어 더 도전하고 싶다"는 한 마디였다.
이 결정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가장 빠르게 보여주는 건 결국 마운드 위 수치다. 더블A에서 재정비한 고우석은 5월 9일 트리플A에 재합류했다. 멤피스전 3이닝, 13일 오마하전 2이닝, 18일 다시 오마하전 2이닝. 세 경기 모두 0점으로 마쳤다.
주목할 지점은 단순히 무실점 여부가 아니다. 이번 트리플A 3경기에서 고우석이 허용한 볼넷은 단 1개다. 4월 초 강등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제구 불안이 사실상 해소됐다는 의미다. 7이닝 동안 탈삼진 7개를 솎아내며 헛스윙을 유도하는 능력도 되살아났다. 151.4km 직구는 구위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더블A 기간의 역할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4경기 연속 무실점으로 더블A를 마친 고우석은 트리플A에 돌아오기 전 이미 제구와 리듬을 다시 쌓아두고 왔다. 강등이 처벌이었다면 그는 그것을 조정의 기회로 활용했다.
시즌 전체 수치는 이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3경기 ERA 1.64. 4월 초 첫 등판에서 4실점한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12경기는 모두 무실점이다. 지난 2년간 성적(2024 ERA 6.54, 2025 ERA 4.46)과 비교할 때 이것은 수치 개선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피칭이다.
디트로이트 입장에서 고우석에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적만이 아니다. 구조적 맥락이 있다.
디트로이트는 올 시즌 불펜 운용에서 이탈자가 발생하고 있다. 트리플A 수준에서 멀티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오른손 중간계투 자원에 대한 수요는 시즌이 길어질수록 커진다. 고우석이 최근 3경기에서 각각 3이닝, 2이닝, 2이닝을 던진 것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메시지다. 구단 벤치에 "저는 이닝을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피칭이기도 하다.
트리플A에서 마이너리그 계약 투수가 40인 로스터에 진입하려면 구단에 필요와 명분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필요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고, 명분은 고우석이 직접 쌓는 중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지금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첫째다. 3경기 연속 무실점은 콜업을 보장하지 않는다. 디트로이트의 40인 로스터 구성, 메이저리그 팀 상황, 불펜 이탈자 규모가 복합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고우석에게 남은 변수는 하나 더 있다.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다. 트리플A급 타선에서 고우석이 좌타자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처리하느냐는 빅리그 불펜 활용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된다. 이 부분의 검증은 더 많은 등판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ERA 20.25를 찍었던 투수가 1.64로 시즌을 다시 쓰고 있다. 숫자는 이미 바뀌었다. 콜업 여부는 디트로이트가 결정하지만, 고우석이 만들어낸 논거는 이제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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