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보다 음악이 먼저 떠오른다…영화 속 클래식 선율

임석규 기자 2025. 10. 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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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랑한 클래식
영화 ‘더 랍스터’(2015).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A장조가 몇 번이었지?”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영화 ‘러브스토리’(1971)에서 주인공이 연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정답은 23번. 지금 극장 상영 중인 박찬욱 감독 영화 ‘어쩔수가없다’ 시작과 마지막에 애수 어린 2악장이 흐른다. 독재자 스탈린이 이 곡을 사랑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곡이 흐르자 감동한 스탈린은 레코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음반이 아니라 피아니스트 마리야 유디나(1899~1970)의 실황 연주였던 것. 하지만 아무도 스탈린에게 감히 음반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유디나와 지휘자, 오케스트라가 총출동해 밤을 새워 녹음하고 레코드를 제작했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 유디나가 연주한 이 음반이 턴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2019)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긴 추석 연휴, 영화 속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보는 건 어떨까? 영화 장면보다 배경에 흐르는 음악이 더 또렷하게 기억되는 영화가 제격이다. 최근 세상을 뜬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가 그렇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을 빼놓고 이 영화를 말하긴 어렵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자연과 유장한 2악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킹스 스피치’(2011)엔 경쾌한 1악장이 삽입됐다. 주인공이 말더듬이 치료를 받는 장면에서 유머러스하게 쓰였다.

마지막 장면의 클래식 음악으로 엔딩 크레디트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도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8) 엔딩 장면에 흐르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이 대표적이다. 활기찬 리듬과 어두운 결말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깊은 잔상을 남긴다. 이 영화를 만든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이번 추석 연휴 극장 상영작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 배급사 제공

심리 묘사가 섬세한 작품에선 현악 4중주 등 실내악이 ‘분위기 메이커’로 작동한다. ‘더 랍스터’(2015)는 짝을 찾는 데 실패하면 본인이 선택한 동물로 변하는 기묘한 설정의 영화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번 2악장이 반복해 흐르며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현대 작곡가 알프레트 시닛케의 피아노 5중주, 스트라빈스키와 벤저민 브리튼의 현악 4중주가 영화에 독특한 색감을 부여한다. 현악 4중주단 내부의 곡절과 풍파를 담은 ‘마지막 4중주’(2013)에선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이 끝없이 흐른다.

여러 영화에 빈번하게 흐르는 ‘단골 레퍼토리’도 있다. 서정적 선율이 아름다운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가 첫손에 꼽힌다. 이병헌, 이은주 주연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2001)를 비롯해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2000), ‘사이코비치’(2019), ‘리허설’(2016), ‘배트맨 대 슈퍼맨’(2016) 등 여러 작품에 사용됐다.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도 빼놓을 수 없다. 헬기 난사 장면에서 이 음악이 쓰인 ‘지옥의 묵시록’(1998)을 비롯해 ‘플로렌스’(2016), ‘라이드 어롱 2’, ‘잭애스 3D’(2010), ‘박물관이 살아 있다 2’(2009), ‘왓치맨’(2009), ‘고스트 라이더’(2007) 등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는 가슴을 파고드는 현악의 탐미적 음색으로 인기가 많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타르’(2023) 등 여러 작품에 나온다.

음반 속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와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소니클래식 제공

연주자를 다룬 작품에선 특정 악기의 명곡을 뽑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 재클린 듀프레이(1945~1987)의 삶을 그린 ‘힐러리와 재키’(1998)에선 첼로의 명곡들이 흐른다. 엘가와 하이든,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비롯해 브람스와 프랑크의 소나타가 흐른다. 특히 엘가 ‘첼로 협주곡’은 지금도 듀프레이와 지휘자 존 바비롤리가 런던 심포니를 지휘해 녹음한 음반이 최고 명반으로 꼽힌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83)과 듀프레이의 사랑과 갈등을 다룬 대목에선 베토벤 피아노 3중주 ‘대공’과 슈만의 ‘환상 소품집’ 등을 만날 수 있다.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실화를 담은 ‘샤인’(1996),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그린 ‘피아니스트’(2002), 지휘자 번스타인의 생애를 다룬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에서도 클래식 명곡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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