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뉴욕'을 만든 강에서 카약을 타고 여행하기

뉴욕시가 400주년을 맞이했다. 이 도시의 성장 비결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뉴욕을 둘러싼 강에서 직접 노를 저으며 도시를 돌아보는 것이다.

맨해튼섬의 마지막 원시림이 있는 인우드 힐 공원 근처였다.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자,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들렸다. 우리는 마지막 빙하기 무렵 만들어진 바위가 나무 뿌리에 얽혀 있는 쪽으로 노를 저어 갔다. 바로 그때, 왜가리 한 마리가 낮게 날아와 작은 모래톱에 착륙하더니, 갈대 사이를 헤치고 맨해튼을 둘러싼 마지막 염습지로 모습을 감췄다.

뉴욕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공적인 장소라 할 만한 곳이다. 나는 하루 동안 카약을 타고 이곳을 돌아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섬의 원주민들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옛 모습이 되살아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뉴욕시, 더 정확하게는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된 네덜란드 정착지 뉴암스테르담의 탄생 400주년이다. 여기에는 여러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 있어, 관계자들은 수년 동안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해 왔다.

역사학자 러셀 쇼토에 따르면, 미국의 시발점은 400년 전 뉴암스테르담이 탄생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섬(The lsland at the Center of the World)'의 저자 러셀 쇼토에 따르면, 이 네덜란드 정착지는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약속 아래 다원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근대적 도시를 탄생시켰다.

그는 저서에 이렇게 썼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독창적인 개방성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요인이라면, 맨해튼섬 남쪽 끝에 있는 작은 삼각지대는 그 아이디어의 발상지다. 이 섬은 해안에 인접한 미국 영토 중에서 최초의 다민족 도시이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꿈꿀 수 있는 사회로, 이러한 사회 전형은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복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스턴, 플리머스록, 제임스타운 보다 "맨해튼이 미국의 발원지"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이곳에서 원주민을 쫓아냈다. 그리고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을 데려와 로워 맨해튼을 건설하면서 다민족 사회를 만들었다. 쇼토는 BBC에 "그들은 관용과 편협함,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를 가져왔다"며 "그들의 업적과 실패를 잘 구분해, 어느 한쪽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의 400주년을 기념하는 몇몇 행사들은 이 정착지가 미국의 기틀이 된 것과 토지 박탈 및 노예제라는 어두운 유산을 신중하고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해왔다. 네덜란드인들이 400년 전 찾아와 맨해튼 남쪽에 정착한 거버너스섬에서 9월 14일에 피크닉 행사를 연 '홀랜드 소사이어티 오브 뉴욕'의 책임자 사라 쿠니는 "우리는 이 기념일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기념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 이민자들은 그들이 건설한 모피 무역 전초기지가 언젠가 엄청나게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전 세계 모든 민족이 한 곳에서 함께 살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실험이 오늘날까지 이곳에서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뉴욕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 존재했던 도시 중 언어적으로 가장 다양성이 큰 도시로 알려져 있다

여러 면에서 맨해튼은 자연에 대한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맨해튼은 섬이라기보다는 철제 고층 빌딩과 잘 가꾸어진 공원으로 뒤덮인 시멘트의 숲처럼 보인다. 하지만 면적 23제곱마일의 이 지역이 세계의 경제 수도가 된 성장기는 많은 뉴욕 시민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 현상, 즉 물에 대한 접근성과 큰 관련이 있다.

'맨해튼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박물관' CEO인 조나단 불웨어는 "모든 것은 물에 관한 이야기로, 이 도시 전체가 물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뉴욕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글로벌 수도, 문화 수도, 다문화 도시로 성장하기까지 뉴욕의 모든 정체성은 물, 그리고 물을 통한 다른 세계와의 연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400년 동안 뉴욕을 만들어 낸 많은 요인을 생각해보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한 가지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나는 카약에 몸을 싣고 30마일 길이의 맨해튼 일주에 나섰다. 9시간에 걸친 이 여정은 그저 뉴욕을 보는 독특한 방법에 그치지 않았다. 맨해튼을 만든 강과 도시의 관계를 재발견하는 멋진 여정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

1609년,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가는 전설의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영국 탐험가 헨리 허드슨을 고용했다. 그는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거대한 만 쪽으로 배를 몰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중국으로 이어지는 강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 것을 꿈꾸며, 바다에서 강 상류로 150마일가량 거슬러 올랐다. 하지만 그곳에 중국은 없었다. 동양의 보물에 도달하는 더 빠른 길을 찾던 허드슨이 우연히 세계적인 규모의 자연 항구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맨해튼은 스태이튼 아일랜드와 롱아일랜드 덕에 바다의 분노를 피할 수 있고 대륙으로 이어지는 770마일 길이의 물길을 가진 지리적 보석이었다. 1650년 네덜란드 연대기 작가 아드리안 반 더 도크의 말처럼 이곳은 "1000척의 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안전하고 편리한 안식처"이자, 신대륙의 미개발 자원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에 대한 놀라운 접근성(그리고 바다로부터 안전함)과 내륙으로 통하는 물길 때문에 맨해튼에 정착했다

뉴욕 역사학회 회장인 루이스 미러 박사는 "뉴욕의 항구는 다른 어떤 곳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며 "넓고 깊어서 거의 얼지 않으며, 허드슨강과 이스트강이 모이는 곳으로 물자 운송의 연결점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 엄청난 상업적 잠재력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에 매료됐다. 화물을 장거리로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해상 운송이었던 당시,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을 장악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됐다. 그 때문에 맨해튼은 미국의 다른 초기 정착지와 다른 출발점을 갖게 됐다. 보스턴을 세운 청교도, 필라델피아에 온 퀘이커교도, 메릴랜드에 도착한 가톨릭교도들과 달리, 네덜란드인들의 맨해튼 정착 이유는 종교가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주립대 역사학자인 그레첸 소린 박사는 "네덜란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헌납된 식민지를 만들었다"며 "그들은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상업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개방적 태도를 취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이다. 한 문서에 따르면, 1646년 뉴욕에는 "18종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민족 400~5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쇼토는 "맨해튼은 유럽인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문화의 교차로였다"고 말했다. "레나페 부족뿐만 아니라, 항구와 강을 이용하기 위해 온 시네콕 부족과 다른 알곤퀸 원주민들도 이곳에서 어업 활동을 하고 물품을 교환했습니다."

네덜란드는 1626년 레나페 부족으로부터 "언덕이 많은 섬"이라는 이름의 맨나하타를 매입했다. 이후 점점 더 많은 사업가가 내륙에서 가져온 비버 가죽과 담배, 곡물을 유럽으로 운송하기 위해 이곳 항구를 찾았다. 네덜란드는 1640년에 이 정착지를 자유무역지대로 선포했고, 1664년에는 영국이 이곳에 방어 기지를 세우고 이 지역에 요크 공작의 이름을 붙였다. 이 항구 지역에 종교적 관용과 개인주의, 기업의 씨앗이 파종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훗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영국은 네덜란드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해양 제국이 됐고, 맨해튼은 전 세계 상품과 사람들의 연결점이 됐다. 통을 만드는 사람과 대장장이, 돛 제작자, 조선업자들이 이 섬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770년대 뉴욕은 영국으로 밀과 목재를 운송하고 카리브해와 아프리카에서 럼주와 당밀, 설탕은 물론 노예를 수입하는 '대서양의 곡창지대'였다. 비록 미국 독립 혁명 말기에 뉴욕이 화마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뉴욕은 서반구 최대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물 덕분이었다.

1795년 뉴욕은 필라델피아를 제치고 미국의 주요 항구로 떠올랐다. 전 세계에서 더 많은 배가 드나들면서 도시는 맨해튼 남쪽 끝에서 북쪽으로 빠르게 확장됐다. 그 사이 낡은 네덜란드 농장과 영국인 영지는 점점 더 작은 구획으로 쪼개어졌다. 그러던 중 역사상 가장 위대한 또는 최악의 뉴욕 주민으로 꼽히는 드윗 클린턴이 맨해튼을 영원히 바꿔놓은 계획을 이끌게 됐다.

첫 번째 계획은 항구의 성장세를 수용하기 위해 섬의 자연 지형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1811년에 채택된 이 계획은 습지를 메우고, 샘물이 나오는 연못을 덮고, 늑대와 곰이 돌아다니던 참나무와 독미나리 숲을 평지로 만들었다. 그렇게 "언덕이 많은 섬"은 직사각형 구획으로 나뉜 섬이 되었다.

두 번째 계획은 허드슨강과 오대호를 잇는 363마일 길이의 수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825년 이리 운하 개통으로, 맨해튼은 중서부 지역과 직접 수로를 연결된 산업의 거점이 됐다. 또한 상품과 아이디어, 사람을 전국으로 대량 이동시키면서, 젊은 미국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 도시는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이자 미국 대륙과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맨해튼이 산업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비즈니스 중심지가 되자, 더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1860년에는 뉴욕시 거주 성인의 거의 70%가 미국 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불웨어는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맨해튼 항공사진을 보면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일 정도로, 부두가 이곳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말했다. "부두에는 화물을 싣고 내리기 위해 전 세계에서 배들이 몰려들었고, 많은 기업가가 5달러를 투자해 6달러를 벌기 위해 창의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초기 뉴욕의 분주함을 보여주는 모습이죠. 이것이 바로 뉴욕의 DNA이며, 항구와 물은 그 핵심입니다."

1950년대 들어 비행기가 해상 운송을 대체하고 컨테이너선이 뉴저지로 우회하면서, 맨해튼 해상 운송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부두는 쇠락하고, 창고는 버려졌다. 네덜란드인들이 왔던 당시 엄청나게 다양하고 역동적이었던 뉴욕항이 사실상 쓰레기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도시의 물길 정화에 수십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여러 가지 야심찬 프로젝트를 통해 맨해튼의 낡은 부두는 녹지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버려졌던 수변 지역은 도시 재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그 결과 허드슨호 선원들이 섬에 접근하자 레나페 부족이 "거대한 카누"로 맞았던 그 시절로부터 4세기가 넘은 지금, 맨해튼은 물과 함께하던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카약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여행지가 됐다.

카약으로 맨해튼 주변을 약 30마일 정도 돌아보는 카약 여행을 제공하는 '맨해튼 카약'의 매니징 파트너인 수지 바수는 "이런 곳은 미국에서 여기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맨해튼이 섬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웅장한 인공 산맥을 강에서 바라보면 도시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카약으로 맨해튼 돌아보기

84번 부두에서 카약을 타고 허드슨강의 빠른 조류 흐름 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맨해튼의 물길을 이동하는 비결을 깨닫게 되었다. 섬의 원주민들이 오래전에 깨달았던 비결, 즉 조류를 이해해야만 물길을 이동할 수 있었다.

허드슨강의 알곤퀸어 이름은 "마히칸턱"(두 가지 방식으로 흐르는 강)이었다. 맨해튼의 반대쪽 끝을 흐르는 이스트강(실제로는 강이 아니라 조수 해협)과 마찬가지로, 허드슨강도 몇 시간마다 물살 방향을 바꾸며 바다를 드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14명의 카약 탑승자와 4명 패들보더로 구성된 우리는 강의 변화하는 조류를 이용할 수 있게 짜여진 경로를 따라 섬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무전기를 든 세 명의 가이드는 페리와 바지선, 관광 크루즈 사이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안내해 주었다. 가이드 중 한 명은 맨해튼 카약의 창업자이자 이 섬을 80~100회 정도 일주했다는 64세의 에릭 스틸러였다. 그는 1980년대에는 카약을 탈 수 있는 곳이 없어서 허드슨강 울타리를 뛰어넘어 썩은 부두에서 접이식 카약을 띄워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무용담이 입소문을 타자, 돈을 낼 테니 아무나 갈 수 없는 강을 안내해 달라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멀리 크라이슬러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향해 노를 저으며 "자신의 첫 번째 유료 고객은 (미국 가수) 데이비드 리 로스였고, 곧이어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그 뒤를 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에서) 카약을 타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엘리스섬으로 노를 저어 가곤 했어요. 그게 이 카약 여행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 '뉴욕시 워터 트레일'은 160제곱마일 길이의 항해 가능한 물길에 카약 여행 경로와 수십 개의 카약 출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맨해튼에 새로 문을 연 여러 보트 하우스에서는 무료로 카약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맨해튼의 서쪽 해안을 따라 이어진 550에이커 규모의 허드슨강 공원을 옆에 끼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맨해튼이 최근에 되살린 부두 공원이 보였다. 1998년 개장 이후 맨해튼의 과거 모습과 400년 전 이곳에서 번성했던 토착 생태계를 복원하려 노력해온 공원이다. 이곳에서는 한때 도시의 성장을 촉진한 뒤 쇠락한 부두가 점차 도시의 창조적인 오아시스로 변모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2021년 개장한 수상 공원, '리틀 아일랜드'를 지나쳤다. 튤립 모양의 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만든 이 공원에 2억6000만달러가 들어갔다고 한다. 맨해튼과 영국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던 '쿠나드 라인' 부두(1912년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이 상륙한 부두의 옆 부두이기도 하다)에 만들어진 이 공원에는 350종의 꽃과 나무, 관목 등 맨나하타의 초기 주민들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식물들이 있다.

공원을 지나친 우리는 소설가 허먼 멜빌이 '모비딕'을 집필한 후 부두에서 세관 검사관으로 일했던 '간세부르트 페닌슐라'를 지났다. 2023년에 개장한 이 공원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했을 때 섬의 서쪽 수변 지역을 따라 이어졌던 습지와 토종 풀, 1200톤 규모의 모래 수변이 복원됐다.

지금 맨해튼의 상업용 부두에는 2억6000만달러를 투자해 만든 수상 공원 리틀 아일랜드가 솟아 있다

우리는 다시 노를 저었다. 트리베카에 있는 "생태학적 테마"를 내세운 2.5에이커 규모의 26번 부두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는 새로 조성한 삼림 숲과 해안 초지, 해양 관목이 강 본연의 서식지를 모방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2024년 1월에는 유럽 식민지가 되기 전 허드슨강에서 번성했던 어류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놀이터 "에스투아리움"이 문을 열었다. 내가 강을 따라 노를 저을 때도 아이들이 이곳에서 거대한 대서양 철갑상어 조형물에 올라타 놀고 있었다.

맨해튼 반대편에서도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스트 미드타운 워터프론트 프로젝트'는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2026년에 맨해튼 주변을 수상 공간으로 연결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했던 맨해튼의 남쪽 끝에 다다랐을 때, 스틸러가 갑자기 "멈춰요!"라고 말했다. 4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 물길은 맨해튼에서 가장 분주한 곳으로 꼽힌다. 주변에서 배와 바지선이 요란하게 지나가는 가운데, 스틸러는 자신이 신호를 보내면 정확히 10분 안에 섬의 남쪽 지점을 돌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오른편에서 자유의 여신상과 엘리스섬, 왼편에서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발견하고 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가이드 중 한 명인 토미 몽고메리는 "사진은 헬 게이트에 도착하기 전에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뭘 하기 전이라고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스틸러가 "지금, 지금, 지금!"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힘차게 수로를 가로질러 이스트강의 찰랑거리는 조류를 타고 11노트의 속도로 북쪽으로 이동했다. 역사적인 '사우스 스트리트 항구'에 정박해 있는 19세기 마지막 화물선을 지나치고 브루클린과 맨해튼, 윌리엄스버그 다리 아래를 지나갔다. 중간에 주위를 둘러보니 어린이들이 '이스트 리버 그린웨이'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루스벨트 섬의 북쪽 끝에 가까워질 때쯤, 몽고메리가 말했다.

"여기가 바로 헬 게이트입니다. 왼쪽으로 붙어서 열심히 노를 저으세요."

네덜란드인(헬레 가트)이 만들었고 뉴욕의 물길 중 가장 악명 높은 곳으로 알려진 헬 게이트는 할렘강과 이스트강이 만나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이 해협을 통과하면 뉴욕항에서 뉴 잉글랜드까지 항해하는 상인들이 며칠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해협 통과를 시도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해서 1850년대에는 연간 약 1000척의 배가 이곳에서 좌초했다고 한다. 그래서 1885년 맨해튼의 해상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 관계자들은 이 위험한 물길을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미 육군 공병대를 동원해 30만파운드의 폭약으로 암반을 폭파했다.

스틸러가 나중에 나에게 말했듯이 지금도 이 합류 지점은 "소용돌이 속에서 노를 젓는" 것처럼 아찔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행히 이날은 물살이 온순해서, 우리는 쉽게 랜달스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맨해튼의 자연 지형을 포장할 때 계획 입안자들이 고려하지 않았던 요소는 카약을 타다 쉴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카약을 댈 곳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랜달스 섬의 바위 해변이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다. 이곳에서 우리는 에너지바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함께 한 17명 중 11명이 여성이었는데, 단 한 명만이 처음 맨해튼 카약 일주를 해본다고 했다. 맨해튼 카약에서 너무 자주 카약을 타다 보니, 지금은 보트하우스에 카약을 보관하고 있다는 닉 아브루틴. 카약을 여러 번 타다가 이번에 스탠드업 패들보드로 첫 일주에 도전했다는 스테이시 헐. 매년 여름 이탈리아 토리노의 집에서 뉴욕으로 와서 섬을 한 바퀴 돈다는 지안 도메니카 베키오처럼 대부분 맨해튼 카약 여행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에바 리블린은 수변으로 떠밀려온 게를 보며 "물 위에서는 도시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수변 지역은 놀라우면서도 다양한 생태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시의 규모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이루는 조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떤 가족이 근처에서 물로 뛰어들었다. 시 관계자들은 수십 년간의 방치와 남용(그리고 450억달러 이상의 복구 노력)을 통해 뉴욕의 수로가 남북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건강해졌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허드슨강에서 수영하는 것이 보통은 안전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날 오후에도 나는 강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리블린은 강 건너편에 매년 수십억 갤런의 하수를 도시의 수로에 버리는 700개의 하수구 중 하나와 레나페 부족를 지탱하고 네덜란드에 영양을 공급했던 22만 에이커의 굴 암초를 복원하는 목표를 가진 '빌리언 오이스터 프로젝트'가 사들인 녹슨 부두를 가리켰다.

리블린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의 물이 더럽고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며 "여전히 깨끗하지는 않지만 지난 15~20년 동안 비약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13개의 다리를 더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원시적인 과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섬의 북쪽 끝, 인우드 힐 공원에 도착했다. 수천 년 동안 섬의 원주민들이 사용했다는 동굴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또한 4세기 전 레나페 부족이 네덜란드에 섬을 팔았다고 알려진 장소를 표시한 1000년 된 바위도 이곳에 있다.

왜가리가 갈대숲 사이로 사라지자,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도시의 차량과 헬리콥터가 만드는 소음에 밀려났다. 그 소음과 함께 내 눈앞에 잠시 펼쳐졌었던 과거의 맨나하타도 사라졌다.

허드슨강의 물살이 미드타운의 고층 빌딩이 있는 남쪽으로 향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나는 '지난 400년 동안 이 섬이 너무나 많이 변했지만 자연의 한 부분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관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맨해튼을 안내해 주었다.

*엘리엇 스타인은 BBC 트래블의 저널리스트이자 에디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