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오픈 코트 위, 다시 한 번 여제(女帝)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안세영(삼성생명)이 또 한 번 일을 냈다. 덴마크오픈을 우승한 지 고작 사흘, 그 짧은 휴식 사이에도 그녀의 컨디션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세계 배드민턴 여자단식 1위의 클래스는, ‘피로’조차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하듯이.

23일(한국시간), 프랑스 세숑세비녜에서 열린 2025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750 프랑스오픈 16강전. 안세영은 덴마크의 미아 블리크펠트(세계 20위)를 2-0(21-11, 21-8)으로 제압하며 여유 있게 8강에 올랐다. 경기는 단 37분 만에 끝났다. 긴장감도,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완벽한 통제’였다. 상대는 직전 대회인 덴마크오픈에서 안세영의 오랜 숙적 천위페이(중국·세계 5위)를 꺾으며 이변을 일으켰던 선수였다. 그러나 안세영 앞에서는 그 기세조차 힘을 잃었다.
1게임 초반부터 안세영은 특유의 빠른 풋워크와 짧은 스텝으로 블리크펠트를 코트 구석구석 몰아붙였다. 상대가 오른쪽으로 한 발 늦게 움직이는 순간, 이미 셔틀콕은 반대편 코너에 떨어졌다. 11-5로 리드를 잡은 뒤 16-7까지 벌리자 경기는 사실상 끝났다. 4점을 연속으로 내줬지만, 다시 네 번의 랠리를 모두 가져오며 21-11로 마무리했다. 2게임은 더 압도적이었다. 시작부터 7-1, 14-4, 그리고 21-8. 안세영은 라켓을 휘두르기보단 ‘그림을 그렸다’. 스매시보다 코스를 읽는 능력, 체력보다 리듬을 유지하는 집중력이 그를 ‘배드민턴 여왕’으로 만들었다.

이 승리로 안세영은 올해 국제대회 60승째를 기록했다. 패배는 단 4번. 승률 93.75%. 이 수치는 단순한 성적표가 아니다. 시즌 내내 그녀가 얼마나 꾸준하고 완벽하게 경기를 운영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올 한 해 안세영은 13개의 국제대회에 출전해 말레이시아오픈, 인도오픈,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 일본오픈, 중국 마스터스, 덴마크오픈 등 총 8개의 타이틀을 품었다. 이번 프랑스오픈까지 우승하면, 한 시즌 9관왕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더 대단한 건 그 여정의 ‘밀도’다. 덴마크에서 왕즈이(세계 2위)를 2-0(21-5, 24-22)으로 꺾은 지 고작 사흘 만에, 다시 750급 대회에서 같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전 세계 상위 랭커들조차 2주 연속 대회를 소화하면 피로 누적으로 경기력이 떨어지는데, 안세영은 오히려 더 예리해졌다. 프랑스오픈 첫 두 경기 모두 30분대에 끝냈다. 32강전 36분, 16강전 37분. 그녀는 이미 “인간계의 기록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이번 프랑스오픈은 결코 쉬운 무대가 아니다. 8강에서 안세영은 중국의 가오팡제(세계 14위)와 맞붙는다. 통산 전적은 5전 전승. 수치로만 보면 격차가 크지만, 가오팡제는 네트 앞 감각이 좋고 코스 운영이 날카로운 선수다. 그러나 안세영은 상대가 어떤 패턴으로 나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녀의 플레이에는 ‘흐름의 단절’이 없다. 항상 같은 리듬, 같은 자세로 셔틀을 맞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숨겨둔 스매시를 날린다. 폭발적이지 않지만, 계산된 정확도. 그것이 안세영의 무기다.
사실 안세영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늘 침착하고, 표정엔 여유가 있다. 셔틀을 받으러 뛰어갈 때도, 점수를 내고 돌아설 때도 속도는 일정하다. 상대가 한 점을 따내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곧바로 다음 포인트를 준비한다. 그런 루틴이 그녀의 경기력의 중심이다. 일관된 루틴은 흔들리지 않는 멘탈을 만든다. 안세영이 올해 단 한 번도 2경기 연속 패배한 적이 없는 이유다.
중국 언론에서는 “이젠 천위페이보다 안세영이 더 무섭다”는 분석이 나왔다. 천위페이는 여전히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선수지만, 안세영은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에서 한 단계 위에 있다. 왕즈이, 한웨 등 중국의 톱랭커들이 모두 안세영에게 고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리듬 싸움’이다. 상대가 강한 스매시를 날려도, 그녀는 그 스매시의 속도에 리듬을 맞추지 않는다. 항상 자기 템포를 유지한 채 맞받아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공에서 흐름을 바꾼다.

프랑스오픈의 남은 일정은 안세영에게 새로운 기록을 향한 기회다. 만약 우승한다면, 슈퍼 750급 대회를 한 시즌에 5번 제패하는 최초의 여자 선수로 남게 된다. 이미 1000급 대회 세 개(말레이시아·전영·인도네시아)에서 모두 우승한 그녀가 ‘750 트리플 크라운’을 더한다면, 올해는 완벽한 시즌으로 남을 것이다. 배드민턴계에서는 “이제 안세영의 라이벌은 선수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정작 안세영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덴마크오픈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도 “우승을 하더라도 다음 경기는 새 경기로 본다. 질 때도 있지만, 지면서 배우는 것도 많다”고 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에는 베테랑의 냉정함이 담겨 있다. 실제로 안세영의 경기력은 ‘감정의 파동’이 없다. 기뻐할 때도, 아쉬워할 때도,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팬들은 그런 모습에 ‘배드민턴계의 김연아’라고 부른다.
안세영이 만들어 가는 이 시즌은 이미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도 드물게 완벽한 기록이다. 체력, 멘탈, 기술, 루틴 — 그 어느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덴마크오픈과 프랑스오픈을 연달아 치르면서 보여주는 체력과 집중력은 세계랭킹 1위의 무게를 스스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안세영은 또다시 중국과의 ‘숙명의 승부’에 나선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음 세대에게 말하고 있다. “이게 세계 1위의 배드민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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