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사다난했던 2025년이 가고 2026년이 밝았다. 벌써. 그라운드의 시간은 참 빠르다. 체감상으로는 ‘시작과 함께’ 끝이다.
스프링 캠프가 시작되면 사실 시즌이 시작된 셈이다. 경쟁의 시간이 전개된 뒤 시범경기에 이어 개막전이 열린다.
기다렸다는 듯 찾아오는 봄, 이내 뜨거운 여름이 찾아오고 한 경기 한 경기 간절한 가을을 맞게 된다. 그리고 결승선이 다가온다. 모두가 웃을 수 없는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또 봄이 오고 그라운드는 정신없이 달려간다. 시작은 끝이고, 끝은 시작이다.
새해 첫날 어떤 이야기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2025시즌 마무리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기로 했다.
지난 8월 박정우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박정우의 자랑에서 시작됐던 대화였다.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보여주던 글러브. 글러브에 담긴 사연과 의미를 칼럼으로 준비했지만, 박정우가 논란의 중심에 서고 말았다.
박정우는 8월 22일 LG와의 홈경기에서 아쉬운 주루사로 원치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SNS에서 팬과 설전을 벌이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고, 이 경기를 끝으로 박정우는 지난 시즌 팬들 앞에 서지 못했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외야가 ‘기회의 땅’이 됐지만 박정우는 자신의 잘못으로 그라운드에서 벗어나 있어야 했다.
마무리하지 못했던 칼럼. 그 이야기를 2026시즌 첫 주제로 선택했다.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끝인 그라운드.
박정우에게 새로운 시작이길 바라며, 또 프로야구 선수들이 그라운드의 소중함을 알고 2026시즌을 준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2025년 8월 이야기를 담았다.
프로야구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시작됐다.
출범 44돌(해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45돌이다) 동심을 파괴하는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꿈과 희망은 대를 이어 그라운드를 지탱하고 있다.
누군가를 보면서 꿈을 키웠던 이가 또 다른 누군가의 꿈과 희망이 되면서 프로야구는 그렇게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KIA 타이거즈 선수가 된 역삼초 박정우 어린이의 ‘꿈’에는 두산 베어스 정수빈이 있다. 그가 살면서 처음 만나 본 프로야구 선수가 정수빈이었다.
박정우는 “어렸을 때 원래 이종욱 코치님을 좋아했었다. 마구마구 아이디가 ‘터보 엔진 이종욱’이었다. 잠실 외야가 싸니까 야구장을 가면 외야로 갔었다. 그때 팬이었다”며 “초등학교 때 두산베어스기 대회를 했다. 거기서 처음 만난 선수가 정수빈 선배님이다. 그때 4등을 해서 시상식 같은 게 있었는데 김현수 선배님이랑 정수빈 선배님이 악수를 해주셨다. ‘이건 사랑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때부터 계속 좋아했다”고 웃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박정우에게 정수빈은 딱 어울리는 롤모델이기도 했다. 큰 체격은 아니지만 빠른 발로 외야와 루상을 누비면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선수.
그렇게 정수빈 바라기가 된 박정우는 언북중-덕수고를 거쳐 2017 신인드래프트에서 KIA의 2차 7라운드 64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이뤘다.
박정우가 프로 생활을 시작한 2017년 정수빈은 경찰청야구단 소속이었다. 박정우는 퓨처스리그에서 1군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만큼 선수와 선수로 정수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박정우는 “신인 때 선배님이 경찰청에 계셨다. 그때 롤모델이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올 시즌 1군에서 봐서 또 한번 롤모델이라고 말을 했다. 글러브를 하나 주겠다고 하셨다”며 “이후에 잠실 원정이 있었는데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서 못 갔었다.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글러브를 주셨다. 훈련 나가려고 하는데 직접 오셔서 주셨다. 글러브 한번 껴보고 조언도 해주셨다. 길들여진 글러브를 주셨는데 그동안 쓰던 스타일과는 달랐다. 클리닝 타임 때 캐치볼 하는데 나와서 쓸만하냐고 물어보시기도 했다”고 웃었다.
정수빈을 보면서 프로 야구 선수의 꿈을 꾸던 박정우에게는 잊지 못할 선물이 됐다.
박정우는 애지중지 글러브를 들고 다니면서 보는 이들에게 자랑을 했다.
1군에서 뛰는 선수가 됐지만 박정우에게 정수빈은 여전히 꿈이고 추억이고 희망인 것이다.
롤모델은 글러브 선물만 준 것은 아니었다. 정수빈은 박정우가 가야 할 길을 눈 앞에서 보여줬다.
KIA는 앞선 두산 원정에서 싹쓸이 3연패를 당했다. 삼성과의 주중 3연전에서 홈런쇼를 펼치면서 스윕승을 기록했던 만큼 기대감을 가지고 임했던 주말 3연전이었지만 결과는 악몽 같았다.
두 경기 연속 두산의 끝내기 순간을 지켜봐야 했던 KIA는 역전패로 스윕패를 당했다.
15일 경기에서 KIA는 4연승을 바로 눈앞에 두기는 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승부 끝에 5-4에서 KIA가 9회말 수비에 돌입했다. 마무리 정해영이 나와 첫 타자 김민석을 4구째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다.
대타 김인태에게 우전 안타는 맞았지만 정수빈의 2루 땅볼이 나오자 KIA가 선행주자를 처리하고 투아웃을 만들었다.
정수빈이 타석에서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발로 타격 아쉬움을 만회했다.
도루로 2루를 훔치면서 KIA 배터리를 흔든 정수빈은 폭투가 나온 사이 3루로 내달렸다. 이때 다급해진 포수 한준수의 송구 실책이 나오면서, 주자를 보내는 데 실패했던 정수빈은 대신 홈에 들어와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 경기는 연장 11회 승부 끝에 안재석의 끝내기 홈런과 함께 두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16일 경기를 돌아봤을 때도 정수빈의 잔상이 남는다.
1-2로 뒤진 9회초 KIA가 승부를 뒤집었다. 위즈덤이 1사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면서 2-2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어 나성범의 볼넷에 이은 폭투로 만들어진 2사 2루, 김태군이 펜스 때리는 2루타로 리드를 가져왔다.
그리고 고종욱이 타석에 섰다. 이교훈의 3구째 슬라이더에 고종욱이 반응했고 그대로 공이 좌중간을 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견수 정수빈이 어느샌가 달려와 적시타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으로 바꿨다.
1점의 리드를 안고 시작한 9회말, 이번에는 두산 김인태의 끝내기 안타가 나왔다.
KIA 입장에서는 ‘고종욱의 타구가 빠졌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경기가 됐다.
15·16일 두 경기 연속 끝내기 패를 기록한 KIA는 17일에도 1-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8회말 역전을 허용하면서 스윕패를 당했다.
박정우는 “정말 그 경기들을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며 “우리팀 (김)호령이 형이 수비하는 것하고 수빈이 형 수비하는 것을 같이 보는데 살벌했다. 둘 다 너무 좋은 수비 능력과 어깨를 가지고 있다. 수빈이 형은 공을 빼는 게 엄청 빠르다. 정확도까지 있어서 반했다. 볼 때마다 반한다. 볼 때마다 새롭다. 나도 좋은 플레이로 수빈이 형이 친 걸 잡고 싶다”고 말했다.
또 “주루에서도 상대를 신경 쓰이게 하면서 집중 못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1루에서도 스킵하는 것이랑 뛰는 것 보면 배울 게 엄청 많다”고 덧붙였다.
박정우는 지난 시즌 햄스트링 부상으로도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다. 속상함에 애를 태웠지만 그렇다고 후회를 남기는 플레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
박정우는 “부상 당하면 속상하다. 속상한 마음에 야구도 못 본다. 그런데 후회 없이 하는 것이다. 안 다치면 좋겠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그래도 후회는 없는 것이다. 어설프게 하다가 다치는 것보다는 120%를 쏟는 게 낫다”고 말했다.
운 좋게도 2024년 한국시리즈 멤버가 됐고, 2025년에는 개막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경험을 통해 외야에서 어느 정도 계산이 되는 선수도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갈림길에 선, 고민 많은 선수다.
‘초구’도 그의 고민.
박정우는 “확률적으로 초구가 (공격 성공 확률이) 높다고 하는 데 특히 나한테는 초구에 더 치기 좋은 볼이 온다. 상대한테는 빨리 잡아야 하는 타자일 것이니까 그냥 한 가운데 보고 던진다. 그걸 노리고 안타가 되면 감사한데, 아니면 눈치가 보인다. 야구가 결과론이라 어렵다”고 말했다.
확률을 생각하면서 초구를 선택하지만 사실 그는 오랜 시간 타석에 서고 싶다. 응원가는 박정우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박정우는 “응원가를 들으면 살짝 울컥한다. 등장곡 가사도 그렇고 내 노래 같은 스타일이라 일부러 등장곡 들으려고 타석에 좀 늦게 들어간다. (웃음). 주로 수비로 나가거나 대주자로 나가니까 그럴 때는 응원가를 못 듣는다. 8,9회에 많이 나가는데 그때는 팀응원가를 부르는 때다. 그래서 내 응원가를 많이 못 듣는다”고 웃었다.
자신의 응원가 원곡을 들으면서 출근하는 것을 루틴으로 하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
한 타석의 소중함, 팬들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지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박정우는 소중했던 것과 잠시 작별을 해야 했다.
지나가 버린 순간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 그래도 만회는 할 수 있다. 어느 해보다 더 간절함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을 박정우.
“한 경기, 한 타석, 공 하나 진짜 간절해요. 타석에서도 삼진 먹을 바에는 맞고 나간다고 생각해요. 못하면 내려간다는 생각으로 해요. 외야에서 공을 놓칠 수가 없어요. 내 생명이다, 벼랑 끝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해요.”
프로 세계가 간절함 만으로도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간절함 없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
‘진짜’ 간절함을 배웠을 박정우. 정수빈을 보고 꿈을 꾸고 이룬 것처럼, 그도 누군가의 꿈이 되어야 한다. 프로야구 선수들, 꿈과 희망의 이름이어야 한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