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하는 ‘韓 자체 핵무장론’… 짙어지는 박정희 시대 핵개발 향수
미군 철수계획에 반발…포기 후 비밀리 재추진도

한국 정부는 그러나 50년전 핵무기 자체 개발을 실제로 시도한 바 있다. 국제사회와 미국의 압박에 결국 포기했지만, 최근의 불안한 한반도 안보 상황과 맞물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고 있다.
◆50년전 핵개발 흔적을 찾아···1972년 첫 보고에서 1975년 재처리시설 설계도까지

1970년대 중반 원자력연구소에서 핵연료 재처리 사업담당 실무책임자였던 김철 아주대 명예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재처리 시설 개념설계서와 기본설계도면이었다. 이 설계도는 박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 자료였던 까닭에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직접적인 계기는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자극을 받아서다.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등 미국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하면서 심한 배신감과 함께 자주국방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을 받고,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했다.
그러나 1970년 7월 윌리엄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명 철수를 통고했다. 한 달뒤 닉슨 대통령 특사로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한했다. 처음에는 ‘2만명 이상 철군은 없을 것’이라는 상호 합의 하에 원만하게 협상이 진행됐지만, “향후 5년 이내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애그뉴 부통령의 언급이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는 핵 개발을 본격 추진을 결심했다.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하자 미국의 압박도 강화됐다. 한·미 관계는 갈등으로 치솟았다. 미국은 안보지원 중단을 경고하고, 핵 개발을 시도할 경우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경고하며 압박 강도를 높였다. 특히 인도의 1974년 핵무기 실험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 정부의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데 큰 계기가 됐다. 미국의 계속되는 압박에 1975년 핵개발 포기를 공식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1976년 재처리 기술 및 시설 도입 사업을 ‘화학처리 대체사업’이라고 명칭을 바꿔 기술 도입을 계속 추진했다. 연구용 원자로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핵무기 투발수단인 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8년 9월 사거리 180km의 백곰 시험 발사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과 뒤이어 일어난 12.12 쿠데타로 핵무기 프로젝트는 중단됐다.
이우승 기자 ws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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