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성이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한다.
일본 도쿄 시리즈를 앞둔 다저스는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며칠 전 로스터 관련 발표를 했다. 로버츠 감독은 김혜성이 일본에 동행하지 않고 미국에 남는다는 말과 함께, 본토 개막전 로스터도 합류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애초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혜성은 포스팅 공시가 된 이후 한동안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마감시한이 다 돼서야 다저스와 계약 소식이 발표됐다. 예상치 못한 다저스행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우승팀 다저스의 일원이 된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미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하는 다저스에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했다. 보상이 큰 만큼 감수해야 할 리스크도 컸다.
희비
초반 상황은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다저스는 김혜성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디에고 카르타야를 40인 로스터에서 제외시켰다(Designate for Assignment). 카르타야는 2년 전만 해도 다저스 최고 유망주였다. 최고 유망주를 과감하게 포기한 결정은 현지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또한 다저스는 개빈 럭스까지 트레이드로 내보내면서 2루 자리를 비워뒀다. 이에 별다른 추가 영입이 없다면 김혜성이 2루수에 기용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저스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브랜든 곰스 단장을 비롯해 로버츠 감독은 김혜성을 여전히 내외야를 넘나드는 슈퍼 유틸리티(super-utility role)로 바라봤다. 2루 자리가 생겼다고 해서 김혜성을 2루에 고정하는 방침은 세우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혜성은 여러 포지션에서의 적응력을 높여야 했다. KBO리그에서 2루수를 중심으로 유격수와 외야수도 맡았지만, 메이저리그 수준에 미칠지는 미지수였다. 다저스가 아무리 김혜성의 운동 신경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도 적응 기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저스는 김혜성에게 타격폼 수정도 요구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좀 더 잘 상대할 수 있도록 방망이의 위치와 레그킥 등 전면 개조를 지시했다.
어색한 옷을 입었는데, 보기가 좋을 리 없었다. 김혜성은 첫 시범 경기에서 선발 2루수로 나와 볼넷 하나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유격수와 중견수를 번갈아가며 출장했다. 이 가운데 유격수로 가장 많이 나왔다.
김혜성 시범경기 포지션 출장
10경기 - 유격수 (39이닝)
5경기 - 2루수 (18이닝)
3경기 - 중견수 (10이닝)
*선발 출장 유격수(3경기) 2루수(2경기)
김혜성은 KBO리그 시절 익숙한 포지션에서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는 여기저기 오다니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유격수 실책을 범하면서 수비가 더 위축됐다. 여기에 설상가상 타격폼까지 바꾸다 보니 타석에서도 어정쩡했다. 이처럼 공수에서 과도기를 거치는 선수라면 누구라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문
김혜성은 2월 타격 성적을 14타수 1안타(.071) 2볼넷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3월 첫 경기에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정후와 만난 샌프란시스코전에서 시범 경기 첫 홈런을 터뜨렸다. 침체돼 있던 김혜성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한 방이었다.
실제로 홈런 이후 김혜성의 활약은 준수했다. 선발 출장한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냈고, 교체 출장한 경기에서도 2타점 적시타를 날렸다. 97마일 빠른 공을 안타로 연결시킨 것, 타구속도 100마일 안타를 만들어낸 것 역시 고무적이었다. 차츰 안정을 찾은 김혜성은 루상에서도 두 차례 도루와 공격적인 베이스런닝으로 팀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최근 분전에도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저스는 김혜성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제한된 환경에서 분투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김혜성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하위 레벨의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올 때는 당연히 더 발전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높은 수준의 선수와 대결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선진 시스템 속에서 보완한다. 이런 식으로 류현진과 강정호, 김하성이 성장했다.
그렇다고 해도 오자마자 모든 것을 뜯어 고치는 건 무리였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리그와 문화를 겪어야 하는 선수가, 평소 잘 맡지 않았던 수비 포지션을 소화함과 동시에 타격폼도 교정하는 건 너무 힘든 작업이다. 이 임무를 해낼 수 있는 선수가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만약 다저스가 초반에는 'KBO리그 김혜성'을 그대로 점검해봤다면 김혜성도 여러 측면에서 적응이 수월했을 것이다.
다저스의 사정도 이해는 된다. 다저스는 올해 당장 또 한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린다. 26인 로스터에 있는 선수는 이 지상 과제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김혜성이 변화하는 과정을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
멀티 포지션 소화는 다저스의 방침상 김혜성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 타격폼 교정이 좀 더 천천히 진행되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을까. 물론, 다저스가 김혜성의 능력을 높이 사서 한꺼번에 많은 주문을 했을 순 있다. 하지만 계약 규모(3년 1250만)를 보면 그 정도의 기대감을 엿볼 수는 없었다. 김혜성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겨준 건 분명했다.
의지
좌절하기는 이르다. 기회는 분명히 온다. 트리플A에서는 메이저리그보다 더 꾸준히 경기에 나올 것이다. 김혜성이 변화하는 과정에 서 있다면 메이저리그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보다, 마이너리그에서 경기를 직접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김혜성은 '오클라호마 시티 코메츠'로 편입된다. 작년에는 '베이스볼 클럽'으로 불렸는데, 올해 코메츠로 팀 이름을 변경했다. 도시 항공 우주 산업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오클라호마가 고향인 미키 맨틀의 별명 '혜성(The Commerce Comet)'을 기리는 차원이었다. 타자친화적인 퍼시픽코스트리그(PCL)에 속해 있기 때문에 타격 이점을 누릴 것이다.
김혜성이 마이너리그에 가면서 다저스는 선발 2루수를 토미 에드먼에게 맡길 것으로 보인다. 에드먼의 2루 수비는 2021년 골드글러브 수상으로 증명됐다.
에드먼은 지난해 정규시즌에서 부진했다. 부상 복귀 후 37경기 타율 .237, OPS 0.711에 그쳤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동안 챔피언십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등 맹활약했다(16경기 타율 .328, OPS 0.862). 수비와 주루에서도 활용도가 높은 에드먼은, 지난 겨울 5년 7400만 달러 연장 계약을 받았다. 덕분에 팀 내 입지가 굳건해졌다.
김혜성이 쟁취해야 할 유틸리티 옵션은 키케 에르난데스와 크리스 테일러, 미겔 로하스가 분담할 전망이다. 로하스를 제외한 두 선수는 내, 외야를 겸할 수 있는 자원들이다. 현재 기량으로는 테일러가 위태롭지만, 테일러는 받는 연봉(1300만) 때문에 웬만해서는 써야만 한다. 그만큼 메이저리그는 연봉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다저스의 선수층은 메이저리그만 두터운 게 아니다. 다저스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다. 뛰어난 육성 체계를 앞세워 유망주들을 모아놓은 팜도 비옥하다. <베이스볼아메리카>가 발표한 올해 팜 랭킹에서 전체 3위에 올랐다. 전체 TOP 100에 이름을 올린 유망주만 6명이다. 마이너 경쟁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다저스 유망주 전체 TOP 100 위치
1. 사사키 로키 / 우완
30. 달튼 러싱 / 포수 & 외야수
46. 알렉스 프리랜드 / 유격수
47. 호수에 데 폴라 / 외야수
51. 자이어 호프 / 외야수
82. 잭슨 페리스 / 좌완
가시밭길이 예고된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다른 팀으로 갔어야 했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야구에 만약이 없듯이,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다가올 미래를 바꾸는 준비를 해야 한다.
도전은 도전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도전의 끝이 항상 성공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가 조롱의 대상이 되어선 곤란하다. 그 시도와 노력마저 부정당하면 앞으로 도전할 수 있는 선수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스포츠 정신의 가치는 '불가능은 없다'는 데 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김혜성은 이제 막 본격적인 출발을 앞두고 있다.
김혜성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