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보면 오너의 인상이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경험, 한 번쯤 해 보신 적 있죠? 저의 선입견이지만, '미니'를 보면 낭만을 꿈꾸는 매력적인 여성 오너가, '랭글러'를 보면 호탕한 분위기의 마초맨이 연상됩니다. 왠지 뭘 해도 믿음이 가는 회사 이름이 붙어서일까요? 이 차를 보면 항상 반듯하고 단정한 이미지의 유부남이 떠오르는데요. 삼성이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자동차이자, 등장과 동시에 시장 1위 쏘나타를 위협했던 차, 이번 시간에는 르노 삼성 'SM5'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에야 삼성이 압도적인 국내 최고 기업이 된 지 오래지만, 이때만 해도 삼성은 현대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습니다. 삼성그룹은 당시에도 제조업 분야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회사였지만, 현대를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이것'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현대에게는 있지만, 삼성에게는 없는 것' 제조업의 꽃, '자동차'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자동차 사업은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은 뒤 탄력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시다시피 자동차 매니아로 알려진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인 취향에 반영된 것도 물론 있겠죠. 전기차 사업도 적극 추진해 그룹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갖추는 것이 목표였다고 전해지는데, 계획대로 됐다면 정말이지 볼만했겠네요.
하지만 오랜 기간 기술제휴를 통해 자동차 생산 및 개발 노하우를 갖고 있었던 경쟁사 특히, 독자개발 승용차까지 내놓은 현대차에 비해 자동차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던 삼성이 이 시장이 뛰어든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미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 해외업체에 기술 이전받으려 시도했으나, 끝내 무산됐던 전적이 있었고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던 경쟁사들의 방해 공작, 심지어 정치권에서조차 이를 반기지 않는 등 '어른들의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죠.
이런 우여곡절에도 당시 경영난에 빠져있던 '닛산'과 접촉해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했고 1995년, 드디어 '삼성자동차'를 출범했습니다. 또 2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입해 첨단설비를 갖춘 지금의 '부산 공장'을 지었죠. 이후 1998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삼성자동차 첫 번째 승용차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름부터 남달랐는데요. 당신 국산차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직관적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SM'은 '삼성모터스', 단순히 '삼성이 만든 자동차'를 뜻했고, 뒤에는 차급을 의미하는 숫자 '5'를 붙였죠. 여기에 추가로 이어진 숫자는 차에 탑재된 엔진의 성능을 나타냈어요.
외관은 베이스 모델인 '2세대 세피로'의 외형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닛산 디자인 특유의 날카로운 선을 부드럽게 다듬은 헤드램프와 그릴, 범퍼 디테일로 SM5만의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3박스 세단'의 정석과도 같은 수수한 모습에, 경쟁자를 압도하는 늘씬한 전장이 돋보였죠.
상위 트림인 'v6 모델'은 당시 고급 세단의 상징이었던 투톤 컬러와 전용 알루미늄 휠, 세로형 라디에이터 그릴, 보닛 위 '오너먼트 엠블럼'을 부착해 좀 더 고급스럽고 보수적인 분위기로 꾸며졌습니다. 조향에 따라 켜지는 '코너링 램프'와 좌우로 길게 이어진 '테일램프'도 이 6기통 모델만의 상징이었죠.
휠 볼트 개수도 경쟁자들이 모두 '4홀 규격'을 유지할 때 혼자 '5홀 규격'을 채택한 것도 나름 돋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주행 환경에서는 '4홀 규격'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어쨌거나 보기도 그렇고 '5호 규격'이 더 안정적으로 휠을 고정해 주는 건 사실이니까요.
실내 역시 외관의 수수하고 단정한 느낌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경쟁차 대비 전폭이 좁은 것이 약점이었지만, 수평 기조의 인테리어로 실제 수치보다 넓어 보이도록 유도해 이를 보완했죠. 당시만 해도 소형, 중형, 대형을 막론하고 운전자 중신의 실내 구성이 주류였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함으로 다가왔어요. 여기에 질 좋은 가죽시트, 손에 닿는 곳곳에 쿠션감이 있는 소재를 사용하고 적재적소에 우드그레인을 배치해 차급에 기대하는 포근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전달했습니다.
'삼성' 스펠링을 새겨 넣은 넓대대한 스티어링 휠은 불만이었지만, 후기형에는 '태풍의 눈' 로고와 함께 얄쌍한 디자인으로 변경돼 그나마 볼만해졌어요. 또, 전동 조절 시트, 공기청정기, 풀 오토 에어컨과 내비게이션 시스템 등 대형차 부럽지 않은 풍부한 편의사양을 탑재한 것도 좋았죠.
루프 보강재를 빽빽하게 설계한 탓에 경쟁자는 제공했던 선루프를 선택할 수 없었던 것도 독특한 부분이었습니다. 2001년에는 르노삼성 출범 1주년을 기념해 스웨이드 내장과 고출력 오디오 등 고급사양을 적용한 '에디시옹 스페시알' 즉, 스페셜 에디션을 8,400대 한정 판매하기도 했어요.
파워트레인 역시 닛산의 물건을 그대로 사용했는데요. 직렬 4기통 1.8/2.0L, v6 2.0/2.5L 가솔린에 나중에 추가된 2.0L LPG까지 지금 기준으로 봐도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했고, 변속기는 5단 수동 및 4단 자동변속기를 맞물렸어요. 시작과 동시에 다양한 차종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엔진 구성으로 라인업을 세분화해 경쟁사의 중형과 준대형급을 한 번에 공략하려는 전략이었죠.
4기통 1.8/2.0L 모델은 '쏘나타'를, 6기통 2.0/2.5L 모델은 '그랜저' 등 준대형차를 각각 겨냥했습니다. 특히 v6 엔진은 '세계 10대 엔진 시상식'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던 닛산에 'VQ 엔진'이 그대로 탑재되어 명성에 걸맞는 안정적인 주행 성능과 매력적인 회전 질감을 선사해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죠.
또,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백금 점화플러그'와 타이밍 벨트 대신, 반영구 '타이밍 체인' 방식을 사용해 정비 주기를 크게 늘린 것도 돋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낮은 대시보드와 상대적으로 높은 시트포지션으로 탁 트인 시야, 경쾌한 몸놀림으로 주행 편의성이 높았고, 후륜에는 토션빔 방식을 사용했지만 지금도 웬만한 분들은 모를 정도로 승차감에서의 불만도 크지 않았죠.
다만, 자동변속기 모델의 경우에는 저속에서 변속 충격이 심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경쟁차에 비해 연비가 나쁘다는 불만도 많이 나왔습니다. 'VQ' 이름이 붙은 엔진들은 배기량과 기통수를 막론하고 전부 먹성이 좋은 거 같아요.
이후 SM5는 단 두 차례, 램프와 휠 디자인, 내장 컬러 등 일부 내·외관 디테일과 편의사양을 개선하는 것에 그쳐, 한결같은 분위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경쟁차는 큰 폭의 페이스리프트를 거치거나 아예 신모델을 투입한 것과는 대조적이죠.
2003년 출시된 마지막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견고한 디자인의 알루미늄 휠, 헤드램프 앞부분을 둥글게 판 '눈물 램프', 타원형 그래픽을 집어넣은 리어램프로 세련미를 더했지만, 이 시기 팔리던 후기형 차들이 대부분 그렇듯 예매하게 세련된 분위기 때문에 '영타이머' 취급받는 클래식 SM5와 달리 그저 낡은 차로 여겨지기도 하는 모델이에요.
또 'SK텔레콤'과 공동 개발한 1-DIN 타입 텔레매틱스 시스템 '네이트 드라이브'가 선택사양으로 추가됐는데, 별도 요금제에 가입하면 내비게이션과 실시간 교통정보, 인터넷 검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후에 현대기아차가 서비스한 '모젠'과 유사한 독특한 옵션이었습니다. 시인성이 떨어지는 작은 화면으로 뭘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요. 당연하게도 선택 비율은 아주 낮아서 희귀 옵션이 되었습니다. 이때 애프터마켓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이걸 고를 이유가 전혀 없었죠. 가격이 싸지도 않았어요.
SM5는 출시 한 달 만에 무려 1만 2,000여 대에 달하는 계약을 달성하면서 그야말로 태풍 같은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회사의 첫 번째 자동차, 그리고 차급 자체도 만만치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어요. 그 뒤에는 지금도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로 꼽히는 '품질 마케팅'이 있었습니다.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라는 자신만만한 캐치프레이즈 아래, '2년, 4만km'가 주류였던 당시, '3년, 6만km'라는 넉넉한 신차 보증기간을 제공했고, 한 달 안에 문제 발생 시 아예 새 차로 바꿔준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어 품질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죠. 안전성을 어필하기 위해 전면부가 박살 난 SM5를 적나라하게 촬영한 무시무시한 TV 광고를 집행하기도 했어요.
다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죠. 국내 모든 기업의 운명을 뒤흔들어놓았다 'IMF 외환위기' 앞에서는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도 무사할 수 없었습니다. 누적 부채는 4조 원에 달했고, 닛산에 제공하는 '로열티'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차를 팔수록 손해를 본다는 보고서도 올라왔죠.
어마어마한 투자비와 그로 인한 적자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삼성은 결국, 울며 먹기로 자동차 사업부를 정리하기로 결정, 설비 값도 건지지 못할 정도의 헐값에 매몰로 내놨고, 다들 아시다시피 프랑스 르노 그룹에 매각되어 '르노삼성 자동차'로 새롭게 출범했습니다. 당시 르노는 닛산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닛산의 한국 공장이나 다름없었던 삼성차는 르노 입장에서도 꽤 괜찮은 매물이었죠.
이후 IMF가 해소되고 내수시장이 다시금 활기를 띠자 중형차 판매량도 자연스럽게 상승하게 됩니다. SM5의 품질 마케팅은 이때서야 제대로 빛을 발했죠. 해가 갈수록 헐거워지는 차체와 떨어지는 품질로 국산차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던 시기에 초기 오너들과 내구성을 중시하는 택시 업계에서 한결같은 품질을 자랑하는 SM5에 대한 긍정적인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누적 주행거리 100만km를 달성한 부산의 한 개인택시 기사님에게 차량을 기증받는 조건으로 르노삼성차가 SM5 신차를 제공하기도 하면서 '내구성' 하면 떠오르는 차로 등극했죠.
어릴 적부터 타던 우리 집 차가 너무나도 멀쩡하니, 성인이 되고 나서 물려받는 일도 흔하게 있었고, 가성비 좋은 중고차로 수많은 사회초년생의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또 '아연도금 강판'의 적용 비율을 높이고 '불소 도장'을 옵션으로 제공해 외부 부식에도 강했는데, 지금도 멀쩡한 외관으로 도로 위를 누비는 SM5가 심심찮게 보이는 것을 보면 내구성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죠. 동시대 팔렸던 'EF 쏘나타'나 '크레도스', '매그너스' 같은 차들을 찾아보기 힘든 것만 봐도요.
한편, 시간이 지나 서서히 드러나는 고질병도 있었죠. '파워 스티어링 호스'에서 오일이 새어 나오거나 부동액이 누수되어 엔진룸 주변부를 부식시키는 등 자잘한 고질병이 있고, 실내에서는 콘솔박스와 사이드 브레이크 레버의 가죽이 유난히 쉽게 벗겨지기도 했습니다.
이밖에 초기형의 경우, 아예 닛산의 부품을 조달에 만든 사실상 수입차였기 때문에 수리비가 동급 국산차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는 것도 흠이었죠. 그마저도 소규모 메이커였기 때문에 부품 수급이 상대적으로 원활하지 못했던 것도 단점이었습니다. 르노삼성 출범 이후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차츰 나아지긴 했지만요.
'1세대 SM5'는 삼성이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며 처음 선보이는 물건이었기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제품이었고, 삼성이 만들면 다르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소비자들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비록, 일본 제품을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수준이었지만,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담백한 디자인, 안정적인 품질과 뛰어난 내구성으로 높은 만족감을 선사했고, 1998년 출시 당시와 2000년 6월, 2003년 7월 잠깐이나마 쏘나타를 제압하고 국내 중형차 시장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출시 2년 만에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풍파를 겪었지만, SM5가 닦아놓은 브랜드 이미지는 이후 등장한 르노삼성에 신형 모델들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에도 훌륭한 마중물이 됐어요.
여담으로 SM5를 기반으로 만든 리무진 모델이 존재했는데요. 바로 'SM530L' 모델입니다. 이게 뭔가 싶지만, 당연히 정식 출시된 모델은 아니고, 삼성그룹 임원진용으로 소량만 특별 제작된 롱 휠베이스 모델입니다. 이름처럼 늘어난 차체를 위해 엔진 역시 v6 3.0L 엔진이 탑재되어 더 넉넉한 출력을 제공했고, 그 안에서도 단순히 10cm 정도 뒷좌석 길이만 늘린 임원용 모델과 20cm 가량 늘려 뒷좌석 독립형 시트와 최고급 내장재 뒷좌석 TV를 갖춘 'VIP용'으로 나뉘었다고 하네요.
삼성자동차 시절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도 홍보를 위해 업무용 차량으로 잠깐이나마 이용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앞서 100만km 택시가 전시된 부산공장 내 르노코리아 자동차 갤러리와 삼성화재 교통박물관 두 곳에 단아한 자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하니, 실물이 궁금하신 분들은 방문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 멜론머스크의 이용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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