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완생이 있을까요? 장그래의 미생은 계속됩니다”

서정민 기자 2024. 3. 3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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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미생’ 12년 만에 완결한 윤태호 작가
만화 ‘미생’을 12년 만에 완결한 윤태호 작가. 서정민 기자

미생.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 생소했던 바둑 용어를 이젠 모두가 알게 됐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큰 사랑을 받은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 때문이다.

지난 2월의 어느 날, 윤 작가는 집에서 아내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미생’ 시즌2 카카오웹툰 연재를 마치고서였다. 2012년 ‘미생’ 첫 화를 내보인 지 12년 만이다. “그동안 신세 진 분들에게 감사 문자를 보내며 그걸 안주 삼아 마셨죠.”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슈퍼코믹스 스튜디오에서 만난 윤 작가가 말했다. 지난 20일에는 출판만화 20·21권(더오리진)까지 완간됐다.

출판사의 제안이 시작이었다. 바둑의 고수가 직장인들에게 삶의 지혜와 처세술을 조언해주는 작품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바둑 고수가 생각하는 경지는 어떨지, 바둑 고수라 해서 삶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건지 등을 고민하다 3년을 끌었어요. 그러다 바둑에서 실패한 청년이 사회에 나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죠.”

웹툰 ‘미생’의 대표 장면. 윤태호 작가, 슈퍼코믹스 스튜디오 제공

어릴 적 바둑에 입문한 주인공 장그래는 프로기사 입단 문턱에서 좌절한 뒤 고졸 인턴 사원으로 대기업 계열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에 들어간다. 이젠 쓸모없다고 여기던 바둑의 수에서 뜻밖의 도움을 얻으며 역경을 헤쳐나간다. 1년6개월간 연재한 시즌1은 2014년 동명 드라마(tvN)로 만들어져 큰 화제를 모았다. 장그래(임시완)·오상식(이성민)·김동식(김대명)·안영이(강소라)·장백기(강하늘)·한석율(변요한)을 연기한 배우들도 급부상했다.

윤 작가는 2015년 시즌2 연재를 시작했다. 시즌1 중후반 때 시즌2 연재를 결심했다고 한다. “‘미생’을 그리면서 우리 사회에서 대기업 비중은 10%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나머지는 모두 중소·중견기업이죠. 대기업 얘기만 하면 치우친 이야기가 될 테고, 장그래가 대기업에 정착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라 생각해서 중소기업 얘기를 해보자 한 거죠.”

시즌2 배경은 원 인터내셔널을 나온 김부련 부장과 오상식 차장이 만든 중소기업 온길 인터내셔널이다. 여기에 장그래와 김동식 과장이 합류한다. “드라마는 기존 구성원들이 중소기업으로 다시 뭉치는 상황을 낭만적으로 보여주며 끝났어요. 하지만 이들은 당장의 생존부터 위협받는 게 현실이죠. 드라마에서 낭만화된 캐릭터를 원위치시키는 게 중요했어요. 그러다 보니 더 묵직한 이야기가 됐네요.”

웹툰 ‘미생’ 시즌2 장면. 장그래는 같은 회사 직원 조아영과 연애를 시작한다. 윤태호 작가, 슈퍼코믹스 스튜디오 제공

시즌1이 비정규직 장그래가 정규직으로 살아남으려는 이야기였다면, 시즌2는 “법인 자체가 생명체가 되어 살아남으려는” 이야기다. 중소기업에선 당장 다음달 월급을 임직원 전체가 걱정해야 하는 상황도 부지기수다. 윤 작가는 “코트라, 한국무역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등을 취재하면서 중소기업의 실상을 파악했다. 중소기업인들에게 해당 기관 서비스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관련 정보도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시즌2도 드라마로 볼 수 있을까? “드라마 계약 당시 시즌2도 같이 계약했어요. 하지만 연재 기간이 길어지고 그동안 배우들이 크게 성장하면서 스케줄 맞추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게 됐어요. 시즌2도 드라마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이네요.”

12년에 걸친 연재는 윤 작가에게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운동하다 오른팔 인대가 끊어져 3년간 휴재한 적도 있다. 지칠 때마다 힘이 돼준 건 독자들의 댓글이었다. “댓글 하나하나 모두 읽었어요. 가수가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면 없던 힘까지 나오는 것처럼 저도 댓글 보면 감격스러운 힘이 솟아요. 그 덕에 12년을 끌고 올 수 있었죠.”

만화 ‘미생’ 마지막 권인 21권. 어린 시절의 장그래와 지금의 장그래가 기원에서 마주한 장면을 표지에 담았다. 더오리진 제공

미생은 언제쯤 완생에 이를 수 있을까? “삶에 완생이 있을까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면 완생일까요? 구조조정, 명예퇴직, 정년퇴직…. 법인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삶은 영원한 미생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장그래의 미생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윤 작가는 시즌2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시즌3 작업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얘기는 아니다. 평행우주 속 또 다른 장그래가 바둑을 그만둔 뒤 다른 업종의 회사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어떤 업종인지는 비밀이란다. 올해 추석 지나 카카오웹툰 연재를 시작할 계획이다. 각 회차 틀이 되는 바둑 기보는 2016년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처음 이긴 네번째 대국이다. 당시 180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으니 만화도 180회차로 구성된다. 인공지능의 시대, 장그래는 또 어떤 묘수를 찾아낼까?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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