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9) 의병장들 배출한 호국서원 연경서원, 대구를 지식사회로 진입시킨 인재양성의 산실
1천335평 연경서원 부지, 10년째 방치
전통문화·인성체험·대구정신 가르쳐야


◆옛터 복원보다 인근에 중건, 대구정신 살려가야
당시 용역 최종보고서에서 '대구연경서원의 역사적 효시성, 교육적 상징성, 유물의 보존 및 관리의 필요성 등을 바탕으로 역사·문화·가치성 기반의 복원 당위성은 매우 높다"고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연경서원 시설이 언급된 기문, 문집 등을 총망라해서 만든 이 추정도에는 사당을 필두로, 인지당(강당) 경타재 보인재(동재) 시습재(서재) 양정당 유학재 동몽재 애련당 연지 관서루 육수정 등 다양한 건물이 등장한다.

당시 용역보고서는 이 연경서원을 전통교육, 인성교육(일반인·청소년·군인·다문화가족 등 대상) 그리고 문화체험의 장으로 활용해서 대구정신을 더 강화해나가야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용역을 맡은 기관이 대구시민사회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지만, 대구정신의 산실인 연경서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연경서원에서 강학한 류요신의 후손이면서, 선조 3대가 이곳에서 통강한 류윤환 연경서원연구회장은 "불가능한 복원보다 현실가능한 중건에 방점을 두고 대구시장 후보군 가운데 누가 이 일을 맡을 적임자인지 판단해서 관련 26문중(연경서원에서 통강한 문중의 총합)이 대구정신을 되살리는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한다.
이 연경서원연구회는 「연경서원 유물전시회-연경서원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전시회((2017년)를 봉산문회회관에서 연 연경서원중건준비추진위원회(위원장 도재욱)의 후신이다. 지난해 재출범했다.
당시 중건준비추진위는 대구시·대구시교육청·대구향교·유도회·담수회·박약회·한강학회·달성유현숭모회·구향회 등의 후원을 받아 전시회를 열면서 대구연경서원 중건시 중요 콘텐츠가 될 『대구유현통강록』, 『연경서원이건시일기』, 『임사록』, 연경서원기문과 기문후기, 이건기문의 편액 등을 선보였다.

"전임 시장을 만나서 자료도 주면 중요하다면서도 (중건작업을)시작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한 구 박사는 "대구시는 지역학, 지역문화를 콘텐츠화 하려는 노력을 특히 덜한다"고 지적한다.
◆퇴계 이황이 기문 후기 직접 써

대구부사가 직접 관리한 공교육 기관으로 대구유학의 중심지였던 연경서원은 대구를 지식인사회로 진입시키는 텃밭이었고, 대구권역에서 창의한 임란의병의 절대다수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연경서원이 없었다면 대구의 빛나는 의병활동도, 지식사회로의 진입도 더디거나 약해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만큼 대구사회를 리더하는 지도자가 이곳에서 많이 길러졌다.
◆대구연경서원 중건 가능하나?

이미 부지 1천335평(4천416.5㎡)이 확보돼 있다. 농암 이현보의 아들인 매암 이숙량이 계동 전경창과 함께 지은 이 연경서원에 관해 학자들은 수십편의 논문을 발표됐고, 이 서원을 다룬 문집도 수십종이다. 그만큼 대단하다.
우동기 전 대구시교육감은 재임시절 "연경서원이 중건되면 대구시내 학생들의 인성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현했다. 이는 퇴계가 권력을 이용한 집권층의 사리추구를 배제하고 공도(公道)를 회복하기 위해 학덕을 겸비한 스승과, 우국일념으로 다져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서원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취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농암 이들 안동인 이숙량이 연경서원 건립에 앞장서다
소수서원보다 20년 뒤인 1563년에 건립되어 300여년간 강학과 제향을 행하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된 연경서원은 퇴계 문인인 이숙량과 대구유학의 1세대 계동 전경창이 건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임란으로 소실되자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류요신, 이주 등이 1602년에 중건했다. 1613년에 사당을 건립하여 이황 제향 후, 정구·정경세까지 배향했다. 1635년에는 향현사를 건립하여 전경창과 이숙량을 제향하였다. 전경창이 연경서원 건립에 이숙량과 함께 했음은 곽재겸이 밝혔다.

연경서원은 원장을 비롯한 임원을 선정하여 체계적으로 운영하였으며, 관찰사와 대구부사 등이 방문하여 원생들의 학업을 격려했다. 이곳의 강학을 통하여 대구유림의 제1, 2, 3세대 계보가 형성되었다. 1세대는 전경창·채응린·정사철이고, 2세대는 서사원·손처눌·곽재겸·류요신·정광천·이주이다. 3세대는 이 서원에서 강학한 137명 등이다. 이들이 대구의 지식사회로 성장하게 만든 문풍의 주인공들이고, 대구를 문화학술을 사랑하는 곳으로 만들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연경서원은 국난극복 호국서원
1592년 5월23일 왜적이 부산포에 진입하면서 터진 임진왜란은 단 8일만에 팔조령 넘어 가창과 파동까지 번졌다. 대구부사의 초기대응이 실패하고, 대구 유림들은 팔공산 부인사에서 의병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을 결성했다.

당시 공산의진군의 의병대장은 서사원, 공사원은 이주, 해안현 다섯면의 도대장은 곽재겸(오면 도대장) 류요신(북촌 의병장) 우순필(동촌리 의병장)이다. 수성현의 대장은 손처눌, 수성북면 의병장은 채몽연, 하빈현 대장 겸 서면 의병장은 이종문, 하빈남면 의병장은 정광천이다. 이들 의병장은 모두 연경서원에서 공부한 유학자들이기에 연경서원이 호국서원으로 불린다.
연경서원 없었으면 오늘의 대구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정신을 철저하게 구현했고, 임란 시기 앞장서서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대구에서 크게 현창해야할 일임이 분명하다.
이들 의병장 중 살아남은 이들은 임란이 끝나자 다시 매달 한번씩 연경서원에서 강학에 나섰다. 대구정신을 잇기 위한 행보였다. 함께 손잡고 사선을 넘던 용기도, 죽음의 현장에서 돌아와서도 후학들을 살리려는 대구정신도 대구연경서원이 중건되는 날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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