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뉴 밀레니엄' 레트로 영화는 없었다

▲ 영화 <세기말의 사랑> ⓒ (주)엔케이컨텐츠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848] <세기말의 사랑> (Ms. Apocalypse, 2023)

글 : 양미르 에디터

지금이야 괜한 호들갑처럼 여겨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Y2K 사태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다는 걱정이 TV나 라디오로 지속해서 등장했던 1999년.

공식적으로 21세기는 2001년부터라고 하지만 '뉴 밀레니엄'이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고, 시간이 흘러 그 시대를 공유하는 이들은 더 자라서 청년 혹은 중장년, 노년이 되었다.

이런 '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추억'의 소재로 하나둘씩 등장하는 상황에서, <세기말의 사랑>은 지금껏 본 적 없었던 색다른 독립 영화였다.

작품의 주인공 '김영미'(이유영)는 '정직테크'에 경리로 일하면서,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수면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영미'는 모종의 이유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했다.

그런 '영미'는 직장 동료로부터 '세기말'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앞서 언급한 흉흉한 '세기말' 분위기 같은 인상을 지녔기 때문.

평생 무엇 하나 욕심내지 않았고, 나서지도 않았으며, 소심하게 살아온 '영미'는 회사 직원 '도영'(노재원)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미'는 '도영'이 거래처에서 납품한 돈을 횡령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꾸역꾸역 그 돈을 '아르바이트'한 비용으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다 들통이 나는 법.

1999년 12월 31일, '영미'는 '도영'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 2000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을 같이 보내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나, 지구 멸망 같은 재난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영미'는 '도영'의 횡령을 방조한 죄로 감옥에 들어간다.

시간이 흘러 출소를 했지만, '영미'는 집이 없었다.

같이 살았던 큰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사촌 오빠가 그 집을 팔아서 새 사업에 보탰기 때문.

그때, '영미' 앞에 차 한 대가 나타난다.

차에 탄 인물은 지체장애인 '유진'(임선우)과 미용대회를 앞둔 헤어 디자이너 준'(문동혁).

알고 보니 '유진'은 '도영'의 전남편이었고, 애정 문제와 채무 관계로 얽힌 '도영'의 '일방적 썸녀'였던 '영미'를 찾아갔던 것.

김이 서린 유리창에 하트를 그리며 시작하는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유진'이 '영미'에게 이야기한 '맨드라미'의 꽃말인 '치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동시에 시들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사랑이 싱싱하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는가?"라는 질문도 동시에 등장한다) 작품이다.

<세기말의 사랑>은 69세의 여성이 병원 치료 중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후 이를 고발하려는 '공론화의 과정'을 담아낸 <69세>(2019년)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NN 관객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감독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남옥상을 받은 임선애 감독의 신작이다.

이번 영화에 대해 임선애 감독은 외모도, 성격도,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나도 달라 보였던 두 여성이 결국 같은 사랑을 하는 '용기'를 낸 작품으로 보이길 바랐다.

특히 기성 미디어나 영화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인물에 관심이 많았던 임선애 감독은 익숙하게 본 인물이라 할 지라도 다른 각도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69세>에 이어 계속해서 여성 캐릭터의 서사에 주목하게 됐다고.

일례로, '유진' 캐릭터는 임선애 감독의 친척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감독은 근육병이 있는 친척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서 각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순히 장애인이 주인공이면, 희생과 극복을 주제로 진행하는 작품이 많은 가운데, 이 작품은 그런 지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영미'에게 각성의 장치가 되어주기도 하는데, '유진'은 휴게소에서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는 비장애인 남성에게 화를 내는데, 이를 바라보는 '영미'는 자신의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에 이른다.

그저 이 영화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이고, 두 사람 중 한 명이 장애인이라는 설정만 사용한 것이었다.

또한, <세기말의 사랑>은 화면의 구성이나 색채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영화는 주로 수평의 시선으로 촬영됐는데, 세상에서 소외된 두 주인공을 세상의 중심으로 세우고 싶었으며, 두 사람이 평등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결정한 것이었다고.  

이어 초반부는 모노톤으로, 이후부터는 컬러로 표현되는 독특한 연출을 선보였는데, 임 감독은 "흑백과 컬러의 구분은 선입견으로부터 시작했다"라면서, "'영미'가 출소를 하고 난 이후 총천연색인 2000년대로 걸어 나오게 된다. 우리가 흑백 장면을 볼 땐 '영미'가 사실 색을 지닌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채색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전복하고 싶었다. '영미'는 원래 좀 색이 바랬을 뿐이지 색을 지닌 인물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렇게 <세기말의 사랑>은 세기말과 새천년을 통과하던 불완전한 인물이 불완전한 인물을 만나 사랑 때문에 세상을 상냥하게 바라보게 되고, 자기 삶이 완전하지는 못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스스로 자기 삶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뉴 밀레니얼'이 거의 사반세기 흐른 지금에도 유효한 서사로 관객들을 찾아온 훌륭한 작품이 됐다. (여담으로 '영미'의 변화한 헤어 스타일은 <제5원소>(1997년)에서 '리루'(밀라 요보비치)가 했던 그 스타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2024/01/18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세기말의 사랑
감독
임선애
출연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임선애, 박 로드리고 세희, 박세영, 강민국
평점
3.45

Copyright © 알려줌 알지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18-2025 ALLYEOZUM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