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부탁에 손주를 7년 봐줬는데.." 이사 가던 날 며느리가 한 말에 무너졌다

맞벌이하는 자식 부부를 위해 손주를 돌봐 주는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내 몸이 고되더라도 손주가 건강하게 크고 자식 부부가 편하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보람을 느낍니다.하지만 그 수고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때, 할머니의 마음에는 말로 다 못 할 상처가 남습니다. 오늘은 며느리의 부탁으로 7년 동안 손녀를 키운 한 할머니가 이삿날 들은 말 한마디에 무너진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며느리의 간절한 부탁

광주 북구에 사는 한옥순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사로 25년을 일하다 정년퇴직했습니다. 남편 박만수 씨와 함께 연금으로 소박하게 살며, 퇴직 후에는 복지관에서 노래 교실을 다니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8년 전, 은행에 다니는 며느리 최유나 씨가 시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손녀 서윤이가 막 돌을 지났을 때였습니다. "어머님, 육아휴직이 끝나는데 서윤이를 맡길 데가 없어요. 어머님이 봐 주시면 정말 안심이 될 것 같아요."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였습니다. 아들 지훈 씨도 옆에서 "엄마, 대신 매달 육아비는 꼭 드릴게요"라고 거들었습니다. 옥순 씨는 노래 교실을 그만두고 손녀를 돌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그날부터 옥순 씨의 하루는 새벽 여섯 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아들 집에 가서 손녀를 깨우고 밥을 먹였습니다. 며느리가 퇴근하는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남편 만수 씨는 아내가 지쳐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워했습니다. "당신, 그러다 몸 상해." 그럴 때마다 옥순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서윤이가 나만 보면 웃는데 어떻게 그만둬요."

7년 동안 받지 못한 육아비

아들이 약속한 육아비는 처음 두어 달만 며느리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옥순 씨는 아들 부부도 집 대출 갚느라 힘들겠다 싶어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손녀의 기저귀값, 간식비, 버스비까지 옥순 씨 지갑에서 나가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손녀가 감기에 걸리면 소아과에 데려가는 것도, 유치원 재롱잔치에 참석하는 것도 할머니 몫이었습니다.그렇게 7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옥순 씨는 무릎 연골이 닳아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통증을 느꼈습니다. 손목에도 파스가 떨어질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손녀가 "할머니 사랑해"라며 품에 안길 때면 모든 고생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며느리는 가끔 시어머니의 육아 방식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님, 요즘은 그렇게 안 키워요." "사탕은 주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옥순 씨는 서운했지만 손녀를 위해 꾹 참았습니다.그러던 올해 봄, 아들이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손녀도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이제 할머니 손이 필요 없을 만큼 자라 있었습니다. 옥순 씨는 아쉬우면서도 이제 조금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놓였습니다.

이삿날 아침의 풍경

이사하는 날, 옥순 씨는 새벽부터 반찬을 한 보따리 싸 들고 아들 집으로 갔습니다. 서울 가서 정리하느라 바쁠 테니 며칠은 밥 걱정 없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손녀가 좋아하는 멸치볶음과 장조림도 넉넉히 담았습니다.이삿짐 트럭이 짐을 다 싣고 떠날 무렵, 손녀가 할머니 다리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할머니도 같이 가요. 서울 가기 싫어요." 옥순 씨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손녀를 꼭 끌어안았습니다.그때 며느리가 다가와 손녀를 떼어 내며 말했습니다. "서윤아, 이제 할머니 안 봐도 돼. 엄마가 다 해 줄 거야." 그 말에 옥순 씨는 잠시 멈칫했지만 아이를 달래려는 말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옥순 씨는 반찬 보따리를 며느리에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얘야, 서울 가서도 서윤이 잘 부탁한다. 가끔 할머니 보고 싶다고 하면 전화라도 시켜 주렴." 며느리는 보따리를 받아 들고 잠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그리고 며느리의 입에서 옥순 씨가 평생 잊지 못할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삿짐 트럭의 시동 소리 사이로도 그 말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가슴에 박힌 한마디

"어머님,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육아비도 드렸으니까 서로 빚진 건 없는 거죠? 서울 오실 때는 꼭 미리 연락 주세요. 자주 오시면 저도 불편하고, 서윤이 습관도 다시 잡아야 해서요."옥순 씨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7년 동안 한 푼도 받지 못한 육아비를 줬다는 말도, 손녀를 보러 오지 말라는 말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습니다.옆에 있던 아들이 당황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육아비를 드렸다고? 내가 매달 당신 통장으로 100만 원씩 보낸 거 말이야?" 며느리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습니다.그제야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아들은 7년 동안 매달 꼬박꼬박 100만 원을 아내에게 보내며 어머니께 전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며느리는 그 돈을 단 한 번도 시어머니에게 건네지 않았습니다. 처음 두어 달을 빼고는 모두 자기 적금으로 돌려놓았던 것입니다.옥순 씨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나 멈춰 서야 했습니다. 등 뒤에서 손녀가 "할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차마 뒤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들고 온 통장

그날 밤 옥순 씨는 열이 올라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남편이 밤새 물수건을 갈아 주며 곁을 지켰습니다. "내가 그만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남편의 목소리에는 원망보다 아내를 향한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습니다.이틀 뒤, 서울로 올라갔던 아들이 혼자 광주로 내려왔습니다. 아들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직접 드렸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한테만 맡겼어요."아들의 손에는 통장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모아 두었던 적금을 해지해 어머니 이름으로 옮겨 온 것이었습니다. 7년 치 육아비, 8천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이건 원래 엄마 돈이에요. 받아 주세요."옥순 씨는 통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유나는 뭐라고 하더냐?" 아들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도 애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하다가, 결국 잘못했다고 울었어요. 엄마한테 직접 사과드리겠대요."옥순 씨는 통장을 받아 들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돈을 돌려받았다는 안도감보다, 7년 동안의 정성이 그렇게 취급받았다는 서러움이 더 크게 밀려왔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꽁꽁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를 다시 찾은 손녀

한 달 뒤 며느리가 손녀를 데리고 광주에 내려왔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울먹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그 돈을 모아서 서울 집 마련에 보태려고 했어요. 변명할 말이 없어요."옥순 씨는 한참 동안 며느리를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습니다. "얘야, 돈은 다시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한번 다치면 쉽게 낫지 않는다. 앞으로는 서윤이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거라." 며느리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렸습니다.그때 손녀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할머니에게 내밀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편지였습니다. "할머니, 서울 학교에서 가족 그림 그리기를 했는데 저는 할머니를 제일 크게 그렸어요. 방학 때 할머니 집에서 자도 돼요?"옥순 씨는 손녀를 꼭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7년 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손녀가 알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 만수 씨도 옆에서 조용히 눈가를 훔쳤습니다.옥순 씨는 아들이 돌려준 돈의 일부로 남편과 함께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지관 노래 교실에 등록했습니다. 요즘 그녀는 방학마다 손녀를 맞이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손주를 돌보는 일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그 사랑이 존중받지 못하면 깊은 상처로 남습니다. 자식 부부를 돕더라도 약속과 대가는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지키는 길입니다.그리고 자식들도 부모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손주를 키우며 애쓰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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