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이 가도 "대출 NO"…은행만 가면 작아지는 외국인들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더이상 '한민족 국가'가 아닌 '다인종·다문화 국가'다. 체류 외국인이 26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5%를 넘어섰다.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지만 이들을 위한 금융서비스는 아직 걸음마 수준. 외국인을 위한 금융서비스를 점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국내 주요 은행의 외국인 고객이 최근 3년간 100만명 늘었다. 국내 체류 인구만 260만명이 넘는 외국인은 이제 은행의 주요 고객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은행권은 외국인 고객 공략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계좌개설이나 해외송금 등 기초적인 서비스에만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올해 1~9월 신규 외국인 고객 수는 23만9822명이다. 지난해 신규 외국인 고객은 37만7882명으로 3년 전과 비교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현재 추세라면 최근 3년간 신규 외국인 고객은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체류 외국인이 늘자 은행권은 이들을 겨냥한 금융 서비스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18일부터 '외국인 전용영상통화 실명확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담 상담사가 영상통화를 통해 실명확인을 하는 방식으로 외국인 고객이 편하게 입출금 계좌·체크카드 등을 발급받을 수 있다.
하나은행은 외국인 근로자가 많은 경기 평택에 '외국인 전용점포'를 열었고, 외국인 근로자 밀집 지역 16개 영업점을 일요일에도 연다. 우리은행도 최근 외국인 전용 창구 3곳을 일요일에 열기로 결정했고, 국민은행은 외국인 수가 많은 8개 지역에 외환송금센터를 운영하며 주말에도 환전과 송금 등을 서비스 중이다.
저출생, 고령화 등 국내 인구구조 변화와 맞물리면서 외국인 근로자가 늘자 은행권도 이를 간과할 수 없게 됐다. 국내 체류 외국인은 269만명으로 경북(263만명), 대구(237만명), 광주(141만명) 지역 인구보다 많다. 제4인터넷뱅크를 준비하는 컨소시엄 중에는 외국인을 주요 고객층으로 설정한 곳도 있다.
◆ 5대은행 외국인 전용 신용대출 없어…"코로나로 본국 귀환 리스크 겪으면서 보수적 변화"
문제는 은행권의 외국인 대상 금융 서비스가 해외 송금·계좌개설 등 기초 서비스에 그친다는 점이다. 특히 은행 상품의 핵심인 대출은 사실상 없다. 억대 연봉을 받는 국내 대기업 외국인 임원이 비서와 함께 연봉을 증명했음에도 신용대출이 거절됐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현재 5대 은행은 외국인 전용 신용대출 상품이 없다. 유일하게 '외국인주거래우대론'이라는 전용 신용대출을 판매하던 하나은행도 2022년 해당 상품 취급을 중단했다. 5대 은행의 외국인 신용대출 잔액은 지난 9월 말 기준 1043억원으로 2021년 말(1467억원) 이후 감소세다. 꾸준히 증가하는 외국인 고객 수와 대비된다.
은행권이 외국인에게 대출을 꺼리는 것은 회수하지 못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면 대출 회수가 어렵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특히 코로나19가 기점이 돼 외국인 고객에 대한 대출 태도가 굉장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라며 "외국인들의 급격한 귀국으로 대출 회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수익성이 악화하자 외국인 고객 담당 부서가 통폐합되며 추진력이 많이 상실됐다"고 했다.
외국인 신용대출을 적극 취급하는 일부 지방은행에서는 체류자격(비자)별로 재직기간과 연 소득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거나 평소 안정적 노무관리를 보인 기업의 외국인 근로자에게 대출을 내주는 방식 등으로 건전성을 관리 중이다. 다만 리스크가 다른 대출보다 높은 만큼 일부 외국인 신용대출은 금리가 10%를 넘는다.
금융권에서는 외국인 대상 대출을 활성화하기 위해 외국인 신용평가모델을 고도화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외국인 신용평가모델을 고도화해 신용 등 인적 데이터를 쌓아두면 해외시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국내 은행 외국인 고객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 베트남 등은 국내 은행이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지역"이라며 "해당 외국인들의 국내 신용정보를 해당 국가에 맞도록 고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차원에서 외국인 금융 서비스 활성화를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 지난해 9월까지 외국인은 통장개설 등 신분증 확인이 필요한 금융업무를 볼 때마다 금융회사를 직접 방문해야 했다. 법무부와 금융당국이 '외국인 등록증 진위 확인서비스'를 허용한 후에야 비대면 계좌개설이 가능해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정부와 신용평가기관이 캄보디아 측과 신용정보 제공 서비스를 교류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며 "한국 내 신용 이력을 본국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범정부적 지원이 이뤄진다면 금융사 입장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서울 한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인 6년차 유학생 중국인 왕모씨는 지난해 9월 A은행에 학생증을 받으러 갔다가 덜컥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대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행원의 안내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월 30만원 한도의 신용카드가 손에 들려 있었다. 한국어로 일상적인 대화는 막힘없이 가능하지만 어려운 용어가 많은 금융 생활은 아직까지 왕씨가 넘어야 할 산이다.
은행들이 국내 거주 외국인 260만명을 잡기 위해 여러 서비스를 내놓고 있지만 언어·문자가 달라 느껴지는 '소통의 벽'은 여전히 높다. 생각과 다르게 신용카드를 발급받기도 하고 통장 개설부터 ATM(자동입출금기기) 이용까지 비교적 쉽다고 생각하는 일에서도 애로사항이 발생한다.
23일 통계청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에 따르면 국내 거주 이민자(외국인)이 '은행·상점 등에서 차별·어려움을 경험한 여부' 조사 결과, '경험함' 응답률이 2018년부터 계속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다. 2018년에는 '경험함'이 32.1%였지만 2022년에 43%까지 늘었다. 반대로 '경험하지 못함'은 같은 기간 66%에서 55%로 줄었다.
특히 외국인 금융 소비자들은 특히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 국내 거주 외국인의 약 27.4%가 '언어'를 한국 생활 적응에 가장 어려운 점으로 꼽았다.
왕씨도 지난해 9월 의도치 않게 신용카드를 받았을 때 대화가 잘 안됐다고 했다. 중국인 유학생 장모씨(29)도 왕씨와 같은 경험을 했다. 한국에 거주한지 4년째인 장씨는 "절차도 뜻도 잘 모르니 꼭 만들어야 하는 건 줄 알았다"며 "유학생들 사이에서 '은행에서 카드 막 만들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외국인은 신용카드 발급이 까다로운데 유학생은 신원이 비교적 분명해서 소액 한도로 발급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은행 관계자 역시 "오해라면 '소통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월급통장 개설과 같은 간단한 일도 외국인에겐 긴장의 연속이다. 외국계 무역회사를 다니는 튀르키예인 아이작씨(35)는 한국과 튀르키예를 오간지 7년이지만 올해 초에서야 국내 은행의 월급통장을 만들었다. 아이작씨는 "계약서에 아주 작은 글씨들이 있는데 한국말(한글)이라서 잘 몰랐다"며 "안 좋은(불리한) 말이 써있을까봐 긴장했다"고 설명했다.
카자흐스탄인 30대 알만씨는 ATM 앞에서 진땀을 뺐다. 지난 2월 365코너에서 돈을 인출하는데 에러코드가 화면에 뜨면서 투입했던 체크카드가 명세표와 함께 도로 나왔다. 다른 기기에 해봐도 똑같았다. 알만씨는 "밤이라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며 "나중에 한국친구가 종이(명세표)에 한국어로 '하루 인출금액 초과'라고 써있다고 알려줬다"고 말했다.
다만 외국인들은 모두 한국의 금융 업무 속도에 놀랐다. 스마트폰 뱅킹 덕분에 송금도 쉽고 창구 업무도 외국보다 빨라 시간도 아낀다고 했다. 은행들이 각종 통역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인 특화 점포'를 더 많이 알렸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알만씨는 "외국인을 위한 은행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며 "방문해봐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더 있는지 알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도엽 기자 usone@mt.co.kr 김남이 기자 kimnami@mt.co.kr 이병권 기자 bk22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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