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K'가 마침내 이탈리아 피자 무대까지 평정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이탈리아식 정통 피자를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은 단연코 한국인이다.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적도 없는 41세 한국인 남성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있는 피자 대회에서 우승해 '나폴리 피자 장인'으로 인정받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에서 ‘포폴로피자’를 운영하는 유준환 셰프가 그 주인공이다.
유 셰프는 지난 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서 열린 ‘나폴리 피자 세계 챔피언십’에서 STG 부문 1등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STG 부문은 전통적인 나폴리 피자 제조 기술을 통해 피자를 가장 잘 만드는 ‘피자이올로(Pizzaiuolo, 피자 장인)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김치를 잘 담그는 사람을 뽑는 대회에서 외국인이 우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991년 '나폴리 피자 세계 챔피언십'이 처음 열린 이후 아시아인이 우승한 적은 2010년 일본 셰프 단 한번 뿐이었다. 특히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3년간 이벤트가 중단된 이후 재개돼 그 어느 해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전 세계 22개국, 총 500명이 '나폴리 피자 장인'이 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날아 왔지만 우승의 영광은 유 셰프만이 누릴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족과 피자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유 셰프를 26일 그의 매장에서 만났다.
'서른'에 시작된 피자연대기

유 셰프는 지금껏 단 한번도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지금의 기술은 독학으로 깨우친 것이다. 그가 "요리를 해야겠다’고 처음 결심한 건, 24살에 떠난 이탈리아 배낭여행에서 였다.
“처음 나폴리 피자를 먹어봤는데, 단순한 재료로 짧은 시간 동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상 깊었어요. 그때 ‘음식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후 27살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막연한 꿈'은 차츰 현실이 되어 갔다. 일식집에서 일을 하며 셰프로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본 그는 한국에 돌아와 레스토랑 주방 일자리를 구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온통 음식에 관련된 생각으로 가득했던 때였다. 관련 서적부터 방송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그러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유명한 피자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탈리아를 여행 하던 시절, 꿀맛같았던 피자를 잊지 못했던 그는 남은 인생을 '피자'에 걸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남들은 늦었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30살에 그의 피자 연대기는 시작됐다.
나폴리 피자의 매력에 빠지다.

유 셰프는 다양한 피자 스타일 가운데 특히 ‘나폴리 피자’에 매료됐다. 주로 이탈리아에서 '카푸토 밀가루'로 만드는 나폴리 피자는 수분 함유량이 높아 촉촉하고 부드럽기도 하지만, 화덕에 익히는 시간이 1분~ 1분 30초 정도로 짧아 재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맛을 잘 살릴 수 있다. 또 토핑이 많이 들어가는 미국식 피자에 비해 맛이 담백하다. 나폴리 피자 장인 협회(APN) 공식 밀가루인 카푸토는 국내에선 쉐프스푸드가 수입한다.
“이탈리아 배낭여행 당시 빵에 토마토 소스만 발라 구운 것 같은 마르게리타 피자가 맛있어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었죠. 아시다시피 나폴리 피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에 등재된 피자의 원형입니다. 미국식 피자도 나폴리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유래된 거고요. ”
유 셰프는 '나폴리 피자'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나폴리 피자를 굽는 화덕을 ‘가장 완벽한 조리 도구’라고 말했다. 화덕은 장작을 떼서 온도를 올리기 때문에 장작에서 발생하는 직접적인 열과, 화덕에 축적돼있는 열이 동시에 올라온다. 살아있는 불을 잘 이용해 셰프가 원하는 식감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제대로된 나폴리식 피자를 만드는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가 되고 싶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뜨거운 화덕 앞에서 보내면서도 일을 마치면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뒤지며 피자를 공부했다. 하지만 나폴리 피자에 대해 ‘이게 정답이다’라고 말해주는 이가 주변에 없었다. 책과 유튜브를 보면서 끝없이 가설을 세우고 확인하고, 다시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지난한 과정이 계속됐다. 포기하고 싶을 떄도 있었지만 "내 가게를 내고싶다"는 강한 열망이 그의 의지를 지탱했다.
꿈을 향한 도전

유 셰프는 34살 드디어 자신의 가게를 오픈했다. 상호는 이탈리아어로 대중이라는 뜻의 '포폴로 피자'로 지었다. 이탈리아에서 나폴리 피자는 간단한 재료를 밀가루 반죽 위에 올려 구워 먹는 서민 음식이기에 누구나 맛있는 피자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의 '손맛'은 순식간에 입소문이 났다. "음식을 맛있게 만들면 손님이 손님을 데리고 올 것"이라는 확신이 통했다. 광고 한번 하지 않았지만 가게 문을 연지 6개월 만에 '오픈런' 현상이 벌어지는 식당이 됐다.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가게'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피자에 미칠 수 있었다. 오픈 이후 단 하루도 푹 쉬어본 날이 없었다. 정규 휴일에는 혼자 가게에 나와 반죽을 치고, 미흡했던 것들을 정리하면 하루가 지나갔다. 매년 이탈리아에 가서 현지 피제리아(pizzeria)를 돌아다니며 메뉴를 개발했다. 나폴리 피자에 한국적인 재료를 넣어 이색 메뉴도 늘려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나폴리 피자를 잘 만드는 한국인

'줄 서는 피자맛집'의 오너 셰프가 된 그의 다음 목표는 ‘세계 최고의 나폴리 피자 명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나폴리 피자 세계 챔피언십’ 대회에 도전한 이유다.
그는 처음 참가한 2019년 대회에서는 150여 명의 출전자 가운데 70위에 그쳤다. 그는 "당시에도 피자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는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대회에서 원하는 정답을 몰랐다"고 했다. 앞서 이 대회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선배들이 없었기에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밀가루, 치즈, 토마토 소스, 적절한 간, 조리 시간, 온도 등 정답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실패는 오히려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코로나19 기간 대회 우승을 위해 칼을 갈았다. 2010년 STG부문에서 우승한 일본인 마키시마가 저술한 ‘STG’라는 책을 읽은 것이 결정적인 힌트를 줬다.
“책에 규정이 나와 있더라고요. 다만 ‘이 규정대로 하면 맛이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했을까?’라고 레시피를 보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이들이 원하는 건 나폴리 피자의 전통과 뿌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규정 안에서 적절한 온도, 소스의 양을 찾으면서 최대한 맛있는 피자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는 대회 두번째 참가만에 STG 부문 우승자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터라 지난번 대회보다는 훨씬 좋은 성적을 기록할 것이라는 자신은 있었지만 우승까지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앞서 그는 지난 4월 국내서 개최된 쉐프스푸드 주관 ‘제 4회 카푸토컵 나폴리 피자 한국 챔피언십’에서 창작 부문인 클라시카(Classica) 부문 우승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유준환 셰프의 꿈은 '현재진행형'

'전 세계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피자를 가장 잘 만드는 한국인'이라는 명성에 비해 그의 가게는 40여석 규모로 그리 크지 않다. 손님들이 기다리는 것이 미안해 한 차례 확장을 했지만, 화덕 하나로 구워낼 수 있는 피자 양에 한계가 있어 더 이상 규모를 늘리고 싶진 않다. 손님들에게 최고의 피자를 대접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게가 협소하다보니 손님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셔서 죄송스럽지만, 음식에 있어서는 좋은 재료를 맛있게 드실 수 있게 항상 잘 준비할 생각이에요. 음식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가게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는 요즘 '새로운 컨셉의 나폴리 피자 가게'를 열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시장 점유율로만 따지면 한국에선 미국식 피자가 여전히 더욱 대중적이지만, 미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나폴리 피자에 대한 인기도 많아지고 있으니 나폴리 피자의 원래 특성에 맞게 ‘무엇을 더 넣을까? 보다는 무엇을 더 뺄까?’ 고민할 수 있는 가게를 만들고 싶다는 설명이다. 그는 "나폴리 피자의 매력은 결국 단순한 식재료와 간단한 조리를 통해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음식 철학 역시 ‘Simple is Best’다.
그는 이날도 가게를 마감한 뒤 화덕 앞에서 혼자 500판에 가까운 양의 반죽을 치고 밤 늦게 퇴근길에 나섰다. 그는 “다음 대회에선 STG 부문 외에 다른 카테고리까지 우승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라면서 “앞으로 같은 대회에서 한국인 우승자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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