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은퇴 못 박은 최민정…그날 김길리가 울어버린 ‘진짜 이유’

금메달이 터졌고, 은메달도 따라왔다. 그런데 그날의 주인공은 메달 색깔만이 아니었다. 밀라노의 마지막 밤, 최민정과 김길리가 서로를 끌어안고 흘린 눈물이 한국 쇼트트랙의 ‘진짜 결승선’처럼 보였다. “네가 왜 울어? 울면 안 돼.” 최민정의 한마디가 그 장면을 끝내 버티게 했다.

최민정은 이번 올림픽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았다. 인터뷰에서 말이 바뀌지 않았다. “마지막 올림픽인 건 확실하다”는 선언은 팬들에겐 차갑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오히려 한 선수의 커리어가 얼마나 치열했고,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보다 ‘끝까지 버티는 법’을 아는 선수가, 끝내 ‘내가 여기까지다’를 말한 순간이었다.

숫자로만 보면 최민정은 이미 설명이 끝난 선수다. 올림픽 3번, 메달 7개. 한국 선수 중 하계·동계를 합쳐 최다 메달. 금메달 4개를 나란히 올린 전이경과 어깨를 맞댔다. 이런 기록 앞에서 “전설”이라는 단어를 아끼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최민정의 진짜 위대함은 기록 뒤에 숨어 있다.

그가 남긴 건 메달이 아니라 ‘기준’이다. 경기 중 상대를 막는 라인 선택,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타는 타이밍, 그리고 계주에서 ‘팀이 살기 위해 내가 한 발 더 버티는’ 그 습관. 이번 올림픽에서도 결국 그 기준이 팀을 들어 올렸다. 계주 금메달은 혼자 따는 메달이 아니지만, 계주를 우승으로 만들어주는 건 늘 누군가의 디테일이다. 최민정은 그 디테일을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 그 옆에서 김길리가 자랐다. 김길리는 이제 더 이상 ‘민정 키즈’가 아니라,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새 얼굴이다.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올림픽 2관왕까지 올라섰다. 그런데 김길리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역시 “민정 언니”였다. 넘어졌을 때도, 메달을 땄을 때도, 시선이 먼저 가는 곳은 늘 최민정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대목이 사람 마음을 건드린다. 보통 ‘세대교체’라는 말엔 냉정함이 따라붙는다. 누군가 내려가야 누군가 올라선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 장면은 달랐다. 최민정은 내려가면서도 후배의 어깨를 두드렸고, 김길리는 올라서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존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었다.

경기 자체도 상징적이었다. 1500m 결승에서 두 선수는 초반을 ‘참았다’. 앞에서 불필요하게 몸을 쓰지 않고, 중반에 기회가 열릴 때를 기다렸다. 최민정이 먼저 시동을 걸어 바깥으로 길을 열고 올라갔고, 김길리는 인코스로 파고들며 순위를 끌어올렸다.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김길리가 추월로 결승을 정리했다. 이 장면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언니가 길을 만들고, 동생이 문을 열어젖힌’ 구조였다.

그래서 이 금·은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최민정에게는 라스트댄스의 마침표였고, 김길리에게는 다음 올림픽으로 이어질 첫 문장이었다. 최민정이 “이제는 김길리에게 응원을 부탁한다”고 말한 순간, 한국 쇼트트랙은 불안보다 설렘을 얻게 됐다. ‘누가 비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다음은 더 세게 달릴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물론 팬들 입장에선 섭섭하다. 최민정이 더 뛰는 모습도 보고 싶다. 하지만 선수에게 마지막을 스스로 고르는 권리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선수 생활은 차근차근 생각하겠다”는 말은, 성급히 사라지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남길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말하고 싶다. 최민정에게는 “고생 많았다”는 인사보다 더 큰 감사가 필요하다. 한국 쇼트트랙이 ‘당연히 강한 종목’으로 불릴 수 있었던 시간엔 늘 최민정의 땀과 표정이 있었다. 김길리에게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다음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이 ‘한 번의 기적’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실력’이 되는 순간을 보고 싶다.

끝내 울음을 삼키지 못한 장면이 오히려 희망이었다. 전설이 떠나는 자리에 공백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 공백은 눈물로 메워졌고, 다음 질주로 이어졌다. “네가 왜 울어?” 그 말은 사실 이런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네 시간이다. 울지 말고, 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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