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국에서 ‘갈취국’으로 전락한 미국 [박현 칼럼]


박현 | 논설위원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4일 워싱턴 백악관 상공으로 B-2 스텔스 폭격기가 F-35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날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폭격기에 거수 경례를 했다. 이 폭격기는 지난달 이란 핵시설을 폭격했던 바로 그 기종이다. 이어 그는 자신이 명명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명칭의 법안 서명식을 열었다. 이 법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공약을 실행할 실탄이 담겼다. 그는 “민주주의 탄생일에 민주주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 법이 미국을 로켓선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경제가 로켓처럼 솟아오를 것이라는 얘기다. 마치 군사 퍼레이드를 하며 치적을 자랑하는 제3세계 독재자를 보는 듯하다.
트럼프의 주장은 대부분 허풍이다. 이 법은 문제가 많아 공화당 의원들조차 반발하자 반대 의원의 재선을 막을 거라고 협박하는 등 거의 우격다짐으로 통과시켰다. 주로 부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4조5천억달러(약 6100조원) 규모의 감세, 불법 이민 단속을 위한 국경 장벽과 감금시설 건설, 적국의 탄도미사일로부터 미국 본토 방어를 위한 골든돔 구축 등이 담겼다. 대신에 재원 마련을 위해 메디케이드(저소득층 건강보험), 푸드스탬프(저소득층 식료품 지원) 등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재생에너지 보조금을 축소·폐지했다. 이걸로 감당이 안 돼 대규모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다. 연방정부 부채 한도를 5조달러나 늘린 이유다.
이 법은 민주주의의 승리이기는커녕 그 반대다. 메디케이드 삭감으로 약 1100만명의 저소득층이 건강보험 자격을 잃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악관은 감세가 성장을 자극해 재정적자를 줄일 것이라고 밝혔으나 허황된 주장이다. 일부 경제분석기관은 미국 경제가 단기적으로 솟아오르는 듯하다가 중간에 고꾸라질 위험이 크다고 예측한다. 특히 재정적자가 더 불어나 재정위기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한다. 미국 의회예산국은 이 법 시행으로 재정적자가 2034년까지 3조4천억달러 증가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현재 90%대 후반에서 10년 뒤 124%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국채 이자로만 연 7760억달러(약 1000조원)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 한해 예산의 16%가량을 이자 지급에 쓰고 있으니 이런 상태로 재정이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대규모 감세를 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트럼프는 ‘비즈니스맨’과 ‘마가의 전사’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1기 트럼프가 비즈니스맨에 가까웠다면 2기 트럼프는 마가의 전사 쪽으로 기울어 있다. 마가는 기본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적 백인 인종주의다. 이번에 통과된 법은 트럼프의 포퓰리스트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포퓰리스트는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며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제시하나, 실제로는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등이 대표적 사례다. 다만, 영악한 트럼프는 임기 내에는 문제가 불거지지 않게 관리하려 한다. 그가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에게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금리 인하를 통해 국채 이자 부담을 덜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으나, 인위적인 금리인하는 인플레를 유발해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다.
관세 부과는 또 다른 도박이다. 그는 관세 수입으로 재정적자를 만회하려 하고 있다. 의회예산국은 10년간 관세 수입이 2조8천억달러에 이를 것이라 전망했다. 현재보다 3.6배가량 불어나는 것이다. 미국이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정작 자신들은 재정을 펑펑 쓰면서 외국으로부터 세금을 강탈해 벌충하려는 것이다. 관세 부과에는 근거도 없고 기준도 없다. 미국이 무역적자를 보고 있으니 그만큼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마치 제국의 황제가 속국들에게 전횡을 부리는 듯하다. 다른 나라의 피해와 세계경제 위축은 관심 밖이다. 이런 식으로 동맹을 대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패권국 자격이 없다. 패권국은 세계경제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파수꾼 역할을 할 때 존중을 받는다. 자의적인 군사 개입과 국제규범 무시를 일삼으면 불량국가일 뿐이다.
트럼프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종언을 앞당기는 인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계 최강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트럼프 시기를 슬기롭게 견뎌내며 이해관계가 비슷한 국가들과 연대해 헤쳐나가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패권국의 공백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자리 잡힐 때까지 전쟁을 비롯한 엄청난 혼돈을 수반했다는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이에 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외교적·군사적으로 자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논설위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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