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그림 감상자를 위한 '의도된 착시'
다빈치 작품의 뛰어남은 공간 구성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림은 식당의 북쪽 벽 위쪽에 그려져 있는데, 식당의 벽면과 천장을 따라 공간이 정확하게 일치되게 그렸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식당에서 그림을 보면 실제 식당의 크기보다 방이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는 중앙에 앉아 있습니다. 배경에는 세 개의 창문이 있는데 가운데 창문이 조금 더 커서 자연스럽게 예수가 부각됩니다. 천장의 격자나 양쪽벽에 그려진 선을 따라가면 예수의 얼굴에 정확하게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 원근법에서 실제로는 평행선이 되어 있는 것을 평행이 아니게 그릴 때에, 그 선이 만나는 점-편집자주)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회화론>에서 원근법 이론을 세울 때의 전제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감상자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빈치가 아무리 완벽하게 원근법적인 그림을 그려도 관람자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그림 속 배경이나 인물은 왜곡되어 보일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처럼 큰 그림일 경우 왜곡의 정도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막으려면 그림의 길이나 폭보다 열 배에서 스무 배는 떨어진 곳에서 봐야 한다고 다빈치는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식당의 크기 때문에 이렇게 먼 곳에서 그림을 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감상자가 그림의 폭, 그러니까 8.8m를 살짝 넘는 9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본다고 가정하고 원근법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눈높이는 예수의 눈, 그러니까 4.5m 높이로 상정했다 하니 누구도 그 위치에서 그림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완벽하게 선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림을 그린 듯하지만 다빈치는 어떤 위치에서 보더라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서는 수사들이 그림의 오른쪽 벽면에 그려진 타피스리(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가 수도원 식당에 걸려있는 타피스리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오른쪽을 좀 더 밝게 그렸습니다. 지금은 오른쪽 벽면에는 타피스리가 걸려있지 않지만, 왼쪽 벽면에 그려진 벽화와 그림 속의 타피스리가 연결되면서 실제 공간은 훨씬 넓고 깊어 보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최후의 만찬』과 같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원근법과 시지각(視知覺)에 대한 어지간한 연구와 탐구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의 감정' 표현, 인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다빈치의 독특함은 인물들의 자세나 생김새에서도 드러납니다. 다른 화가의 『최후의 만찬』작품과는 달리, 인물들의 묘사가 유독 다양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그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화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무엇보다 과학자였습니다. 20여 구의 시체를 해부하면서 인체의 비밀을 해독하고자 기울인 노력은 유명한데요. 그렇게 알게 된 과학적 지식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그의 작품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가 남긴 얼마되지 않는 작품은 과학이 피운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메니코 로렌차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에 이미 관상학이 있었습니다. 관상학에서는 3개의 유비(類比)를 즐겨 사용합니다. 첫째는 사람과 동물 사이, 두 번째는 개인과 민족, 세 번째는 개인과 전반적인 외모 사이의 유비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자의 외모를 지니고 있으면 사자와 같이 화를 잘 내는 성격이고, 북구 사람들처럼 텁수룩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들처럼 용맹하며, 화를 잘 내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으면 그도 화를 잘 내는 성격일 거라는 거죠.
다빈치의 서재에는 관상학에 관한 고대와 중세의 저작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학적인 토대없이 자칫 기계적인 환원론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이론들에 늘 거리를 두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사람의 성격을 ’에토스’, 순간적인 감정을 ‘파토스’로 구별하고 있는데요. 다빈치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바로 ‘파토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이 예수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라고 말한 순간, 제자들이 보여주는 표정과 제스처를 통해 사도들이 그 순간 느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정신의 움직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빈치는 생김새와 제스처에 그 사람의 존재가 드러난다고 믿었습니다. 유다를 예로 들어볼까요? 유다는 좁은 이마에 매부리코, 하관이 튀어나오고 입꼬리가 내려갔습니다. 오른손으로는 돈주머니를 꽉 쥔 채 왼손은 쫙 펼쳐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신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합니다.
어둠 속에 잠긴 유다와 달리, 성 요한과 유다 사이에 앉은 베드로는 빛을 환하게 받고 있는데요. 유다와 다르게 넓은 이마에 입꼬리가 올라가 있습니다. 얼굴은 꽤 넓어 보이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 어려있습니다. 베드로 옆의 성 요한은 눈을 감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합니다.
레오다르도 다빈치의 치명적 실패
그런데『최후의 만찬』은 뛰어난 작품성으로도 회자되지만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손상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것은 다빈치가 당시 벽화를 그릴 때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벽화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는데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인 '프레스코'는벽에 석회를 바른 다음, 벽이 다 마르기 전에 수용성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입니다. 안료가 벽에 스며들면서 마르기 때문에 작품이 완성되면 수정이 어렵습니다. 화가들은 하루 작업 분량을 계산한 다음 치밀한 계획 아래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사초가 그린 『성삼위일체』,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조토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프레스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모두 프레스코 기법에 의해 그려진 겁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을 주문받을 때까지 다빈치는 한 번도 프레스코를 그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승이었던 베로키오 역시 프레스코화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기술을 배우지도 못했죠. 주로 유화를 그리면서 몇 년에 걸쳐서 수정하는 걸로 유명한 다빈치는 재빨리 끝내야 하는 프레스코 기법에 적합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속도에 맞는 방법을 새로 개발합니다. 회반죽벽이 완전히 마른 다음에 흰색 돌가루를 바릅니다. 그 위에 다시 흰색 밑칠을 하고 유화물감과 템페라를 섞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화물감은 기름으로, 템페라는 계란노른자로 안료를 섞는데요. 프레스코 기법과 다르게 여러 번 덧칠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였고 누구보다 탐구심이 강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수도원의 식당에 그려진 그림이다 보니 하루 세 번 수십 명분의 식사에서 나오는 습기뿐 아니라 바로 옆 부엌에서의 열기와 습기는 그림에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벽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죠. 그 이후 500여 년의 시간은 『최후의 만찬』에게는 너무나 모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예술가열전』을 남긴 바사리의 증언에 따르면 1550년대 중반에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1652년에는 식탁이 그려진 벽에 문을 만들어 예수의 다리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복원을 위한 시도를 했지만 그럴수록 상태는 더 악화되어 갔죠. 1500년, 1800년에는 밀라노에 홍수가 나서 벽화가 완전히 물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침공했을 때는 벽화가 그려진 식당이 마굿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 때는 건물이 폭격당하기도 했고요. 오랜 세월 온갖 풍파를 견디던 끝에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1년 9개월간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져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인류가 지켜낸 위대한 예술 작품

복원 결과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복제품을 복원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진품의 흔적이 너무 희미해진 상태에서 당대에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복제한 작가들의 작품을 참조할 수밖에 없던 데서 나온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해도 세부적인 표현 방식을 알기 어려운 부분은 연한 수채화로 마감하여 다빈치의 테크닉이 낳은 문제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두었습니다.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세 달 전 온라인으로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합니다. 개인관람은 허용되지 않고 같은 시간에 예약한 사람들(30명 한정)과 함께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15분간만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우피치에서 완벽한 상태로 보존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본 것과 달리 이 그림 앞에서 느끼는 감동은 복잡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이 놀라운 작품을 보존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이 정도나마 복원해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업한 바로 그 공간에서, 홍수와 전쟁과 기술적인 문제로 인한 온갖 풍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여전히 살아 남아 작품 제작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끝)

※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