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에 빠진다, 슬램덩크서 스즈메까지 J컬처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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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의 귀환
지난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하 스즈메)’이 개봉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단기간 100만 기록을 세웠다.(17일 현재 124만) ‘스즈메’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실감과 불안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환기시키는 감동과 치유의 영화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11월 개봉해 1000만 관객을 가볍게 돌파했다. ‘너의 이름은.’(2017), ‘날씨의 아이’(2019)에 이어 신카이 마코토 ‘재난 3부작’ 연속 1000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이다.
장르 다양성이 틈새시장 공략
강제징용 배상 합의로 한일 관계가 다시 화두가 된 지금, 일본 대중문화에 훈풍이 불고 있다. 이번주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스즈메'(1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2위),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마을로’(4위) 등 일본 애니가 휩쓸었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부터 바람이 시작됐다. ‘오세이사’는 1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지난해 수입 실사 영화 흥행 1위에 올랐고, 원작 소설도 베스트셀러 차트에 머물고 있다. 국내에서 일본 실사 영화가 100만 관객을 넘긴 것은 2002년 ‘주온’ 이후 21년 만이다. ‘슬램덩크’는 17일 기준 누적 관객 수 405만명으로, ‘너의 이름은.’(380만)의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 만화 차트도 1~22위까지 슬램덩크로 도배되며 단행본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
우리 극장가의 코로나 회복세가 느린 탓도 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미국·유럽의 관객 회복세가 80%인데 한국은 50%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더디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콘텐트 개봉을 미루게 되고, 관객은 극장을 더욱 멀리하는 악순환의 와중에 ‘슬램덩크’처럼 고정팬이 많은 일본 애니가 레트로 감성까지 자극시키며 흥행이 폭발했다”고 분석했다.
‘일상의 회복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강태웅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원래 일본 애니를 즐기는 팬들의 움직임이 있다. 대중문화 개방 이후 일본에서 지브리(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이 개봉해 1위를 하면 한국에서도 곧바로 1위를 하는 게 패턴이었는데, ‘노재팬’을 겪다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라며 “일본에서도 지금 애니가 계속 잘 되고 있고, ‘스즈메’나 ‘귀멸의 칼날’이 최고 성적을 올렸으니 한국 팬들도 당연히 본다”고 말했다.
사실 경제 흐름이 막혔던 ‘노재팬’ 시국에도 문화는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2019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 만큼 폭발력은 없었지만, 무려 259일 동안 상영되며 ‘국내 최장기 극장 상영 영화’(2위 ‘서편제’ 231일)가 됐다. 2021년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도 그해 누적매출 200억원을 넘긴 첫 영화로, 예스24 상반기 결산 만화 차트 1~25위를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석권하기도 했다.
원래 일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1950년대 이미 사람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상상했던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철완아톰’은 1963년 일본 최초의 TV애니로 제작돼 영미권에 수출됐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1988)는 지난해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가 연극으로 제작할 정도로 세계인에게 친숙한 글로벌 콘텐트다. 지난해 포켓몬빵 광풍을 부른 ‘포켓몬스터’(1996)는 증강현실게임 ‘포켓몬고’ 등 꾸준히 전세계에 문화 현상을 일으키며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누적 매출 1180억 달러 추정)을 올린 미디어 프랜차이즈로 군림하고 있다.
앞선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글로벌 웹툰 시장 규모가 37억달러(약 4조8300억원)를 넘어선 반면 망가(일본 만화) 시장 규모는 2650억엔(약 2조5700억원)으로 축소경향이라고 분석했지만, 종이책 매출만 따진 수치다. 일본출판과학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전자책을 포함한 일본 만화 매출은 지난해 6770억엔(약 6조5600억원) 규모로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애니메이션 시장도 2021년 매출 2조7422억 엔(약 26조원)으로 전년 대비 13% 커지며 역대 최대 규모가 됐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넘어 일본 대중문화 전반을 보면 몇년 새 부쩍 활력을 잃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콘텐트 시장에서 OTT 등 디지털 비중이 작아서다. 강태웅 교수는 “일본은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한편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저작권법이 까다롭고 아날로그 체제를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내수시장이 크다 보니 OTT시대가 아직 안 왔다. 드라마의 경우 OTT보다 제작비가 약한 지상파가 모험을 못하고 안정적인 국내 시청률이 보장된 출판문화 기반의 제작을 지속하니 글로벌 경쟁력은 떨어진다. 디지털 시대에 맞게 저작권법을 고치자는 목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자극적인 소재도 덜해 졌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 ‘플랜 75’(2022),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브로커’(2022) 처럼 초고령화와 가족해체 등 현실문제를 조명하거나, 드라마 ‘일본침몰’(2021)이나 신카이 마코토 ‘재난 3부작’ 처럼 위기를 담담하게 응시하는 콘텐트가 많다. 복고 트렌드도 강하다. 한동안 침체였던 NHK 대하사극의 시청률이 다시 올라가고, 시대극 영화도 부활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처럼 과거를 동경하고 소박한 일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힐링·향수템이 대세다. ‘스즈메’도 고 히로미·마쓰다 세이코·나카지마 미유키·이노우에 요스이 등 7080 국민가수 메들리가 향수를 자아낸다.
이런 코드는 복수와 폭력, 불평등 등 자극적인 소재 일변도인 한국에서 틈새시장이다. 일본 대중문화는 다양한 장르를 꾸준히 발전시켜 왔고, 그중 우리에게 부족한 장르가 마니아층을 형성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꼭 챙겨본다고 소개한 ‘고독한 미식가’를 비롯해 ‘심야식당’ 등 한국에서 인기를 끈 일드는 음식이나 잔잔한 일상을 소재로 한 힐링 계열이다.
슬램덩크 현상도 향수 마케팅 덕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웹툰의 시대에 90년대 만화 왕도물을 추앙하는 대중심리가 세대 불문이라 ‘현상’이 됐다. ‘슬램덩크’를 13회 관람했다는 30대 여성 조민정씨는 “상영관마다 오리지널 티켓, 포스터 등 특전 MD가 달라서 경기도까지 가고 있는데, 만화를 워낙 좋아해서 보고 또 봐도 재밌다. 만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특유의 작화 스타일 때문에 만화를 다시 보고 싶어져 전집까지 구입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도 “고독한 미식가 봤다”
지난해 포켓몬빵 띠부씰 수집 광풍이 떠오르는 과몰입인데, 오히려 원작을 보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이 장기 흥행을 견인하고 있다. CGV에 따르면 10~30대 관객이 66%고, 예스24의 슬램덩크 만화 구입층도 2030 여성 비중이 43.9%다. 이들은 슬램덩크 굿즈 팝업스토어를 찾아 일본 여행을 갈 정도다. ‘스즈메’도 한정판 굿즈와 콜라보 디저트를 파는 홍대 앞 팝업 카페가 문전성시고, 직접 캐릭터 굿즈를 만들어 SNS에 자랑하는 팬들도 많다.
강태웅 교수는 “전형적인 일본 대중문화 마니아의 행동”이라며 “과거 쟈니즈 아이돌 팬덤처럼 애니 팬도 캐릭터에 빠져드는 게 특성이다. ‘슬램덩크’도 단순히 옛날 농구만화라 농구팬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20대 여성 사이에서 캐릭터별로 팬덤이 생겨 장기 흥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동진 평론가도 “한국에서 일본 영화가 흥행할 땐 늘 마니아들이 움직인다”면서 “특히 ‘슬램덩크’와 ‘오세이사’ 현상은 우리 극장가의 극단적 니치화를 보여 준다. ‘스즈메’는 작품성도 좋지만 신카이 마코토 마니아 덕이 크다. 당분간 극장가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와 고정 마니아층이 있는 장르만 성공할 것 같다”고 진단했다.
흥미로운 건 민감한 한일 정세가 대중의 문화 수용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게 된 현실이다. 국격이 향상되면서 우리 정서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걸까. 조지선 연세대 심리학과 객원교수는 “젊은 세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소셜 아이덴티티가 다르다”면서 “집단적 피해자 마인드를 가진 기성세대가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며 취향 공개에 소극적이었다면, 상처를 많이 극복한 지금은 집단의 기억보다 개인의 선택과 기호가 중요해졌다. 일본 문화를 남들보다 잘 향유하는 것도 힙한 취향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게 요즘 세대”라고 해석했다.
노재팬과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시절에 대한 반작용으로 외교 현안과 문화적 기호를 구별할 여유가 생겼다는 시각도 있다. 강태웅 교수는 “한일관계는 기복이 심했지만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경색 국면이 3년 넘게 이어진 적은 없었기에 현 상황은 그에 대한 반동현상”이라면서 “이 분위기를 그간 약해진 민간교류와 문화교류를 토대부터 다시 쌓아나갈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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