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친근감에 호소하는 미디어 총력전
[2024 미국 대선과 미디어]
[미디어오늘 박상현 오터레터(OTTER LETTER) 발행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미국인 중에는 조지 W. 부시를 “우리 세대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부시는 9·11 테러를 막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명분도 없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중동 지역을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들었다. 철저하게 부자들을 위한 경제 정책으로 복지와 사회적 인프라를 희생시켰고,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 때는 연방정부의 무능함까지 드러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2000년 대선에서 당선될 당시, 미국인들은 그가 그다지 특히 경쟁 후보였던 민주당의 앨 고어 부통령과 비교했을 때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미국 유권자는 왜 그런 부시를 선택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당시 많은 미국인이 너무 똑똑해서 거리감을 주는 앨 고어보다는 말실수가 많아도 친근해 보이는 조지 W. 부시에게 더 끌렸다는 얘기가 많다. 당시 이를 잘 보여준 표현이 “함께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후보는 부시”라는 말이었다. 많은 유권자가 국가의 운영 능력보다 호감도를 기준으로 대통령을 선택했고, 부시 대통령의 무능한 정치는 그런 선택의 결과였다.
민주당은 그 때의 결과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후보는 똑똑할수록 유권자,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유권자에게 친근감을 잃기 쉽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미디어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락 오바마는 존 매케인을 상대로 압승했던 2008년과 달리 2012년에는 공화당 밋 롬니의 강한 도전을 받았고, 이때 조지 부시가 사용했던 친근감 전략을 구사했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스포츠 칼럼니스트와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기 소셜미디어 레딧에 등장해 일반 사용자들과 스스럼 없는 문답을 나눴다. 대통령이 제일 좋아하는 농구 선수, 백악관의 맥주 제조법 같은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는 국정 운영 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유권자가 친근감을 느끼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얼마든지 그런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태도였다.
오바마가 2008년 선거 때는 사용하지 않았던 그런 전략을 2012년에 사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008년의 오바마는 경험 많은 매케인을 상대로 싸우던 젊은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국정 운영 능력을 증명해야 했지만, 2012년에는 이미 대통령이었고, 상대가 친근감이 떨어지는 롬니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한 후보는 이미 대통령을 4년 동안 한 사람이고, 다른 후보는 현직 부통령이다. 이들에게는 국정 운영 능력의 증명보다 호감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게다가 '트럼프의 이대남 미디어 전략'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두 사람의 지지도는 더 이상 올라갈 여지가 없을 만큼 유권자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상황이라, 이제는 웬만해서는 투표하지 않을 젊은 유권자들을 노려야 한다. 카멀라 해리스와 도널드 트럼프가 2000년의 부시, 2012년의 오바마가 사용한 친근감을 통한 호감도 전략에 집중하는 이유다.
트럼프는 20대 남성들이 많이 듣는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솔직한 얘기 진행자의 마약 복용과 관련한 얘기도 나왔다를 나누고 있고, 카멀라 해리스는 최근 미국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팟캐스트 '콜 허 대디(Call Her Daddy)'에 출연해 여성 진행자와 여성들끼리만 할 수 있는 대화 여성의 몸, 탐폰 같은 소재가 등장했다 를 나눴다. 진행자 알렉스 쿠퍼(Alex Cooper)는 평소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정치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리스와의 인터뷰로 많은 반발을 샀지만, “트럼프도 인터뷰 출연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했다.
CNN 같은 매체에는 짧고 형식적인 인터뷰만 허락하는 두 후보가 이렇게 팟캐스트에 출연해 평소 방송이나 선거 유세에서는 하지 않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고 미디어 업계에서는 불만도 나온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지적도 있다. 팟캐스트 인터뷰에서는 전통적인 언론 매체와 달리 “소프트한” 질문들만 던지기 때문에 후보에 대한 검증 효과가 없고, 결국 인기 연예인을 출연시켜 홍보를 해주고, 구독자를 모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지지자들은 그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방송 인터뷰는 후보가 꺼릴 함정 질문들을 골라 던진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언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후보를 검증하는 용도가 아니라, 후보가 당황하는 장면을 찍어서 바이럴을 만들려는 목적이 있다는 게 이들의 항의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와 상관없이 후보들이 팟캐스트를 선호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난감한 질문을 피하면서 형식적인 답을 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면서 청취자들에게 자기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면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점도 있다. 후보들이 선택하는 팟캐스트들 중에는 웬만한 방송 뉴스의 시청자 수를 뛰어넘는 오디언스 숫자를 자랑하는 곳들 많고, 무엇보다 나이, 성별 등으로 분명하게 구분된 구독자를 갖고 있다. 특히 선거를 몇 주 앞둔 상황에서 후보들은 1분 1초를 아껴 원하는 유권자 집단을 정밀하게 겨냥해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그런 용도에 팟캐스트만큼 확실한 매체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선거 운동은 이렇게 제한된 유권자들을 친근감을 중심으로 집중 공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될까? 그런 미래는 과연 바람직한 걸까? 트럼프는 아니지만, 해리스의 경우 자기에게 호의적인 팟캐스트에 출연해서도 정책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이런 매체의 특성상 후보의 정책에 비판적이고 전문적인 의문 제기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고 후보의 '인간적인 면'만 홍보한다면, 유권자들은 “맥주 한 잔 같이 하고 싶은” 조지 W. 부시를 뽑았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세분화 된 오디언스도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인기 정치 팟캐스트 '팟 세이브 어메리카(Pod Save America)'를 진행하는 댄 파이퍼(Dan Pfeiffer)는 진보적인 후보가 친트럼프 팟캐스트에 찾아가서 그들의 생각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안전한 곳에서 호의적인 호스트, 청취자와만 만나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트럼프가 사라진다고 트럼피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불편해도 생각이 다른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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