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를 파면 유물이 쏟아지는 신라 천년의 도시
경주는 거의 모든 땅 밑이 과거 신라시대의 중심 생활 공간이자 무덤, 사원, 도로, 시가지 터전이었다. 지금도 가벼운 주택 공사, 도심 도로 포장만 해도 삼국~통일신라~조선 각 시대의 유물·도자기·벽돌·유구(옛 건축 터)가 쏟아져 나온다. 실제 경주 시가지 중심부만 해도 보문단지, 월성~황룡사~첨성대 일원, 대릉원, 계림, 남산 일대까지 모두 고도(古都) 보존 및 문화재구역으로 구분되어 건축과 개발이 극히 제한된다.
심지어 소규모 주택 리모델링만 해도 문화재청 및 시청 허가가 필요하다 보니, 땅을 수 미터만 파도 문화재 발굴이 먼저이고, 개발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수백, 수천 년 전의 왕릉, 사찰, 귀족저택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을 정도로 지하 매장층이 두텁게 깔려 있다.

지하철 건설=도시 전체를 발굴하는 셈
대도시는 교통 혼잡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도 수백 미터 땅을 깊이 파며 지하철을 건설해 왔다. 하지만 경주만큼은 계획 자체가 어렵다. 노선을 조금만 직선으로 긋거나, 역 출입구를 뚫으려고 땅을 파내면 문화재 영향 평가, 사전 조사, 시굴·정밀 발굴 등을 선행해야 하는데, 웬만해서는 일반 생활기반시설을 넘어서는 고대 유구·유물이 반드시 나온다.
결국 경주 중심부 어디를 팠다 하면 국보·보물급 유물이 나오고, 수년~수십 년에 걸친 매장문화재 발굴과 조사, 반환, 보존 작업이 대규모 공정에 우선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예산·기간·행정절차·지역 여론 모든 면에서 서울·대구·부산의 ‘교통 인프라 확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이어진다.

현행법상 ‘전면 금지’에 가까운 문화재 보호구역
경주 시가지의 상당수는 「문화재보호법」, 「경주 역사문화도시특별법」 등의 조항에 따라 1~3등급의 고도 지정·문화재 지정구역으로 묶여 있다. 차량을 위한 지하차도부터 상하수도, 전력·지하통신망조차 보존구역 통과 시 특별한 시굴‧감리‧감독을 받아야 한다. 하물며 깊이와 범위가 압도적으로 큰 지하철 공사의 경우, 원천적으로 추진 자체가 제한되거나, 시 전체를 뒤엎는 대발굴 없이 착공이 불가하다.
실제 ‘경주 도시철도 도입 타당성 검토’에서는 1km라도 발굴이 걸리면 공사기간이 수십 년, 예산은 수조 원대로 뛴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경제적 타당성 제로—인구·수요도 안 맞는 도시 구조
경주는 인구 23만 명 내외의 중소도시다. 서울, 부산, 대구는 물론이고, 대전·광주보다도 인구가 적다. 현재 버스·택시 등 대중교통이 도심 전체와 관광단지를 비교적 잘 연결하고 있으며, 극심한 차량정체나 교통 혼잡도 구조적으로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관광 시즌 주말·휴일에는 임시셔틀이나 외곽 주차장 운영으로 혼잡 최소화가 가능하다.
수십 년 전부터 지하철이 들어간 검토조차 없었던 이유는 ‘문화재 리스크’가 절대적으로 크고, 그 외 나머지 경제성, 수요 구조, 도시 확장 가능성 모두에서 다른 대도시와 근본적으로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역사적 유산 보존이 곧 도시 경쟁력
경주만은 지하철, 대규모 도로, 지하상가를 포기하면서 오히려 '살아 있는 역사도시'의 정체성이 더 강화되고 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새롭게 발굴되는 유물들마다 지역, 국가, 세계문명사를 고스란히 증언한다. 결코 “지하철 노선 하나 깔자고 수천 년 유산을 발굴·파괴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도 이미 견고하다.
특히, 각종 국제학술행사, 관광박람회, 문화재 세계화 등을 통해 경주 자체가 ‘걷거나, 버스·자전거로 이동하며, 천년 유적을 감상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지하철 부재는 한계가 아니라 고유 아이덴티티로 기능한다.

'파면 유물, 지어도 불가능'—경주만의 영원한 선택
경주의 지하철 부재는 도로 교통의 불편이나 경기 침체 때문이 아니다. 천년 고도 위에 앉은 시간의 무게, 어느 공간을 파도 유구가 나오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는 도시 DNA, 그리고 이를 압도할 만큼의 인구·경제 요인이 존재하지 않는 구조적 현실이 모든 답을 담고 있다.
서울도, 부산도, 대구도, 광주도, 대전도 각자의 이유로 지하철로 ‘편리함’을 선택했지만, 경주는 오히려 지하 공간의 건드림 없는 ‘온전한 보존’ 자체가 미래 세대를 위한 최고의 가치라는 점이, 또 한 번 증명되고 있다.
어쩌면 경주야말로, “지하철은 만들 수 없는 도시—이 자체가 최고의 명품”임을 미래에도 계속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