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비 서킷 스토리 中] 꼭 가보고 싶은 곳, 악당, 영웅이 눈을 감은 곳까지
[편집자주]
모터스포츠는 고가의 취미다. 넓은 부지도, 비싼 경주차를 구성할 기술도, 망가지면 빠르게 고칠 수 있는 여력도 필요한 영역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해외 서킷 방문을 로망으로 여기기도 한다. 지난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각종 모터쇼와 모터스포츠가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많은 모터스포츠인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당시, 이 감정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기 위해 박성연 드라이버가 전세계 서킷 중 인상 깊었던 특별한 코너 10개를 골랐다. 여러 서킷 행사에서 그녀에게 스포츠 드라이빙을 배워왔다는 나름 특별한(?) 인연에 기대어 허락을 받아 글을 옮겼다.
[워너비 서킷 스토리 上] 개점휴업을 아쉬워하며 세계 서킷을 돌아봤다
[워너비 서킷 스토리 中] 꼭 가보고 싶은 곳, 악당, 영웅이 눈을 감은 곳까지
[워너비 서킷 스토리 下] 이런 서킷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있었다
6. 마운트 파노라마 모터레이싱 서킷 – 포레스트 엘보우(Forrest’s Elbow)
경주차에 장착된 온보드 캠을 보며 ‘뭔가 라구나세카 같은데 뭔가 아닌듯 하다’고 생각되면 마운트 파노라마 모터레이싱 서킷일 가능성이 높다. 두 서킷을 구분하는 포인트 중 하나는 서킷 주변이 평평한 벌판이라면 라구나세카, 산을 깎아 만든 듯한 벽이 있다면 마운트 파노라마다.
말 그대로 산을 깎아 만든 도로를 이용한 서킷으로 경기가 없는 평소에는 공공도로로 사용된다. 12시간동안 내달리는 리퀴몰리 바서스트 12Hours 내구레이스 등이 열리는 곳으로 시드니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모터스포츠 팬이라면 한번 방문해 볼 만하다. 주의할 점은 평소엔 호주 도로법에 따라 시속 60km 이내로 좌측통행 해야 한다는 것과 간혹 캥거루가 튀어나온다는 것.
서킷을 평면도로 보게 되면 포레스트 엘보우가 사람 팔꿈치처럼 살짝 튀어나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그 때문은 아니다. 1947년 모터사이클 선수 잭 포레스트가 이 코너에서 넘어지면서 팔꿈치를 다치는 사고가 있었고 이것을 계기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의 특성 상 코너에서 미끄러지거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라이더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지역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안전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2000년을 마지막으로 바이크 경기가 열리지 않게 됐다. 다만 자동차 경기는 지금도 꾸준히 열리고 있다.
7. 헤레즈 서킷 – 로렌조 코너(Lorenzo Corner)
호세 로렌조는 당시 야마하의 간판 라이더였다. 젊은 나이임에도 실력도 우수하고 성적도 좋다. 국산 라이딩 기어 제작 업체 홍진 HJC의 후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런 그에게 스페인 헤레즈 서킷은 아주 복잡미묘한 곳이 되었다.
2013년 모토GP 스페인전 예선 경기가 펼쳐진 날은 로렌조의 26번째 생일이었다. 그의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예선전 결과도 좋아 선두에서 출발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폴포지션도 차지했다. 그에 대한 부상으로 헤레즈 서킷의 마지막 헤어핀 코너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 영광도 얻었다. 여러모로 좋은 일이 겹친 최고의 날이 될 ‘뻔’ 했다.
사건은 다음날 펼쳐진 결승전에서 발생했다. 스타트가 다소 불안했지만 그래도 선두권 경쟁에서 밀려나진 않았다. 1위로 달리고 있던 다니 페드로사와 격차가 있었지만 2위는 지킬 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다만 랩솔 혼다팀의 악당(?) 마르케즈가 뒤에서 그를 강하게 압박했다.
마르케즈의 눈부신 방해공작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타났다. 마지막 바퀴(랩)의 마지막 코너에서 로렌조를 추월하며 2위로 결승선을 넘은 것. 이 마지막 코너가 바로 전날 로렌조가 생일 선물로 받은 바로 그 ‘로렌조 코너’다. 혹자는 ‘마르케즈가 마르케즈 했다’고 표현한다고.
서킷 코너에 현역 선수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그런 영예를 생일선물로 받았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나. 코너 이름을 받으면서 “소수의 몇 명만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지만, 코너에 자기 이름이 붙은 사람은 그보다 적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바로 다음날 가슴 아픈 추월을 겪은 그의 속이 어떠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승 직후 마르케즈와 악수도 안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기분은 많이 안좋았을 것.
8. 오토드로모 엔초 에 디노 페라리, 이몰라 – 탐부렐로(Tamburello)
모터스포츠를 이야기하면서 에일톤 세나를 빼놓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의 업적을 이야기하려면 하룻밤을 꼬박 지새도 모자라다. 이몰라 서킷 탐부렐로 코너는 이런 그가 숨을 거둔 코너다.
탐부렐로 코너 자체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구간이 아니다. 마지막 코너를 벗어난 직후 가속해 그리드 라인이 있는 메인 스트릿을 지나며 나오는 코스의 첫번째 코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고속 코너였다.
서킷 뒤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안전지대를 충분히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1994년 이몰라 서킷에서 펼쳐진 산 마리노 그랑프리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공식 경기 이틀전 연습 주행에서는 당시 조던 레이싱 팀 소속의 루벤스 바리첼로가 방호벽에 부딪히며 경기를 포기해야 할 만큼 큰 부상을 입었고 하루 전에 펼쳐진 예선전에서는 데뷔 첫해의 신에 드라이버 롤렌드 라첸버거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에일톤 세나까지 한 경기에서 2명이 목숨을 잃고 한 명이 큰 부상을 입은 것.
당시 그가 탔던 윌리암스의 머신 결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앞선 사고로 인한 세나의 심리적 불안 등 사고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해당 구간은 속도를 낮춰서 통과해야 하는 연속 코너(시케인 코너)로 변경되었으며 세계자동차경주연맹(FIA)는 머신과 드라이버, 팀 크루에 대한 안전 규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탐부렐로 코너 뒤쪽에는 에일톤 세나를 추모하기 위한 동상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경기가 없는 날에도 찾아와 꽃을 두고 간다.
9. 맨 섬(Isle of Man) – 구즈넥(Goose Neck)
영국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위치만 맨(MAN) 섬은 아주 조용한 섬마을이다. 투어리스트 트로피(TT, Tourist Throphy) 바이크 레이스가 열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맨섬TT는 시내 공용도로와 산길을 합쳐 약 60km를 도는 구성이다. 시간을 측정하는 타임트라이얼 방식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미친듯이 땡기는 미친 경기’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실제로 매년 사망사고가 발생할 정도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 수많은 코스 중에서 시내와 산길을 가르는 경계에 해당하는 구스 넥은 선수와 팀, 관람객 모두에게 중요한 포인트다. 시내를 빠져나오자 마자 자리한 급격한 오르막 우측 코너이기 때문에 속도를 (비교적) 많이 줄여야 하는 구간이다.
팀 크루는 이 구간을 이용해 라이더에게 사인 보드로 신호를 주기도 하며 관람객들은 그림 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명당 경쟁을 펼치기도 한다. 평균 시속 200km를 자랑하는 경기라서 ‘비교적’ 느릴 뿐 여전히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이런 구간이 아니면 소리만 듣게 되는 경기이기도 하다.
섬마을의 좁은 도로를 뚫고 나와 쫙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급격히 코너를 꺾으면 보이는 구불구불한 산길. 이런 코스를 내달리는 무서운(?) 사람을 보는 것이 마니아들에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상상에 맡긴다. 직접 달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저배기량 스쿠터로 기분이라도 내보면 어떨까.
10.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 – 풀 코스 턴8(Full Course Turn8)
마지막 코너는 애증의 장소,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이다. 그 중에서도 풀 코스 기준 8번 코너가 그녀가 가장 아끼는 코너다. 평상시 열리는 상설코너 기준으로는 5번 코너에 해당한다.
이곳을 꼽은 이유는 내리막과 S턴이 만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짜릿한 고속 코너라는 것.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출력이 높은 차일수록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한 난이도가 있다. 더군다나 브레이크 조작 없이 가속페달만을 이용해 통과하는 것이 기록 단축의 포인트이기 때문에 승부욕도 불태울 수 있다는 것.
‘조금만 더 하면 신기록 세우겠는데…’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있어 계속 한계를 시험하게 된다고 한다. 마치 유명 레이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지의 영역이 차의 한계를 높여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빠르게 통과하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 나를 추월하기 위해 다가온다면?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울지도 모른다.
글 : 박성연 드라이버
편집 : 카매거진 최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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