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피치] 1992년 KBO리그의 ‘아이돌’ 염종석과 슬라이더

애초 ‘머니피치’에서는 각 팀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팀의 결정적 순간은 대부분 우승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다양한 이야기를 얽히고설키게 한다고 해도 식상한 소재의 나열에 그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단순히 팀의 결정적 순간만이 아닌 선수나 지도자, 그리고 관계자의 모멘텀이 된 순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팀의 우승과 맞바꾼 어깨와 팔꿈치. 그에 따른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있다고 밝힌다. 롯데가 오랫동안 'V3'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진=머니피치)

“뛰고, 또 뛰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뛴 기억밖에 없다.”

1992년 신인 시절, 염종석 동의과학대 감독이 부산의 야구 열기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그때는 신인이라 연봉도 적어 차가 없으니까,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했다”라면서 항상 자신을 알아본 팬들이 몰려들어 “요즘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라고 밝힌다.

“한 번은 토요일에 강성우 선배랑 함께 남포동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초·중·고가 토요일에는 오전 수업을 했다. 그날도 마스크를 쓰고 고개도 숙여 사람들이 못 알아보게 하면서 버스를 타고 갔다. 남포동에 도착해서 강성우 선배에게 ‘형, 내립시다’라고 말하고, 하차한 후 고개를 들었더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바로 앞에서 딱 쳐다보고 있는 거다. 오늘이 토요일인 줄 몰랐는데, 수많은 학생을 보며 벙쪄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순간적으로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니까, 누군가 ‘염종석이다!’라고 외치고 따라오는 거다. 그 순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냅다 뛰고, 또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쫓아와서 영화 속 도망자처럼 지하철 역 기준으로 정거장 2곳 정도 뛰어 도망쳤다. 그런데도 끝까지 악착같이 뛰어오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헉헉’ 거리면서도. 한 십여 명 정도라서 멈춰서 모두에게 사인해 주고 웃으며 헤어졌다.”

“그해 우승하고 광복동에 있는 롯데 1번가에서 사인회를 열었다. 지하상가 분수대 광장에 책상을 놓고 8명 정도가 앉아 사인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막 밀고 들어오면서 저를 포함해 선수들이 완전히 갇혀 버렸다. 그때는 지금처럼 전문적인 경비업체가 없어 관리자가 몇 분 나온 정도였다. 그래서 경찰을 불러 가까스로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근데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지상에도 엄청난 인파가 몰려드는 거다. 그대로 뛰었다. 팬들을 피해 뛰고, 또 뛰고. 어마어마하게 뛰어다녔다. 뛰는 게 힘들긴 했지만 즐거웠다. 부산 팬들의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1992년 염종석은 KBO리그의 아이돌이었다. 그해 고졸 신인으로 입단해 35경기에 나와 204.2이닝을 던지며 17승 9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3을 기록하며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데뷔전에서는 2.2이닝 4실점(2자책)하는 부진한 투구를 보였지만 이후 9승을 모두 완투승으로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선동열의 8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를 저지한 것 역시 그였다. 또한, 포스트시즌에서도 30.2이닝을 던지며 4승 무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1.47을 기록하며 롯데의 ‘V2’에 크게 공헌했다.

KBO리그에는 '안경 낀 오른손 투수가 에이스로 활약하면 롯데가 우승한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사진=롯데 제공)

사실 염종석은 부산고를 졸업할 때 롯데가 아닌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고교 3학년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팔꿈치 부상도 있어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어머님이 대학에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저는 어차피 야구 선수로 꿈이 일단 프로 유니폼을 입는 거니까, 프로에 직행하고 싶었다. 요즘 선수도 그렇지만, 저도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좇아, 그 길만 바라보고 꾸준히 미친 듯이 연습했다. 그렇기에 다른 선수보다 먼저 프로에 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에 어머님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입원비 등도 필요한 것도 있어, 대학이 아닌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됐다. 꿈에 그리던 롯데 유니폼을 입었지만 곧바로 선발로 뛸 것으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프로에 가서 슈퍼스타가 될 거라는 것은 그냥 막연한 꿈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는 정말 신기하게 생각했다.”

손에 닿지 않는 까마득한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감한 것은 그해 2월 스프링캠프에서 치른 연습 경기 때라고 한다.

“아마 2월 16일로 기억하는데, 일본에서 스프링캠프를 하는데 일본 프로팀 1.5군과 연습 경기를 치렀다. 선발로 나가서 포수가 던지라는 대로 던졌더니 4.2이닝 2실점했다. 홈런을 하나 맞아 2실점한 게 못내 아쉬웠다. 경기가 끝난 뒤 강병철 감독님을 비롯해 코칭스태프와 선배님들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런 말을 듣고 외야에서 쿨다운을 하는데 일본 선수 몇 명과 마주쳤다. 통역을 거쳐 ‘몇 살이냐?’라고 물어서 ‘19살’이라고 대답했더니 ‘너무 잘 던진다’면서 극찬을 하더라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그때는 ‘내가 과연 프로야구에서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스프링캠프 첫 연습 경기에 선발로 내보내 주신 걸 보면 감독님이 조금 기대하시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KBO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이 생긴 것은 시범 경기 때다. 제가 4~5경기를 던지면서 2실점만 내줬다. 그때 ‘프로야구도 그렇게 벽이 높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느낌 그대로 염종석은 1992년에 시즌은 물론이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그의 최고 구속은 140km/h 중반대. 그 당시로 보면 빠른 공이지만 타자를 압도할 속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그해 최고 투수의 자리에 오른 데는 “타자가 알면서도 못 친다”는 슬라이더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니피치’에서는 염종석 동의과학대 감독을 만나 그 슬라이더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타자가 알면서도 못 쳐' 염라대왕이라고 불린 염종석표 슬라이더 그립. (사진=머니피치)

“아마 때나 프로 때나 슬라이더 그립은 똑같다. 다만 구위에서 차이가 난 것은 아무래도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 몸에 힘이 더 생긴 거에 기인한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밥 먹듯이 스피드건을 재던 시절은 아니었지 않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때 구속은 평균적으로 135km/h에서 136km/h 정도 나왔던 것 같다. 제가 워낙 체격 조건이 좋으니까, 롯데에서 한번 키워볼 만하다고 생각한 거고. 어쨌든 고교 시절에는 미친 듯이 시키는 대로 운동만 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지쳐 있었다.

프로에서도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지만 고교 시절보다 연습량 자체는 적었다. 즉, 고교 시절, 체력 운동을 많이 해둔 게 있어서 힘이 부쩍 붙은 듯하다. 게다가, 프로에서는 체계적인 관리도 받았으니까. 구속은 고교 때보다 5~6km/h 정도 늘고, 변화구도 더 힘 있게 확 꺾였다. 공을 힘 있게 때린다는 게 느껴지더라고.

사실 제 변화구는 모두 다 포심 그립에서 변형을 준 거다. 포심 그립을 잡는 가운뎃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위로, 아래로 옮기면서 던져봤거든. 아래로 내렸더니 힘이 빠져서 제대로 안 꺾일 때가 잦았다. 힘 있게 공이 회전하지 못하고 그냥 ‘핑’ 떨어진다. 근데 위로 옮겨서 던지니까 힘이 빠지더라도 공을 좀 눌러주게 되더라고. 그래서 제 슬라이더는 포심에서 조금 위쪽을 잡으면서 실밥을 활용해 던졌다.

포심 그립에서 조금 손가락을 벌리면서 그냥 손목을 활용해 던진 게 커브. 제가 커브는 많이 던지지 않고 간혹 보여주는 편이었는데, 타자나 다른 이들은 슬라이더라고 하더라. 저는 이 커브를 각이 작게 스트라이크를 잡는 용도로 던졌다. 아마도 그게 커터처럼 보여 커브를 슬라이더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볼카운트에 따라서는 조금 각을 크게 해서 유인구로 던질 때는 포심 그립에서 약간 내려서 잡고, 힘 있게 손을 돌려버렸다. 어쨌든 제 슬라이더는 빠르면서 약간 대각선으로 떨어졌다.

올해로 유니폼을 벗은 지 15년째가 되지만 여전히 알아봐 주는 팬들이 있어, 영광이며 황송하다는 염종석 감독. (사진=머니피치)

슬라이더를 던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구종이나 그렇지만 자신감이다. 예를 들어 경기 전에 상대 타자를 분석한 데이터를 보며 그날의 볼 배합 등을 의논하잖아. 그런데 위기 상황 등에서 상대 타자가 슬라이더를 잘 친다고 해도,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공이 슬라이더니까 슬라이더를 던지는 거다. ‘칠 테면 쳐봐라’는 식으로.

그렇게 승부해야 결과가 나빠도 후회가 남지 않는다. 그 타자가 커브에 엄청 약하다고 해서, 커브를 던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 무기를 던지는 것. 요컨대,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면, 결과가 좋든 안 좋든 후회가 남지 않아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던지는 게 우선이다.

현역 시절에 주위에서 저한테 슬라이더를 물어보는 이가 거의 없었다. 사실 제 그립을 따라 한다고 해서 제가 던진 것과 같은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르는 감각이나 그 세기 등은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아는 이들이 부탁해 올 때는 꽤 있다. 아들이 야구를 하는데 슬라이더를 알려달라고. 한 번은 조카가 중학생 투수인데, 슬라이더를 알려 달라는 거다. 근데 저는 중학생에게 슬라이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속구다. 빠른 공 구속이 적어도 130km/h 이상이 나와야 슬라이더나 변화구도 효과가 있다.

특히, 슬라이더는 속구 구속이 나와야 효과를 볼 수 있는 구종이다. 그리고 그립 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캐치볼 등을 하면서 자기만의 감각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저만 해도 초등학교 때 캐치볼을 하면서 실밥을 이렇게 저렇게 잡으면서 연구했다. 그때는 근력이 부족해 같은 그립으로 던져도 대부분 손에서 빠졌다. 그러다가 근력이 붙으면서 공이 딱 꺾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감각을 찾는 게 슬라이더뿐만이 아니라 좋은 공을 던지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저에게 슬라이더는, 슬라이더가 없었으면 1992년의 활약이 있었을까? 당연히 없었을 거다. 당시 선배님들이 알고도 못 친다는 말을 해주실 정도였으니까. 슬라이더는 제가 야구 선수로, 지도자로 야구 인생을 걷게 해 준 공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염종석 감독은 가을만 되면 자신을 찾는 30년의 세월이 올해로 끝나기를 바란다. (사진=롯데 제공)

1992년 염종석은 ‘염라대왕’이라고 불린 슬라이더를 앞세워 팀의 우승도, 골든글러브와 함께 생애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신인왕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고졸 신인이 포스트시즌을 포함해 235.1이닝을 던진 혹사는 그의 어깨와 팔꿈치를 갉아먹었다.

“1992년에 많이 던진 것도 있지만, 그때는 1, 2선발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갔다. 저도 23경기에 선발로 나갔고 12경기는 마무리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선발로 한 경기를 던진 뒤, 이틀 쉬었다가 마무리로 나갈 상황이 되면 마운드에 오르는 식이었다. 많은 이닝보다 이런 식의 마운드 운영이 제 몸에 더 나쁜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할 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플레이오프(삼성전)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뒤, 이틀 쉬고 플레이오프(해태전) 1차전에 구원으로 나와 3이닝을 던지며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3일을 쉰 후 4차전에 완봉승. 하루를 쉰 후 열린 5차전에서 3이닝 세이브를 올렸다. 그때까지는 완전 영웅이었잖아. 야구장 일대가 들썩일 정도로 난리가 났으니까 아픈 줄도 모르겠더라고. 근데 3일 쉬고 1차전 준비를 하는데 팔이 제 팔이 아닌 것 같았다. 팔을 들어 올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도저히 던질 수 없어 못 던지겠다고 했다. 5차전에 진통제 주사를 맞고 마운드에 올랐는데, 6회가 되니까 약효가 떨어져서 2아웃까지 잡고 3실점한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팔꿈치 부상 속에서도 주축 투수로 활약하던 그는 1995년 시즌이 끝난 뒤 마침내 수술대 위에 오른다. “수술해도 괜찮을 거다. 이전과 같은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있었다.” 1996년을 재활로 보낸 그는 1997년에 돌아와 1998년까지 선발 로테이션을 지켜나갔다.

“1999년 스프링캠프를 사이판에서 했는데 투구를 단 한 차례도 못했다. 캐치볼과 롱팩을 하고 나서 아프면 쉬고, 안 아프면 캐치볼과 롱팩을 하고… 그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숟가락을 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수술을 못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구단과 코칭스태프는 수술해라고 하고. 지난해 가을부터 투구는 못했지만 러닝 등 몸은 열심히 만들어서 던질 수 있으니까, 이번 시즌이 끝난 뒤에 수술하자고 했다. 그 대신에 6일 로테이션으로 시작하고 내 상황에 맞게 등판 일정을 조정해 달라는 조건도 붙였다. 그렇게 해서 시즌에 들어가 출발은 좋았다. 시즌 시작 후 45일 동안 5승을 했으니까. 그런데 팔 통증이 끊이지 않고 8월 말이 되니까 도저히 던질 수 없겠더라.”

부산고 2학년 때부터 이어진 혹사. 여기에 지금처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재활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이라, 염종석의 어깨와 팔꿈치는 너덜너덜해질 뿐이었다. 아픔을 참기 위해 진통제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마운드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야구가 좋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중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볼보이를 하는 등. 그리고 만원 관중 속에서 던질 때는 어릴 때 읽은 만화책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또 안타까움도 있었던 것 같다. 1996년에 재활을 하는데 선발 투수가 부족해 대체 선발이 나서는 경기를 볼 때마다 ‘저 자리가 내 자리인데, 내가 저기서 던지고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당시는 물만 먹어도 소화가 안 되는 날도 잦았다.”

과거와 달리 강압적인 지도가 아닌 자율성이 커진 만큼, 선수들이 더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 기량 발전에 힘쓰기를 바라는 염종석 감독. (사진=머니피치)

그렇게 어렵사리 이어오던 선수 생활도 종지부를 찍는 날이 찾아온다. 2008년 시즌이 끝난 후 구단에서는 “이제 염종석 선수의 자리는 없으니까, 은퇴하고 일본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자”라고 제안한 것. 하지만 통산 100승까지 7승만 남겨둔 상황에서 은퇴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00승에 대한 미련이 컸다. 그때 김성근 감독님(SK)과 김인식 감독님(한화)이 함께하자고 연락을 주셔서 이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단장님이 ‘식사 한번 하자’라며 ‘야구장으로 오라’고 하셨다. 사직야구장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는 일식집에 갔는데, 단장님이 창가에 앉고 저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단장님을 쳐다보는데 창문 밖으로 사직야구장 정면이 딱 보이는 거다. 울컥하고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사직야구장에 한화나 SK 유니폼을 입고 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은퇴하고 코치 연수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2009년 4월 5일 은퇴식을 치른 그는 일본 지바 롯데에서 코치 연수를 한 후 2010년부터 롯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5년까지 투수 부분 코치로 활약한 후, 2016년에는 SPOTV 해설위원을 역임. 2020년에는 동의과학대 창단 감독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