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주택에서 '마을 살이' 이어가는 오래된 이웃들

한국인이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은 한 점으로 수렴한다. 전세에서 자가로, 변두리에서 도시로, 더 높고 넓은 대단지 아파트로. 빽빽이 모여 살지만 이웃과의 접점은 예전 같지 않다. 사회경제적 조건이 닮은 사람끼리 헤쳐모이면서 단지 안팎을 가르는 울타리도 높아져만 간다. 모두가 아파트 주거를 선망하는 사회지만,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는 '다른 살이'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십 년 부대껴온 이웃과, 시골 작은 학교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과, 같은 업을 가진 동료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경남도민일보>는 3회에 걸쳐 이들의 보금자리를 소개한다.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달빛 사회적주택'은 완월동 적산가옥에서 5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마을 이웃들의 새 보금자리다. 준공한 지 4년이 조금 지났다. 10가구 대부분이 일흔을 넘길 정도로 고령이지만,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주거 공간을 직접 만들어낸 주역들이기도 하다. 지난 3일 이 공간을 찾아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폈다.

◇주택이면서 마을인 공간 = 완월달빛 사회적주택은 주거용 건물 2동과 공동체 시설 1동, 카페시설 1동으로 구성돼 있다. 마산여고와 예경요양병원을 가르는 큰길 사이 경사진 언덕을 끝까지 오르면, 삼각 지붕과 붉은 벽돌로 된 2층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완월달빌 사회적주택 공용시설에 둘러 앉은 입주민들. /이창우 기자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주민 공용 시설을 마주친다. 널찍한 공간에 벽을 따라 앉을 공간이 마련돼 있고, 한편에는 가스버너와 싱크대 등 취사 시설을 갖췄다. 천장에는 적갈색 나무토막 수십 개가 매달려 있는데, 예전 적산가옥 목조 구조물을 그대로 활용했다. 공용 시설은 주민들이 매일같이 나와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떠는 공간이다.

입주민이 아닌 이웃 사람들도 이곳에서 섞여 지내는 시간이 짧지 않다. 점심 무렵, 주민들이 이곳에서 각자 찬거리를 펼쳤다. 주거 공간은 달라졌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수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다. 안역순(71) 씨는 "매일 나오던 사람이 안 보이면 당장 가서 문을 두들긴다"라며 "아프면 119 대신 나한테 전화하는 바람에 오히려 문제"라고 웃었다. 주민들은 마을 만들기에 앞장섰던 그를 아직도 '반장'이라 부른다. 안 반장은 현재 '완월달빛다방' 카페지기를 맡으면서 공용 비용 충당에 힘쓰고 있다.

공용시설을 지나치면 주거 공간인데, 바깥에서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보인다. 주택 2동 사이에는 널찍한 마당이 있고, 각 건물 2층도 통로로 연결돼 있다. 마당 화초를 손질하던 조외순(79) 씨는 "마당을 공유하니 다 같이 화단도 가꾸고, 보도블록 위로 올라오는 잡초도 다 같이 뽑아야 한다"라며 "워낙 운동을 안 하니 그렇게라도 해야지"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안 반장이 소집하는 공동 청소를 '새마을 운동'이라 부른다.

완월달빛사회적주택 주거동 건축물 2층 사이를 잇는 통로(위)와 아래층 마당(아래) /이창우 기자

맞은편 집에 사는 심판성(86) 씨는 선뜻 집 내부를 소개했다. 방 1칸, 거실 1칸, 욕실에 다용도실이 있는 13평짜리 단출한 공간이지만, 더 바랄 게 없다. 그는 "주택을 짓기 전에는 집 안에 화장실도 없어 공동변소를 썼고, 씻을 공간도 없어 목욕탕을 갔다"라며 "맞은편 집이 조금 더 넓은 것 같기는 하다"라며 웃었다.

무엇보다 오랜 이웃들과 외롭지 않게 늙어가는 느낌이 썩 좋다. 단순 재개발이 진행됐다면 뿔뿔이 흩어졌을 사람들이다. 2층 입주민 이삼철(69) 씨는 "이 동네에 11살 때 왔으니 벌써 60년 가까이 돼간다"라며 "어렸을 때 같이 지냈던 누님들이 다 할머니가 됐는데,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험난했던 주거 실험 = 완월달빛 사회적주택이 지어진 계기는 국토교통부 새뜰마을사업이다. 이 사업은 원래 주거 공간이 열악한 지역 기반 시설을 개선하는 사업이고, 완월지구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계획을 뒤집고 사회적 임대주택을 지어 주민들이 그대로 거주하는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이는 '완월에서 이웃들과 계속 함께 살고 싶다'는 주민 열망, 박진석 경남대 교수(완월 새뜰마을 사업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시민사회 조력자들의 노력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이다.

초창기 사업 계획은 소방도로 개설, 지붕 수리, 벽지 도배 등으로 1인당 사업 수혜율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이었다. 문제는 80년이 넘은 적산가옥 맞벽이 흙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벽지를 덧대는 작업만으로도 벽이 흔들렸다. 2006년 완월지구 화재로 큰 피해를 본 뒤 줄기차게 시설 개선을 요구해오던 주민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

창원 완월지구 새뜰마을 사업 기본구상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

사업 진행이 곤혹스러웠던 시 공무원이 박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영국 왕립 건축사로 활동한 도시재생 전문가다. 박 교수는 "원안대로 하자면 안전히 벽지만 바르고 나올 방법만 찾으면 됐겠지만, 주민 의견을 심층 청취하고 논의하면서 주민들이 같이 살 수 있는 사회적주택을 짓는 방향으로 완전히 계획을 수정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초기 사회적주택은 마을·공공 지분 점유 형태로 계획됐다. 부분 소유 주체가 될 사회적 협동조합을 조직한 일도 이를 위해서다. 출자금은 2000만 원, 가장 좁은 집에 살았던 주민 수용 보상비 수준이다. 모든 주민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금액이었다. 모인 출자금을 주택 건설비로 재투자해 지분을 확보하면 주거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겠다는 기대였다. 다만, 초기에 곧 제도적 벽에 부딪혔다. 현행법상 토지를 매각한 기존 마을 주민들이 사회적주택에 그대로 입주하거나, 공공과 지분을 나눌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 재생을 위한 사업인데, 정작 주민들이 떠나야 하는 모순이다.

2019년 창원시가 '새뜰마을 공동홈 관리 및 운영 규칙'을 만들면서 문제를 풀었다. 필요한 경우 비영리 법인(사회적 협동조합)에 사회적주택을 위탁할 수 있도록 했고, 최초 입주에 한해 철거주택 소유자를 우선 입주하게 했다. 결국 공동 소유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오랜 주민 염원이 이뤄진 순간이다.

안역순(71) 씨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완월달빛다방을 운영한다. 수익금은 사회적 주택 공용시설 유지비로 쓴다. /이창우 기자

◇지속 가능한 공동체 가능할까 = 완월달빛 사회적주택 선례를 좇으려는 전국 사업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흐지부지됐다. 현행법 근거가 부족한 점, 재입주 논의 과정에서 주민 갈등이 불거진 점이 발목을 잡았다. 반면, 완월주민들은 시 규칙 개정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재입주 공간이 넓든 좁든, 북향이든 동향이든 큰 논쟁 없이 합의를 이뤄 냈다. 끈끈한 유대감은 오래된 마을이면서도 가장 실험적인 시도에 성공한 원동력이다.

수십 년간 함께해 온 시간에 더해, 사회적 협동조합을 꾸리며 공동체 의식을 키운 점이 주효했다. 주민들은 2017년 새 사업안이 국토교통부 인가를 받기까지 매주 사회적 경제를 배우고, 자신의 활동이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띠는지 직접 체험했다. 마을에서 잔치 국수·김장을 나누며 이웃과 관계를 맺거나,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경제적 자립을 준비한 일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모두의경제사회적협동조합, 마산YMCA, 창원시건축사회 등 많은 조력자가 주민 성장을 도왔다.

완월달빛 사회적주택 사례는 확산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주택 입주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교체될 텐데, 새 입주민들이 공동체에 녹아들 수 있을지 아직 불투명하다. 시 규칙상 추가 입주자 자격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등 기존 법적 기준만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어렵게 형성한 공동체가 점진적으로 교체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셈"이라며 "현행법이 이러한 마을 단위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정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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