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LG를 바꾼 ‘흙속의 진주들’…‘5연속 완투’ 문병권과 ‘18승’ 김태원의 환골탈태

[이재국의 엘팬알백] ⑱1990년 LG의 반전 드라마문병권과 김태원의 등장

1990년 LG 트윈스 돌풍의 주역이 된 우완투수 김태원(왼쪽)과 잠수함투수 문병권. ⓒLG트윈스
“백인천 나와!”
“꼴찌가 웬말이냐!”
“청문회 합시다!”

1990년 6월 3일. 일요일이었다. 해가 서쪽 빌딩숲 사이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잠실야구장 중앙 출입구 앞에는 수백 명의 팬들이 몰려와 겹겹이 진을 쳤다.

이날 LG 트윈스는 태평양 돌핀스에 0-5로 패했다. 태평양 선발투수 정명진(1.1이닝 무실점)에 이어 나온 양상문의 역투(7.2이닝 무실점)에 눌리며 1점도 뽑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났다.

결국 시즌 14승22패(승률 0.389)로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7개 구단 중 유일하게 3할대 승률로 6위 OB(14승1무21패)에도 0.5게임 차로 뒤졌다.

LG 팬들은 경기 후 백인천 감독 이름을 부르며 청문회를 요구했고, 술에 취한 일부 아저씨 팬들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웃통을 벗고 굳게 닫힌 중앙 출입구 철문을 잡고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4월이나 5월도 아니고 6월 3일까지 꼴찌라면 누가 봐도 희망이 없는 시즌. 그러나 LG 트윈스는 이때부터 거짓말 같은 반등 드라마를 만든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8번째 주제는 우리가 1990년으로 야구여행을 떠날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름, 잠수함 투수 문병권과 강속구 투수 김태원의 등장 이야기다.

꼴찌로 추락한 LG 트윈스의 반전 드라마가 둘의 어깨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만년 유망주’였던 이들이 알을 깨고 나오면서 사실상 1990년 LG의 기적이 시작됐다.

1990년 LG 트윈스 초대 구단주인 고 구본무 럭키금성 부회장(왼쪽)이 프로야구단으로 발령이 낸 최종준 기획부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LG트윈스

◆구본무 구단주 “10연패 해도 괜찮습니다.”

“10연패 해도 괜찮습니다. 감독님 소신껏 하세요.”

뜻밖이었다. [엘팬알백] 17편에서 설명했듯이, LG 트윈스는 1990년 4월 8일과 9일 개막 2연전에서 OB 베어스에 2연패를 당했다. LG 트윈스라는 이름을 달고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첫발부터 꼬이고 말았다.

더군다나 럭키금성 그룹 임직원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서 LG 트윈스의 최초 개막 시리즈를 지켜봤기에 구단 프런트도, 선수단도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본무 구단주(당시 럭키금성 그룹 부회장)는 백인천 감독에게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10연패를 해도 괜찮으니 감독님 뜻대로 소신껏 하세요”라는 말로 힘을 실어줬다.

구본무 부회장은 소문난 야구광. 야구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이 깊고, 야구에 조예가 깊었다. 훈수를 두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훈수를 둘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 감독을 비롯한 LG 코칭스태프에게 야구에 관해서는 일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힘을 받은 LG는 곧이어 4월 10일과 11일 홈개막전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2연파했다. LG 트윈스의 역사적인 최초 홈 개막 시리즈였기에 프런트와 선수단은 고무돼 있었다.

그런데 구본무 구단주는 이번엔 경기 후 그라운드에 내려가지 않았다. 선수단을 격려할 법도 했지만 수행원들과 함께 조용히 잠실구장을 빠져나갔다.

“구단주님은 현장 전문가들을 존중했어요. 프런트에도 당부를 하셨죠. 야구를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으니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라고 말이죠. 선수단 지원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절대 현장에 간섭하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당시 구본무 부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그룹 비서실의 이규홍 과장(훗날 LG 트윈스 사장)은 1990년의 시작을 그렇게 기억했다. 그해 LG 트윈스의 기획부장이었던 최종준 전 단장도 같은 얘기를 했다.

LG 트윈스 백인천 감독(가운데)이 선수들을 마운드에 모아 놓고 얘기하고 있다. LG는 1990시즌 초반 연패 속에 꼴찌로 추락하면서 사기가 떨어졌다. ⓒ스포츠서울

◆6연패 그리고 7연패…흔들리는 LG, OB와 꼴찌 경쟁 돌입

LG는 태평양전 2연승에 이어 4월 14일과 15일 사직 롯데전, 4월 17일 잠실 OB전까지 파죽의 5연승을 달렸다. 5승2패로 삼성과 공동선두로 도약했다. 뭔가 LG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고 무지개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야구라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승1패 후 4월 22일 잠실 빙그레전 1-11 대패를 시작으로 5월 5일 잠실 롯데전 6-9 패배까지 6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5월 6일 롯데전 2-1 승리로 가까스로 연패의 사슬을 끊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이탈했던 간판타자 이광은이 개막 한 달 만인 5월 8일 복귀했다. LG는 이날 OB를 7-0으로 꺾고 2연승을 달리며 전열을 정비하는 듯했다.

그러나 5월 9일 잠실 OB전부터 5월 19일 대구 삼성전(더블헤더 제1경기)까지 이번엔 7연패를 당했다.

시즌 8승16패. 승보다 패가 2배나 많았다. 이광환 감독이 이끄는 OB가 8승1무18패로 아래에 있어서 망정이지 꼴찌나 다름 없었다. 시즌 농사는 이미 망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구단주가 “10연패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할 말이 없는 행보였다. 서울 두 팀의 꼴찌 경쟁. OB 팬들도 그랬지만, LG 팬들의 인내심도 점점 한계에 이르는 듯했다.

1990년 혜성처럼 등장한 잠수함 투수 문병권이 힘차게 투구를 하고 있다. ⓒLG트윈스

◆잠수함 문병권의 깜짝 완투쇼…7연패 끊어낸 ‘난세의 영웅’

1989년 MBC 청룡에 입단해 개막전 승리투수와 7승을 수확하며 가능성을 보인 김기범은 시즌 개막을 앞두고 부상으로 이탈했고, 거포 유망주 김상호를 OB에 내주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재일교포 투수 최일언도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주포 이광은의 교통사고 이탈 속에 타선도 집단 부진에 빠졌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는 개막 이후 5월 14일까지 8경기에 등판해 1구원승, 1세이브, 1패만 기록했을 뿐 소득 없이 던지는 날이 더 많았다.

시즌 개막 직전 교통사고를 당했던 이광은이 개막 한 달 만인 5월 8월에 팀에 복귀했다. ⓒLG트윈스

그러다 보니 연패와 연패의 연속. LG는 6연패 이후 5월 19일 대구구장에서 삼성과 더블헤더를 맞닥뜨렸다.

제1경기 선발로 나선 최일언은 3이닝 4실점으로 조기강판했고, 결국 LG는 난타전 끝에 7-12로 패하면서 7연패의 늪에 빠졌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누가 나서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더블헤더 제2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LG 선발투수로 그해 1승도 없는 잠수함 문병권이 나섰다. 1988년 2차 3라운드에 영입한 3년차 투수로 지난 2년간 총 5승4패를 기록했을 뿐이었다.

1990년 불펜에서 시작한 문병권은 앞서 5월 12일 잠실 해태전에서 시즌 첫 선발등판해 비록 패전투수가 됐지만 8이닝 2실점의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다. 그것이 백인천 감독의 눈도장을 받는 계기가 됐다.

그러고는 이날 시즌 두 번째 선발등판의 기회를 얻었다. 경북고-연세대 출신의 문병권은 고향팀을 맞아 보란듯이 9회까지 135구 완투를 펼치며 12-5 승리를 이끌었다.

6회까지 3실점으로 잘 던지다 7회말 삼성 정성룡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해 5실점을 기록하게 됐지만, 팀의 7연패를 끊어내고 자신도 시즌 첫 승을 장식하는 값진 승리였다.

1988년 MBC 청룡 시절의 문병권 투수 모습. ⓒ스포츠서울

신인 시절이던 1988년 6월 15일 잠실 롯데전에서 연장 13회 1-0 완봉승을 기록한 뒤 2년 만에 프로 데뷔 두 번째 완투승을 올렸다.

LG는 7연패 과정에서 선발은 선발대로 무너졌고, 불펜은 불펜대로 소모했다. 마땅히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문병권이 한 경기를 완전히 책임졌다. 그야말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였고. ‘난세의 영웅’이었다.

“삼성이 고향팀인데 1988년 신인 지명을 받지 못해 삼성전에 좀 오기가 발동했죠. 이를 악물고 던졌어요. 그날따라 우리 타선이 초반부터 폭발하면서 점수차가 커 편하게 던졌습니다.”

1965년생. 올해로 벌써 환갑에 접어든 문병권은 35년 전의 일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런데 그날 7회에 타석에 들어선 (정)성룡이가 눈을 찡긋하더라고요. 성룡이는 대구중 동기거든요. 그래서 안타나 치라고 좋은 공 하나 준다는 생각으로 던졌는데 홈런을 쳐 버리더라고요. 그래서 5실점을 하게 됐죠. 하하.”

문병권. 1980년대 초반 경북고 신화와 1990년 LG 신바람 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에겐 아련한 이름이다. 야구인들 중에서도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1990년 배터리를 이뤘던 김동수(현 서울고 감독)는 “몇 년 전에 병권이 형이 직접 만든 곶감을 보내줘서 맛있게 먹었다”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문병권은 1993년을 끝으로 LG에서 유니폼을 벗은 뒤 일산과 용인 등에서 개인사업을 하다 2000년부터 처가가 있는 경북 상주에 내려가 살고 있다고 했다.

“요즘도 곶감 농사를 짓느냐”는 질문에 “상주는 감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한때 잠시나마 장모님과 어깨너머로 배운 곶감 농사도 해봤는데 요즘엔 하지 않는다”며 웃더니 “현재는 군부대 부식을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상주 리틀야구팀 감독의 부탁으로 주말에는 야구장에 나가 어린 야구선수들을 지도하며 평생의 업인 야구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문병권은 1990년 첫 완투승에 대해 묻자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잊지 않고 기억해주시니 감사하다”면서 “나도 1990년 그날 경기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라며 감회에 젖었다.

1990년 18승 에이스로 거듭난 LG 트윈스 김태원. ⓒLG트윈스

◆문병권 하루 뒤 김태원도 완투쇼…‘불펜 선동열’ 세상밖으로 나오다

문병권의 완투로 7연패의 늪에서 빠져나온 LG는 한숨을 돌렸다. 백인천 감독도 이날 승장 인터뷰에서 “연패 기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말했을 만큼 가슴을 옥죄어 오던 연패였다.

다음날인 5월 20일, 이번엔 또 다른 선발투수 김태원이 사고(?)를 쳤다.

배재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한 김태원은 1986년 MBC 청룡에 1차지명으로 입단한 뒤 1989년까지 통산 4승(11패)에 그쳤던 투수였다.

“불펜에서는 선동열”이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실전에서는 그런 구위도, 제구도 나오지 않아 ‘새가슴 투수’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김태원은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백인천 감독의 눈에 들어 1990년 개막 이후 선발투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선 5월 10일 대전 빙그레전(5이닝 6실점 5자책점) 패전투수를 비롯해 그해 5차례 등판에서 승리 없이 2패만 기록 중이었다. 그 가운데 2경기는 호투하고도 승운이 따르지 않아 승리투수와 인연을 맺지 못하기도 했다.

연패를 벗어난 LG 타선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삼성 마운드를 상대로 경기 초반부터 폭발했다. 2회초 최훈재의 2점홈런을 신호탄으로 4점을 뽑고, 3회초와 4회초에는 각각 김영직과 신인 김동수가 홈런포를 가동했다. 6회까지 무려 10점을 올렸다.

김태원은 동료타선의 지원을 즐기며 9회까지 135구를 던져 7안타 3볼넷 2탈삼진 무실점으로 10-0 승리를 이끌었다.

프로 데뷔 후 5년, 73경기 만에 거둔 첫 완봉승이었다. 1990년 LG의 첫 완봉승 기록이기도 했다.

전주기전대 김태원 감독(오른쪽)이 지난해 야구부 창단 선언식에서 조희천 총장과 담소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주기전대
“프로 첫 완봉승인데 잊을 수 없죠. 그날따라 컨디션이 정말 좋았어요. 주로 빠른 직구로 승부를 걸었는데 제구도 잘 됐어요. 삼성 강타선을 상대로 그날 완봉승을 거두면서 저도 완전히 자신감을 얻었죠. 그게 제 야구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김태원의 말이다.

올해 1월에 창단한 전주기전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원 역시 1990년 첫 완봉승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 5연속 완투승을 비롯해 10승 투수로 도약한 LG 트윈스 문병권 투수. 깔끔한 외모의 핸섬가이였다. ⓒ스포츠서울

◆‘경북고 신화’ 문병권의 부활…5연속 완투승 ‘괴력’

올드팬이라면 문병권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경북고 시절부터 떠올릴 것이다.

1981년 경북고는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에 이어 전국체전까지 우승해 4관왕에 오르는 신화를 썼다. 3학년 좌완 성준, 2학년 유격수 류중일, 1학년 잠수함 문병권이 핵심 전력이었다.

문병권은 1학년이었지만 그해 봉황대기 최우수선수상과 수훈상, 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봉황대기 결승전은 여전히 회자되는 전설의 경기. 당대 최고 스타였던 선린상고 박노준이 1회말 홈으로 벤트레그 슬라이딩을 해서 들어오다 왼쪽 발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려나간 그 경기였다.

1981년 선린상고의 슈퍼스타 박노준이 봉황대기 결승전 경북고 경기에서 1회말 홈에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발목이 꺾이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한국야구사
경북고 유격수 류중일의 모습. 1년 선배 성준, 1년 후배 문병권과 함께 1981년 경북고 4관왕 신화의 중심에 섰다. ⓒ스포츠서울

경북고는 4-6으로 뒤진 8회초 대거 3득점하며 6-4 역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문병권은 이 경기에서 7회부터 성준을 구원등판해 3이닝 1안타 무실점 막고, 8회초에는 타자로 나서 4-4 동점에서 우중월 2루타로 역전 결승타를 기록해 MVP에 올랐다.

연세대로 진학한 뒤 1학년 때 거의 혼자 던지다시피했던 문병권은 무리한 투구 여파로 허리통증이라는 고질병을 얻었다. 당시 학원 스포츠에 만연했던 선배들의 얼차려와 구타 문화로 허리 부상이 악화된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2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그러자 항간에는 "뺀질이다", "야구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고향팀인 삼성은 그래서인지 당시 3명을 지명할 수 있는 1차지명에서 문병권을 제외했다.

문병권은 “허리 부상으로 그런 오해를 받은 것이었다”며 “4학년 때 MBC 청룡 스카우트 분들이 학교에 자주 오셔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나를 찍더라”고 설명했다. MBC 청룡이 2차 3라운드에 지명했다.

그러나 고질인 허리 통증은 프로에 와서도 계속됐다. 앞서 설명한 대로 신인 시절이던 1988년 13이닝 투구로 1-0 완봉승을 기록한 것이 그해의 유일한 승리 기록이었다.

1988년 1승3패, 평균자책점 3.73, 1989년 4승1패, 평균자책점 4.33을 기록했다.

고교 시절의 문병권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성적표였다.

LG 트윈스로 바뀐 1990년 문병권은 마침내 꽃을 피웠다. 팀의 7연패 사슬을 끊는 첫 완투승을 시작으로 자신이 선발등판한 5경기 연속 완투승을 올렸다.

그중 6월 2일 태평양전에서는 1안타(2회초 김윤환 중전안타) 완봉승으로 아쉽게 노히트노런을 놓쳤다.

문병권은 이날 단 87구로 완봉승을 따냈다. 태평양 선발투수 박상범은 90구, 구원투수 양상문은 1구를 던져 양팀 합계 178구로 경기가 끝났다. 당시 KBO 1경기 최소투구수 신기록이었다.

여기에 경기시간 1시간42분은 1985년 9월 21일 청보-롯데(구덕구장) 1시간33분에 이어 역대 최단시간 경기 2위 기록.

그 이후 1991년 9월 7일 LG-해태 더블헤더 제1경기가 1시간 39분에 끝나 문병권이 완투한 이 경기는 현재까지 KBO 역대 최단시간 경기 3위로 자리잡고 있다.

아마추어 최대어 포수로 평가받은 뒤 1990년 LG에 입단해 신인왕에 오른 포수 김동수. ⓒLG트윈스

◆인터벌 없는 ‘노사인 투구’로 10승 투수 도약

“병권이 형은 인터벌이 정말 짧았어요. 제가 공을 던져주면 받자마자 그냥 던졌어요. 타자가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죠. 그해 10승을 거둔 비결이었습니다.”

당시 포수로 호흡을 맞췄던 김동수의 말이다.

“동수 말이 맞아요. 제가 던지는 날엔 인터벌이 없으니 야수들이 되게 좋아했어요. 포수 사인도 없었어요. 거의 노사인(No Sign)으로 던졌죠. 경기 전에 김동수와 초반엔 어떤 공으로 카운트 잡고, 승부구는 뭘로 던진다는 얘기만 나누고 경기 도중엔 사인 없이 던지고 받았어요. 그 정도로 동수와 호흡이 잘 맞았죠.”

문병권도 김동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해 백인천 감독님께서 팔 높이를 좀 더 내리고 인터벌 없이 빨리 던지라고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 효과를 봤죠. 제가 허리가 안 좋다 보니 팔이 자꾸 높아져 사이드암 투수가 됐는데 1990년엔 팔을 언더핸드와 사이드암 중간 높으로 내리면서 공이 좋아졌어요. 제가 공이 빠른 투수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커브, 슬라이더 외에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싱커성 공이 주무기였어요. 타자 배트 중심을 비켜가 범타를 많이 유도했거든요.”
LG 트윈스 베테랑 이광은(오른쪽)이 완투한 문병권(가운데)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다. 왼쪽은 2루수 나웅으로 현재 고인이 됐다. ⓒ스포츠서울

◆백인천 감독의 내기로 시작된 김태원의 화려한 변신

“이봐, 김태원! 넌 장래성도 있고 하체만 제대로 만들면 좋은 투수가 될 것 같은데 말이지. 나하고 내기 하나 하자.”

백인천 감독은 1989년 말 MBC 청룡 감독으로 부임한 뒤 만년 유망주였던 김태원에게 갑자기 내기를 제안했다.

“무슨 내기 말씀입니까.”

김태원은 다소 긴장한 눈빛으로 백 감독을 쳐다봤다.

“내가 시키는 대로 훈련을 따라 오겠나?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겠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해.”

“네, 하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올해 10승을 하면 내가 골프채를 선물해 줄게.”

“감독님, 10승을 하려면 저한테 그만큼 등판 기회를 주셔야죠.”

“그건 걱정하지 마. 무조건 기회를 줄 테니까. 대신 기회를 줬는데 10승을 못 하면 네가 식사를 거하게 사야 해.”
1990년 대만 전지훈련 도중 투수 김태원(오른쪽)이 김용수(가운데), 정삼흠과 계단에서 토끼뜀을 하며 하체를 단련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백 감독은 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토끼뜀과 오리걸음으로 하체를 강화하는 훈련부터 시작했다.

또한 일명 ‘V-시프트’라 불리는 복근운동(누운 자세에서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몸을 V자로 만드는 운동)을 단숨에 150개 못하면 스프링캠프에 데려가지 않는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캠프 가기 전에 테스트를 했는데 제가 너무 힘들어 몇 개 안 남기고 중단했어요. 감독님께서 ‘스프링캠프 탈락’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풀이 죽어 있으니까 김재박 선배, 이광은 선배 등이 감독님을 찾아가 ‘태원이가 겨울 동안 정말 운동 열심히 했으니까 데려가시죠’라며 설득을 하셨죠. 그러면서 제가 한 번 더 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얻어서 결국 대만 타이중 캠프를 따라가게 된 거죠.”

김태원은 이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며 웃었다.

“정말 겨울 동안 토끼뜀, 오리걸음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준비를 잘했거든요. 허벅지는 물론 종아리가 천하장사 이만기처럼 탄탄해졌어요. 감독님께서 일본 스파이크 하나를 선물해 주시더라고요. 하체도 튼튼해진 데다 스파이크도 좋아 대만에서 힘 빼고 던졌는데도 공이 쭉쭉 나가더라고요. 제가 그 전까지 공은 빨랐지만 제구가 좋지 않았는데 하체 흔들림이 없으니까 제구가 잡히더라니까요.”

백인천 감독은 약속한 대로 개막 이후 김태원을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켰다. 5차례 등판에서 승리 없이 먼저 2패를 안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오늘날의 야구에서 중시하는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도 2차례 있었다. 오히려 불운한 케이스로 봤다.

LG 김태원이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공을 던지고 있다. ⓒLG트윈스

◆전반기 5승+후반기 13승 ‘18승 투수’로 진화…선동열 이어 다승 2위

앞서 설명한 대로 김태원은 5월 20일 대구 삼성전에서 프로 데뷔 첫 완봉승을 올리는 감격을 맛봤다. 그의 말처럼 그 경기로 인해 완전히 자신감을 얻었다.

그 이후에도 호투하고 승운이 따르지 않은 경기들이 나왔지만 김태원도 개의치 않았다.

6월 5일 광주 해태전에서 6이닝 2실점(1자책점)으로 시즌 2승을 거뒀고, 6월 15일 대구 삼성전 9이닝 2실점(1자책점) 완투승을 올렸다.

6월 23일 사직 롯데전 6이닝 1실점으로 시즌 4승, 6월 27일 잠실 빙그레전 구원승(4.2이닝 0실점)으로 시즌 5승을 수확했다.

전반기 5승2패, 평균자책점 2.88로 팀에서 가장 안정적인 투구를 펼치는 선발투수로 거듭났다. 전반기만 따지면 문병권(6승)에 이어 팀 내 다승 2위였지만, 평균자책점은 팀 내 1위였다.

전반기에 김태원을 다소 외면했던 승운은 후반기에 복리이자를 붙인듯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7월6일 잠실 삼성전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시작으로 7월에만 3승을 올렸고, 8월 5일 잠실 롯데전에서 5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10승 고지에 올랐다.

특히 8월에만 무려 6승(1구원승 포함)1패를 기록하는 놀라운 승수쌓기 페이스를 보였다. 14승까지 파죽지세로 질주했다.

9월에는 자신의 마지막 4경기 등판에서 모조리 승리를 따내며 시즌 18승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51을 기록하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펼쳤다.

다승 2위, 평균자책점 4위, 승률(0.783) 2위에 올랐다.

해태 선동열(21승)만 아니었다면 다승왕과 승률왕 2관왕을 차지할 뻔했다. 또한 전반기 승운이 조금만 따라줬다면 20승은 물론 다승왕도 불가능하지 않은 페이스였다.

LG 트윈스로서는 마침내 선발 에이스를 얻었다는 점에서 미래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1990년 LG 트윈스 선수단이 승리 후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백인천 감독(가운데)과 왼쪽으로 김태원, 조창수 코치, 김동수 등의 모습도 보인다. ⓒ스포츠서울

◆‘원 히트 원더’ 문병권과 ‘퐁당퐁당’ 김태원의 추억

문병권은 1990년 10승 투수로 혜성처럼 등장해 경북고 시절의 ‘최고 잠수함 투수’라는 평가를 되살렸다.

그러나 어쩌면 우주의 기운은 그걸로 끝났는지 모른다. 1990년의 화려한 봄날은 문병권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91년에도 28경기(131이닝)를 던져 1990년에 버금가는 투구를 했지만 3승13패, 평균자책점 5.15에 그쳤다.

5차례나 완투를 했으니 승운이 고약하게 따르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아무튼 13패는 그해 최다패 기록이었다.

과도한 완투와 짧은 간격의 휴식. 그러다 보니 고질인 허리 통증의 부담 속에 1992년 6승7패2세이브(평균자책점 5.13), 1993년 1승2패1세이브(평균자책점 4.36)을 기록한 뒤 유니폼을 벗었다.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으니 너무 일찍 은퇴했다.

흔히 대중음악에서 한 곡의 히트곡만 남긴 뒤 잊혀지는 아티스트를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라고 한다. 문병권은 1990년 한 차례 강렬한 히트송을 남긴 뒤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KBO판 '원 히트 원더'가 되고 말았다.

문병권(뒷줄 오른쪽)은 주말에 경북 상주에 있는 지역 리틀야구팀에 나가 어린 꿈나무들을 지도하며 야구인으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문병권 제공

김태원은 1989년까지 ‘미완의 대기’, ‘새가슴 투수’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지만 1990년 마침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그 시절 보기 드문 187.5㎝의 장신. 그리고 그 시절 더더욱 보기 드문 시속 150㎞대의 강속구. 김태원 스스로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제 그해 시속 150㎞ 이상을 던지는 KBO리그 투수는 해태 선동열과 롯데 루키 박동희, LG 김태원 3명뿐이었다.

그 빠른 공에 하체가 안정되면서 제구와 스태미너까지 뒷받침되자 그야말로 투수로서 ‘환골탈태’했다.

1990년의 김태원은 더 이상 ‘새가슴’도 아니었고, 더 이상 ‘미완’도 아니었다. 한순간에 선동열에 버금가는 투수로 도약했다.

다만 그는 그 이후 커리어 내내 ‘홀짝제’처럼 짝수해에는 잘 하다가 홀수해에는 부진한 징크스를 이어갔다.

1993년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8승에 그쳤고, 1992년 10승과 1994년 16승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챙겼다.

(김태원의 노히트노런에 대해서는 1993년 다시 한번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1년 좋고, 1년 못하고 성적이 ‘퐁당퐁당’ 했는데 사실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몸 관리를 잘 했어야 합니다. 1990년 야구가 너무 잘 되니까 저 스스로 방심했던 것 같아요. 야구를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데 그땐 그걸 몰랐죠. 뒤늦게 깨닫는 거죠.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한편, LG 백인천 감독은 1990년 시즌 초반 특급 소방수 김용수와 정삼흠의 보직을 맞바꾸는 파격 실험에 나서게 된다.

[엘팬알백] ⑲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