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승 신인왕' 김건우 재기불능 교통사고… 산산조각 난 청룡의 꿈

[이재국의 엘팬알백] ⑬10년 에이스 김건우를 앗아간 끔찍한 교통사고

MBC 청룡의 에이스 김건우가 1987년 9월 12일 밤 교통사고를 당한 뒤 서울 순천향병원에 입원해 있다. 김건우는 투수생명에 치명상을 입었다. ⓒ스포츠서울
『최근의 경기에서 승승장구, 2위 자리를 굳혀가는 듯했던 MBC가 남은 경기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안타깝게 됐다. 팀의 에이스 김건우가 13일 새벽 강남구 대치동 청실아파트 앞에서 서울 4러2010호 프레스토 승용차에 치여 오른쪽 팔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순천향병원에 입원한 김은 올 시즌 볼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투수생명까지 위태롭게 됐다.』 <1987년 9월 14일자 경향신문>

1987년 9월 12일 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MBC 청룡 에이스 김건우가 충격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김건우는 전년도 18승을 거두며 혜성처럼 등장해 신인왕에 오른 인물. 18승은 아직도 깨지지 않는 KBO 역대 신인 첫해 최다승 기록이다. 2006년 한화 류현진이 타이기록을 작성했을 뿐,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 교통사고로 전도유망한 2년생 투수 김건우는 선수생명에 치명상을 입었고,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리던 청룡은 꿈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3번째 주제는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10년 에이스 김건우와 1987년 MBC 청룡의 슬픈 시즌에 대한 이야기다.

MBC 청룡 김건우가 미소를 짓고 있다. 28번은 청룡 시대 에이스의 등번호로 기억되고 있다. ⓒ스포츠서울

◆ 교통사고…그날 밤의 악몽

1987년 9월 12일 밤 11시 50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청실아파트 앞. 건장한 한 청년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과속으로 달리던 프레스토 승용차에 받혔다. 음주운전자가 정지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다 사람을 친 것이었다.

사내의 몸은 순식간에 승용차 보닛(Bonnet)을 타고 올라갔다. 머리가 앞 유리창에 부딪히더니 몸이 공중에 떠서 20m가량을 날아가 아스팔트 길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 청년은 팔, 다리에 피를 흘리며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여자친구 곁으로 기어갔다.

“자기야, 괜찮아?”

그 한마디를 한 뒤 의식을 잃었다. 여자친구가 쓰러진 길바닥 옆엔 MBC 청룡 마크가 새겨진 푸른색 야구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횡단보도를 함께 건너가던 주위 사람들이 놀란 나머지 몰려들었다. 사고를 당한 청년은 다름 아닌 MBC 청룡의 젊은 에이스 김건우였다.

“김건우다, 김건우!”

야구 팬 몇몇 사람들이 청룡 가방과 김건우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고는 소리를 쳤다. 주위 사람들은 두 남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후송시켰다.

“그날 여자친구 집에서 예비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밤에 집에 가려고 아파트를 나왔죠. 여자친구는 제가 택시 타는 곳까지 배웅하려고 제 가방을 대신 메고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어요”

빛바랜 흑백영화처럼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 38년 전 초가을 밤의 악몽. 김건우는 천천히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기자가 “괜히 그날 일을 물어본 것 같다”라고 하자 김건우는 “에이, 지난 일인데요. 뭘”이라며 슬며시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너고 있었어요. 몇 발짝만 더 가면 보도블록인데 갑자기 뭔가가 와서 제 몸을 치더라고요. 왕복 8차선 도로인가 그랬어요. 교통신호도 있었고 밤이라 차가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제 몸이 공중에 붕 떠서 떨어진 것까지 기억이 나요. 순간적으로 ‘살아야겠다’ 싶어서 왼팔로 얼굴을 감쌌던 것 같아요. 길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제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런데 저 멀리 여자친구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걱정되니까 가보려고 하는데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부러진 팔로 기어서 여자친구한테 갔던 것 같아요. ‘괜찮냐’고 한마디 물어봤는데 그 이후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피를 엄청 흘려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아요.”

우선 급한 대로 5분 거리에 있는 동네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다. 곧이어 MBC 청룡 구단 지정병원인 순천향병원으로 다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김건우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순천향병원에 MBC 청룡 베테랑 간판선수인 김재박(왼쪽)과 이광은이 병문안을 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후배를 바라보고 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스포츠서울 신문 기사. ⓒ스포츠서울

◆“투수로는 재기가 어렵습니다”

공을 던지는 오른쪽 팔은 부러지고(복합골절), 왼쪽 팔꿈치와 오른쪽 정강이도 골절과 타박상으로 크게 다쳤다. 2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전치 6개월이라는 ‘중상’ 진단을 받았다.

6개월이면 1987년 시즌이 끝나는 상황. 그런데 이어진 의사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투수로는 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그저 살아있는 게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여자친구는 차바퀴에 오른쪽 발가락을 밟혀 다쳤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다만 김건우를 대신해 메고 갔던 야구가방이 차에 부딪힌 뒤 얼굴을 치면서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이 순애보 같은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친구는 현재 김건우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다.

이들 부부는 지난해부터 충남 태안 연포해수욕장 입구에서 텃밭을 가꾸며 ‘건우수제버거’라는 맛집을 함께 운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엘팬알백 12편 참고>

1987년 9월에 교통사고로 함께 다친 김건우와 여자친구는 1988년 6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건우 제공
충남 태안의 연포해수욕장 입구에서 아내와 함께 운영 중인 '건우수제버거' 외관. ⓒ김건우 제공

◆교통사고 전까지 12승…청룡 에이스로 활약

김건우는 1986년 청룡에 입단하자마자 229.2이닝을 던지면서 18승을 올렸다. 그 덕분에 신인왕에 오르긴 했지만 무리한 게 사실이었다. 특히 대학 시절엔 타자로 전념했던 터라 선린상고 시절 이후 사실상 5년 만에 마운드에 선 셈이었다. 그것도 첫해 스프링캠프 말미에 투수로 전향했으니 투수로서 몸이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역투를 펼쳤다.

그 후유증으로 1987년 시즌 초반엔 출발이 좋지 않았다. 시즌 3번째 등판(4월 11일 대전 빙그레전) 만에 9이닝 3실점 완투승으로 뒤늦게 시즌 첫 승을 신고했고, 6월 18일 잠실 빙그레전까지 초반 11경기에 등판해 3승5패에 그쳤다.

“팔이 무거웠어요. 팔이 스리쿼터로 많이 내려오고 제가 느끼기에도 볼끝이 밋밋했었요. 1986년이면 분명 제 공에 타자의 배트가 밀렸는데 1987년 초반엔 타구들이 쭉쭉 뻗어가더라고요.”

김건우는 1987년 시즌 초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김건우는 김건우였다. 6월 23일 잠실 삼성전부터 이후 14경기에서 9승1패를 거두며 압도적 에이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9월 10일 잠실 청보전에서 4.1이닝 6실점 난조로 패전투수가 되면서 6연승 행진이 끊겼지만 이때까지 시즌 12승7패, 평균자책점 2.64를 기록 중이었다. 전년도(18승6패, 평균자책점 1.80)에 비해서는 다소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6월 이후 모습은 청룡의 에이스는 김건우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2년차 징크스도 털어냈다고 평가할 만했다. 갈수록 구위가 살아나고 있어 MBC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면 상대팀에서도 김건우는 분명 부담스러울 수 있는 존재였다.

김건우는 9월 12일 대구 삼성전에는 유백만 감독대행의 배려로 선수단과 동행하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13일 잠실 롯데전에 선발등판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2일 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MBC 청룡 에이스 김건우의 투구 모습. 푸른색 청룡 원정 유니폼이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스포츠서울

◆에이스 잃은 청룡도 비상

비보를 전해 들은 MBC 청룡 구단도 비상이 걸렸다. 청룡은 이날 사고가 나기 직전 대구에서 삼성을 꺾었다. 최근 5경기에서 4승1패의 호조를 보이면서 19승3무15패로 2위를 달렸다. 1위 삼성에 2.5게임차로 뒤졌지만, 3위 해태에 2게임차, 4위 롯데에 3게임차로 앞서고 있었다.

1987년의 포스트시즌 진출 규정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당시 KBO리그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 치렀는데, 전기와 후기에서 2위 이내에 든 팀이 4개 팀일 경우 전기 1위와 후기 2위, 전기 2위와 후기 1위가 크로스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2위 이내에 2차례(1위든 2위든 상관없음) 포함된 팀이 발생하면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얻는다. 다시 말해 전기와 후기 2위 이내 팀이 2팀밖에 없으면 이들끼리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한다는 의미다.

대신 A팀이 전기와 후기에서 2차례 2위 이상 차지하고, 2개 팀(B팀, C팀)이 1차례씩 2위 이상 순위에 오른다면 B팀과 C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플레이오프 승자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A팀과 겨루는 방식이었다.

1987년 페넌트레이스 진행 상황을 보면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삼성은 후기리그에서도 선두로 치고 나가 2위권은 확보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시리즈 직행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리고 OB가 이미 전기리그 2위에 올랐기 때문에 최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했다. 후기리그에서 삼성이나 OB가 아닌 다른 팀이 2위 이내에 든다면 플레이오프가 성사되는 상황이었다.

MBC는 전기리그에서 5위에 그쳤지만, 후기리그에서 김건우가 다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2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서 에이스가 교통사고로 이탈했으니 MBC의 팀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위쪽 신문기사 사진처럼 MBC 베테랑 선수인 김재박과 이광은은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선수단을 대표해 순천향병원으로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

1980년대 인기 야구잡지 주간야구에 실린 MBC 청룡 간판스타 이광은의 모습. ⓒ주간야구
“김건우는 볼이 묵직했어요. 삼성 원년 멤버 황규봉 투수가 국가대표 시절부터 국내에서 가장 묵직한 느낌의 공을 던졌는데, 김건우가 신인으로 들어왔을 때 딱 그런 느낌의 투수였어요. 타자들이 쉽게 치지 못했어요. 방망이가 밀렸죠. 그랬으니까 김건우 선수가 신인 때 18승이나 했죠.”

이광은 전 LG 감독은 김건우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러면서 교통사고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우리 팀이 후기리그에서 순위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에이스가 교통사고를 당해 나올 수 없으니 구단 전체가 ‘큰일 났다’면서 비상이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MBC 청룡 시절 '부엉이' 정삼흠이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스포츠서울

◆마운드 십시일반으로 버텼지만…가을잔치로 가지 못한 청룡

MBC는 후기리그 17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당장 9월 13일 잠실 롯데전에 선발투수로 내정했던 김건우의 공백을 메우는 게 급선무였다. 베테랑 좌완 유종겸이 휴식도 반납한 채 긴급히 선발로 나서 6이닝을 책임지고, 김용수가 나머지 3이닝을 퍼펙트로 막아 6-0으로 이기며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추스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 5경기에서 1승4패. 아래에 있던 해태가 치고 올라오면서 MBC는 2위 자리를 내주고 3위로 내려앉았다.

MBC는 마운드 비상조치를 가동했다. 정삼흠이 이틀 연속 선발등판하기도 하고, 김용수는 13일부터 23일 사이에 팀의 8경기 중 5차례나 투입됐다. 당시 마무리투수는 요즘처럼 1이닝씩 던지는 게 아니라 3이닝, 4이닝을 던지기도 했다.

그 결과 청룡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9월 27일까지 MBC는 해태와 같은 24승3무20패를 기록 중이었다.

앞으로 남은 7경기에서 운명이 갈리는 상황. MBC는 그중 최하위 청보와 3경기를 남겨두고 있어 일정상 유리해 보였다. 더군다나 전기리그에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확보한 삼성과 OB가 최고 투수 선동열을 보유한 해태를 견제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 가능성이 커 보였다. 포스트시즌에서 만난다면 에이스 김건우가 이탈한 MBC가 조금 더 수월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MBC 청룡 신언호. 1980년대 KBO리그 최고의 강견 우익수였다. ⓒ스포츠서울

갈 길은 바쁜데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MBC는 반드시 잡아야 할 상대로 꼽히던 청보전에서 고전했다. 우선 29일 인천 청보전에서 다 이긴 경기를 비기고 말았다.

3-3으로 맞선 연장 10회초 2사 1·2루. 6번타자 신언호가 중월 2루타를 터뜨렸다. 2루주자 박흥식이 홈을 밟았고, 1루주자 김우근도 무난히 득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우근이 갑자기 홈플레이트 앞에서 넘어지면서 어이없이 태그아웃되는 일이 벌어졌다(MBC 올드팬들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통한의 장면이다). 결국 연장 10회말 청보 3번타자 김동기의 중월 솔로홈런이 터지면서 경기는 4-4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이튿날인 30일 청보와 더블헤더 제1경기도 아쉬움이 컸다. 4-4 동점이던 9회말 2사 후 포수 서효인 김한조의 평범한 뜬공을 놓치면서 다음 타자 김경남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했다.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정삼흠의 완봉으로 1승1패를 기록했지만 상승세를 탄 해태에 1.5게임차로 밀리게 됐다.

사실상 자력으로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없게 된 MBC는 남은 3경기를 1승2패로 마무리했다. 10월 1일 빙그레전, 3일 롯데전에서도 각각 1점차로 패하면서 해태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 2연패로 가는 길을 터줬다. MBC는 롯데에마저 추월당하면서 4위로 내려앉았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김건우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해 MBC가 후기리그 2위를 차지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해태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4연패(1986~1989년)도 없었고, 삼성이나 OB, MBC가 우승을 맛봤을 수도 있다. 어쩌면 김건우의 교통사고는 KBO리그 전체 역사를 바꿨는지도 모른다.

MBC 청룡 시절의 김정수. 1986년 11월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스포츠서울

◆김건우 이전에 김정수 교통사고 사망 ‘비극’

사실 김건우의 교통사고가 발생하기 이전에 MBC 청룡에는 이미 교통사고의 비극이 있었다. 그 충격파가 가시기도 전에 다시 김건우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구단 내부의 당혹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83년 MBC에 입단한 국가대표 출신의 김정수는 1986년 시즌을 마친 뒤 11월 3일 서울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귀가하면서 좌회전을 하다 마주 오던 시내버스와 충돌하면서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교통사고 사망 사건으로 그해 겨울 떠들썩했다.

당시 시내버스의 책임으로 대법원에서는 “프로야구 선수의 정년은 40세로 봐야 한다”며 “피고는 원고(김정수의 부인)에게 797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김정수는 1981년 대학야구 사상 최초로 4연타석 홈런을 쳤고,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전에서 0-2로 뒤진 8회말 대타로 나와 대역전 드라마의 발판이 되는 추격의 1타점 2루타를 날리기도 했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때 홈으로 달려 들어와 동점 득점을 올린 주인공이었다.

투타에 재능을 보여 1983년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입단했지만 타자와 투수로 변신만 거듭하다 주전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그라운드의 개그맨’이라 불릴 정도로 MBC 청룡 팀 내에서 가장 웃겼던 선수였고, 덕아웃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러나 프로 무대에서 그 스스로는 웃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다.

MBC 청룡 시절의 김경표 모습. ⓒ스포츠서울

당시 김정수와 함께 예비군 훈련을 받고 승용차에 동승했던 김경표(안면 부상)와 안언학(머리 부상)은 중태에 빠질 정도로 선수생명에 치명타를 입었다.

김경표는 1984년 1차지명을 받은 내야수였고, 안언학은 1985년 1차지명을 받은 투타 유망주였다. 그런데 김경표는 이 사고에서 살아나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1990년 다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안언학은 1980년 중앙고 시절 제10회 봉황대기 고교야구에서 광주일고의 선동열과 맞대결을 펼쳐 3안타 완투승을 거둬 전국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고려대 4학년이던 1984년 LA 올림픽 대표팀에서 뛴 뒤 1985년 1차지명을 받고 MBC에 입단했다.

어우홍 감독 지휘 아래 투수로 시작했지만, 김동엽 감독 부임 후 1986년 팀 타선 강화 차원에서 안언학을 3루수로 변신시켰다. 그 와중에 간판 3루수 이광은이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을 정도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안언학은 이 교통사고 이후 한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1987년 시즌 후 MBC에서 방출된 뒤 OB와 쌍방울에서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을 살리지 못하고 1991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어야만 했다.

1987년에 MBC가 1차지명한 아마추어 최고 강타자 노찬엽은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에 묶이면서 입단할 수 없었다. ⓒ스포츠서울

◆1987년의 기억들

1987년을 앞두고 KBO 신인드래프트 제도도 변화했다. 전년도까지 10명씩 찍었던 1차지명은 전력평준화를 위해 3명으로 줄었는데, MBC 청룡은 1차지명으로 노찬엽(배재고-고려대 외야수)과 정태관(대광고-인천전문대 외야수), 김영직(휘문고-영남대-상업은행 외야수)을 지명했다.

그중 노찬엽은 1988년 서울올림픽 국가대표팀 선수로 분류되면서 프로 진출이 유보돼 농협에 입단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올림픽. 야구는 비록 시범경기였지만 최강 전력을 구축하기 위해 아마추어 최고 강타자인 노찬엽을 2년이나 실업야구에 묶어두기로 했다(당시에는 올림픽에 프로 선수의 출전은 불가능했다).

MBC로선 분명 큰 손실이었다. 노찬엽은 88서울올릭픽 당시 국가대표 4번타자로 활약했는데, 1987년 삼성 1차지명 선수 강기웅 역시 서울올림픽 출전을 위해 2년간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몸담았다.

MBC 청룡은 1987년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를 비롯해 팀 전력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김동엽 감독과 재계약하면서 베테랑 김재박을 플레잉코치(코치 겸 선수)로 승격시킨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실제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청룡은 1987년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팀으로 분류됐다. 전년도 18승으로 구단 최초 신인왕에 오른 김건우와 구단 역사상 첫 구원왕을 차지한 김용수가 마운드의 앞과 뒤를 더 든든하게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1차지명을 받은 노찬엽이 곧바로 입단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을 중심으로 한 타선의 짜임새도 괜찮았고, 기동력이나 수비력 등 전력의 밸런스가 잘 갖춰졌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페넌트레이스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원년 멤버인 하기룡과 이선희가 하향 곡선을 그리면서 1승3패로 부진에 빠졌다. 1986년 신인으로 쏠쏠한 활약(33경기 2승6패, 3세이브)을 펼쳤던 김태원은 10경기에 등판해 1승도 올리지 못하고 0승2패, 평균자책점 8.44(32이닝 30자책점)로 힘을 쓰지 못했다.

'면도날' 김용수는 1986년에 이어 1987년 구원왕에 오르며 KBO리그를 대표하는 소방수로 자리매김했다. ⓒ스포츠서울

전기리그에서 24승3무27패로 7개 구단 중 5위에 그치면서 김동엽 감독이 경질됐다. 영리한 지장이었지만 독불장군식 리더십으로 선수단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MBC는 후기리그부터 유백만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올려 레이스를 펼쳤다. 나름대로 팀 분위기가 살아나고 선전했지만 에이스 김건우의 교통사고로 청룡의 가을야구 꿈도 수포로 돌아갔다. 후기리그에서 26승4무24패로 반타작 이상 승률(0.519)을 올렸지만, 김건우 교통사고 이후 17경기에서 7승1무9패로 밀린 것이 치명타였다. 결국 후기리그에서 4위로 마감했다.

1987년의 수확이라면 외야수 이광은이 4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받으면서 팀 내에서 유일하게 황금장갑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광은은 그해 득점(66) 1위에 올랐고, 홈런(14) 4위, 타점(74) 2위 등으로 고군분투했다.

1983년부터 4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지켜온 김재박은 삼성 신인 류중일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연속 황금장갑 수상 기록이 끊겼다.

투수 중에서는 김용수가 33세이브포인트(9구원승+24세이브)로 2년 연속 구원왕에 오르면서 최고 소방수로 자리매김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1987시즌 후 기억에 남아 있는 소소한 추억이라면, 1982년 원년 개막전에서 만루홈런을 치며 MBC 청룡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줬던 이종도가 OB 베어스 소속으로 은퇴를 했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종도에게 만루홈런을 맞았던 이선희는 MBC 청룡에서 은퇴를 하게 됐다.

1989년 4월 30일자 조선일보. 1년 7개월 만에 등판해 승리투수가 된 김건우의 재기를 알리고 있다.

◆김건우 재기를 위한 몸부림…타자 전향 후에도 불운

김건우는 교통사고 이후 투수로 재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의사도, 주변 사람들도 “투수로서는 재기불능”이라고 했지만 그는 초인적인 힘과 불굴의 정신력으로 재활에 매진했다.

1988년 1군 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1989년 4월 30일 잠실 롯데전을 통해 19개월 만에 마침내 마운드에 돌아왔다. MBC는 7연패 중이었고, 상대 투수는 하필이면 롯데로 이적한 거물투수 김시진이었다.

하지만 김건우는 복귀전에서 기대 이상의 역투를 펼쳤다. 8이닝 동안 7피안타 3볼넷 3탈삼진 3실점. 투구수는 무려 149개였다. 1년 7개월 만의 실전등판이어서 그런지 제구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볼 스피드도 130km대로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9회 김용수의 마무리 도움을 받은 김건우는 팀의 5-3 승리를 이끌고 오랜 만에 승리투수의 감격을 맛봤다. MBC의 7연패도 끊어냈다. 잠실구장을 찾은 청룡 팬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김건우! 김건우!”를 연호했다.

“그날 던지고 나서 오른팔에 큰 통증이 밀려왔어요. 예전의 공이 나오지 않았지만 마운드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죠.”

김건우는 하루 던지면 며칠을 끙끙 앓았다. 예전만큼 많이 등판할 수 없었다. 1989년 10경기(38.1이닝)에 선발과 구원으로 등판해 3승2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76의 성적을 올렸다.

LG 트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1990년에는 12경기(37.2이닝)에 나섰지만 2승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6.21에 그쳤다. 그해 LG는 한국시리즈에 올라 첫 우승을 차지했지만 왕년의 에이스 김건우는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1991년에는 2경기(5이닝)에 나서 1승1패 평균자책점 9.00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다시 공을 던지는 것만 해도 인간승리였다. 그러나 구위만 놓고 본다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에이스 김건우가 아니었다. 으스러진 팔로 악을 쓰며 던져봤자 구속은 130km대에서 맴돌았다.

김건우가 LG 트윈스 시절이던 1992년 타자로 전향하기 위해 스윙훈련을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결국 1992년 이광환 감독이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한 뒤 김건우는 타자로 변신했다.

한양대 졸업 후 7년 만에 다시 잡은 방망이지만 김건우는 시즌 초반 LG 4번타자를 맡아 한때 최다안타 1위에 나서며 돌풍을 일으켰다. 1992년 54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6에 8홈런 30타점을 올리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하늘은 또다시 그에게 시련을 안겼다. 7월에 빙그레 이글스전에서 1루수로 수비를 하다 손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3루수 송구홍이 1루에 던진 공이 옆으로 비켜가자 김건우는 미트를 낀 왼손을 뻗어 잡았다. 그 사이 전력으로 달려오던 타자주자 장종훈과 부딪히면서 왼 손목이 꺾이고 말았다.

또다시 시작된 기나긴 재활 기간. 손목 부상에서 회복된 뒤 1993년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성적은 전년도만 못했다. 86경기에 출장해 타율 0.253(229타수 58안타), 5홈런, 27타점에 그쳤다.

그런데 1994년을 앞두고 동계훈련을 하던 중 이번엔 오른손등 피로골절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지독히도 따라붙는 부상의 악령. 결국 김건우는 구단의 권유로 은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1963년생이니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였다.

LG 트윈스 시절 타자로 전향한 김건우(왼쪽)가 홈런을 친 뒤 김인식 코치(현 연천 미라클 감독)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LG트윈스

오랜 재활 경험을 밑천 삼아 LG 트윈스 재활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재활군 선수를 가르치면서 스스로도 재활운동을 했다. 팔이 회복됐는지 투구를 해봐도 아프지 않았다. 어느 날 공을 던졌는데 오히려 전성기 시절에 버금가는 구속이 나왔다. 스피드건에 시속 140㎞ 이상의 숫자가 찍혔다. 그래서 1997년 LG 선수로 다시 등록됐다. 은퇴한 지 4년, 투수로서는 공을 놓은 지 6년 만이었다.

그해 1군 마운드에 돌아온 그는 최고구속 145㎞를 찍어 팬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페넌트레이스 7경기에 등판해 11.2이닝 6실점(평균자책점 4.63)을 기록한 게 전부였지만 또 다른 인간승리 드라마였고,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해 해태와 격돌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돼 1차전 9회에 등판해 패전처리를 한 것이 그의 선수로서 마지막 모습이었다.

“물론 젊었던 시절엔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술 먹고 방황하지는 않았어요. ‘목숨만은 살려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1986년 신인왕으로 이름 석 자는 남겼잖아요. 태안에 여행 오셨다가 저희 가게에 수제버거 드시러 오시는 젊은 사람들 중에 가끔 제 스토리를 아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야구선수로 흔적을 남겼으니 그럼 됐죠. 허허.”

환갑을 훌쩍 넘어 선 김건우는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짓는다.

김건우가 은퇴 후 LG 트윈스에서 재활코치를 하다 잃어버렸던 구속을 찾으면서 1998년 펴낸 책 '김건우의 투수 훈련법' 표지(위). 책이 발간된 뒤 자필 사인을 담아 기자에게 선물했다(아래). ⓒ스포팅제국

찬란했지만 너무나도 짧았던 프로 전성기. 그날의 교통사고가 우리의 10년 에이스를 앗아갔다.

세월은 흘렀고, 이젠 LG 팬들조차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의 시대와 함께한 팬들이라면 1986년 혜성처럼 왔다가 불꽃처럼 타올랐던 18승 신인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재기를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고,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와 치열하게 모진 운명과 싸웠던 비운의 선수.

그날의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MBC 청룡, 나아가 LG 트윈스와 한국야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가 김건우 이름 석 자를 기억해야 할 이유다.

[엘팬알백] ⑭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