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넷이 삼진보다 많은 타자. 프로에서도 흔치 않은 일인데, 이현승은 해외 첫해인 도미니카 섬머리그에서 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38볼넷 대 32삼진, 출루율 .423. 타율(.241)보다 무려 182포인트 높은 출루율입니다. 이 숫자들이 다시 주목받은 건 23일(한국시간) 보스턴과의 시범경기 타석에서, 단 한 번의 볼넷으로 데이터가 그대로 증명됐기 때문입니다. 18세 마이너리거 이현승의 이름이 MLB 중계 화면에 처음 등장한 날이었습니다.
도미니카 성적이 말하는 것

이현승이 지난해 도미니카 섬머리그에서 기록한 성적은 45경기 타율 .241, 2홈런 22타점, 17도루, 출루율 .423, 장타율 .353, OPS .776입니다. 타율은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볼넷(38개)이 삼진(32개)을 6개나 웃도는 성적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삼진보다 볼넷이 많은 타자는 타석에서 자기 존 기준을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타자가 가장 흔들리기 쉬운 건 낯선 환경과 결과에 대한 압박인데, 이현승은 첫 해외 경험에서도 그 기준을 유지했습니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180포인트 이상 높다는 건, 안타 없이도 살아나가는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이야기입니다. 데이터가 이미 이 선수의 강점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마이너리거가 큰 무대에 선 날

스프링 트레이닝 초청을 받지 못한 마이너리거가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타석에 서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현승은 8회초 3루 대수비로 교체 출장했고, 9회말 2사 무주자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상대는 메이저리그 통산 98경기 등판, 평균자책점 4.15의 잭 켈리였습니다.
풀카운트 끝에 6구째 바깥쪽 포심을 골라내며 볼넷으로 출루했습니다. 판정 논란이 있는 5구째 커터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자기 판단을 유지했습니다. 피츠버그 중계진이 즉시 도미니카 볼넷 기록을 언급한 건,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방송 스태프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가 먼저 예고한 장면이 큰 무대에서 재현된 순간이었습니다.
비전통 루트가 만든 선수

이현승의 이력은 한국 야구 선수들의 일반적인 경로와 다릅니다. 정규 학교 야구부가 아닌 클럽팀 은평BC 출신이고, 고교 진학 대신 검정고시를 택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고교에 재학 중이면 MLB 구단과 계약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 16세가 되자마자 피츠버그와 계약금 16만 달러에 사인했고, 곧장 도미니카 섬머리그에 투입됐습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이현승에 대해 빠른 배트 스피드와 강한 어깨, 장타 가능성을 평가했습니다. 185cm 79kg 체격의 우투좌타 내야수로, 유격수와 3루수를 소화합니다. 클럽팀에서 시작해 검정고시를 거쳐 해외로 직행한 비전통적인 루트의 선수가 베이스볼 아메리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 선수의 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피츠버그가 이현승에게 거는 기대

피츠버그는 한국 선수들과 인연이 깊은 팀입니다. 박찬호를 시작으로 강정호·박효준·배지환·최지만이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었고, 구단은 꾸준히 한국 선수 시장을 살펴왔습니다. 강정호가 2015~2016년 36홈런을 터뜨리며 KBO 출신 타자의 가능성을 증명한 게 그 정점이었습니다.
이현승이 강정호와 비교되는 건 내야수 포지션과 장타 기대치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비교보다 더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강정호가 파워 툴로 각인됐다면, 이현승은 선구안이라는 다른 무기를 가진 선수입니다. 18세에 볼넷이 삼진보다 많은 타자는 드뭅니다. 이 선구안이 상위 리그에서도 유지된다면, 피츠버그의 또 다른 방식의 성공 사례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됩니다. 이현승의 성장, 어떻게 보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