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형 AESA 레이더 국산화, 위기에서 시작됐다
한국의 AESA 레이더 독자 개발은 KF-21 전투기 사업(KF-X) 과정에서 미국이 핵심 레이더 기술 이전을 거부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당시 일부 일본·서구 군사 매체와 전문가들은 “한국이 레이더 TR 모듈을 포함한 완전 국산 AESA를 단기간에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평가했지만, 한국은 2016년부터 한화시스템 주도로 자체 개발에 착수해 2020년 시제 AESA 레이더를 공개했고, 2025년에는 KF-21용 양산형 AESA를 공식 롤아웃하며 회의론을 뒤집었다.
이 과정에서 TR 모듈 설계·집적·시험을 포함한 주요 공정이 국내화됐고, 해외 의존이 컸던 소자 분야에서도 GaN 기반 고출력 반도체를 국산 솔루션으로 대체하는 비율을 빠르게 늘렸다.

TR 모듈이 왜 ‘게임 체인저’인가
AESA(능동위상배열) 레이더는 수백~수천 개의 TR 모듈이 각자 전파를 송수신하며 빔 방향을 전자적으로 조향하는 것이 핵심 구조로, TR 모듈의 성능이 곧 레이더 성능을 좌우한다. 각 모듈에는 전력 증폭기, 위상 천이기, 저잡음 증폭기, 스위치 등이 집적돼 있어, 고출력·고효율과 동시에 소형·경량·고신뢰성이 요구된다.
과거에는 미국·일본·유럽 일부 기업이 GaAs(갈륨비소) 기반 TR 모듈 기술을 사실상 독점해 왔지만, 한국 업체들이 GaN 기반으로 전환된 고출력 TR 모듈 라인업을 갖추면서 전투기·지대공미사일·해상 레이더까지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RFHIC, GaN 전력소자로 유럽 방산에 진출
국내 RF 전력 반도체 전문기업 RFHIC는 통신·5G용 전력 증폭기에서 쌓은 기술을 기반으로, 방산용 GaN 전력 증폭기·TR 모듈 분야까지 사업을 확대해 왔다. 회사는 GaN-on-SiC(실리콘카바이드) 기술을 기반으로 한 고출력 RF 솔루션을 통해 레이더·전자전·위성통신용 소자를 공급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스웨덴 GaN 웨이퍼 업체 스웨갠(SweGaN)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해 소재 단계부터 기술·공급망을 확보하는 행보를 보였다.
2025년에는 이탈리아 방산 대기업 레오나르도와 공급 계약을 체결, 차세대 레이더에 RFHIC의 GaN 기반 고출력 전력증폭기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유럽 방산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 RFHIC 측은 “해외 방산 업체가 한국산 GaN 기술을 채택했다는 것은 당사 기술력이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됐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한화시스템, “한국 유일 AESA 레이더 종합 업체”로
체계 종합 측면에서는 한화시스템이 한국 AESA 레이더의 중심에 서 있다. 한화시스템은 다기능 레이더(MFR), 장거리 대공·탄도탄 요격 레이더, KF-21 전투기용 AESA 레이더 등 다양한 플랫폼에 들어가는 레이더를 개발·양산하는 국내 유일의 종합 AESA 레이더 업체로 자리 잡았다.
회사는 “한국 최초의 풀 디지털 AESA 레이더”를 내세우며 디지털 TR 모듈(DTRM) 구조, 다중 임무 모드, 디지털 빔포밍 등 기술을 공개했고, 레이더 안테나에 약 1,000여 개의 TR 모듈을 집적해 공중·지상 표적을 동시에 탐지·추적하는 성능을 구현했다. 2025년 KF-21용 AESA 레이더 양산 체계 돌입과 더불어, 향후 한국형 중거리 지대공미사일 ‘천궁-III’ 다기능 레이더에도 AESA 기술이 적용될 계획이라 국산 TR 모듈 수요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산 TR 모듈’ 찾는 해외 방산사들
국내 언론·업계에 따르면 스웨덴 사브(SAAB)의 조기경보기 ‘글로벌아이’와 다목적 감시레이더 ‘지라프’ 등 유럽 레이더 체계를 보유한 업체들 역시 한국의 GaN 기반 TR 모듈·전력 증폭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브는 이미 자국 내·유럽 공급망을 갖추고 있지만, 고출력 GaN 소자와 비용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 기업과의 협력 가능성을 탐색해 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레오나르도와의 공급 계약이 가시화된 것처럼, 향후 사브를 비롯한 다른 유럽 방산사로 한국산 GaN TR 모듈·전력 증폭기 공급이 확대될 경우, “TR 모듈은 소수 선진국만 만든다”는 기존 인식을 바꾸는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일본과의 간접 경쟁,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 역시 F-2 전투기 개량, 신형 이지스함·지대공미사일 체계 등에 자국산 AESA 레이더를 적용하며 이 분야 강자로 불려 왔지만, 그 기술은 주로 자국·미국 동맹 체계 내부에서 사용돼 외부 공개와 수출 사례가 제한적이었다. 반면 한국은 KF-21, FA-50 개량형, 각종 지대공·함정 레이더 프로젝트를 통해 TR 모듈·AESA 레이더를 국산화하는 동시에, 레오나르도 등 해외 업체에 소자·레이더를 수출하며 개방형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하는 방향을 택했다.
과거 일본·서방 일부에서 “한국이 AESA TR 모듈을 온전히 국산화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하던 분위기와 달리, 지금은 한국산 GaN TR 모듈과 레이더가 유럽 체계에 들어가는 상황이 된 만큼, “한국은 절대 못 만든다”며 낮춰보던 시각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는 평가가 방산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전자파 전장’에서의 전략적 자립
GaN 기반 TR 모듈 100% 국산화에 가까운 수준으로 공급망을 정비했다는 것은, 한국이 전투기의 눈과 귀, 미사일 방어망의 핵심인 레이더를 외부 수출 통제나 부품 차단 없이 스스로 설계·개량·양산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부품 자립을 넘어, 전자전·미사일 요격·해상 감시 등 ‘전자파 전장’의 룰을 스스로 짜고 바꿀 수 있는 기술 주권을 확보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향후 국산 TR 모듈과 AESA 레이더가 더 많은 플랫폼에 적용되고, 유럽·동남아 등 해외 수출 사례가 늘어날수록, 한국은 반도체·조선·배터리에 이어 고부가가치 방산 전자 분야에서도 독자적 위상을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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