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한테 노량진시장 강탈 당한것도 모자라 범죄자로 몰려 옥살이한 비운의 모델

금수저, 모델계를 뒤흔들다

1980년대 후반, 광고계에 유독 눈에 띄는 남성 모델이 있었다.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사색에 잠긴 장면만으로도 그림이 되었던 사람.

노충량.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 3세였고, 외할머니는 일본인, 어머니도 일본인이다. 할아버지는 노량진 수산시장의 창업주.

부친 역시 그 뒤를 이어 시장 경영을 맡았지만, 1980년과 1981년 사이에 조부와 부친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며, 스물두 살의 노충량은 시장의 실질적인 운영을 떠맡게 됐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하던 그 시절, 그는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워가며 시장 일을 익혔고, 의료 사업 쪽 인맥을 쌓기 위해 우연히 시작한 모델 활동으로 대중의 눈도장을 찍었다.

‘논노’와 ‘마르시아노’의 얼굴로 이름을 알리며, 소품도 명품으로 직접 준비하는 패션 감각으로 단숨에 톱모델 자리에 올랐다.

전두환 정권과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몰락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전두환 정권이 노량진시장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노충량이 경영하던 시장에 정권 측 인물들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시장 실소유주처럼 등장한다.

처음에는 “49%의 지분만 달라”, “육사 출신 대표이사를 앉히자”는 유화적인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하자 세무조사, 운영권 박탈, 포기각서 요구가 이어졌다.

결국 ‘도장을 찍지 않으면 서빙고 간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그는 운영권을 넘겨야 했다.

그리고 1988년, 정권이 노태우로 바뀌자 그간 참아왔던 진실을 세상에 알린다. 전기환의 시장 강탈을 폭로했고, 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노충량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기에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후 정권의 보복을 당한 노충량 모종의 이유로 4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된다.

정치권과 얽힌 폭로 이후에 터진 스캔들이었기에, 권력의 희생양으로 그를 기억한다.

미국에서 다시 일어서다

출소 후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LA에서는 레스토랑과 카페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다시 사업가로 자리 잡는다. 현지인들 사이에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그리고 201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코오롱FnC의 패션 디렉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은 기모노를 자주 입는데 왜 우리는 한복을 안 입냐”며 한복의 일상화를 강조하던 그는, 한국 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노충량은 화려했던 모델이자 패션 비즈니스맨이었고, 동시에 정권의 이권 싸움에 휘말린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잃어버린 노량진 수산시장은 그에게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상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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