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고래 사냥 금지를 이끌어낸 '정신적 폭탄' 사진

1970년대 그린피스 활동가들은 상업적 목적의 포경을 종식시키기 위해 독특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작살을 장전한 거대한 소련의 선박, 그 뱃머리 아래에 작살을 맞고 떠 있는 고래 한 마리, 고래에 생긴 커다란 상처에서 뿜어져 나와 태평양을 붉게 물들이는 피.

사진작가 렉스 웨일러는 1975년에 촬영된 이 사진이 세상을 바꾼 그린피스의 ‘정신적 폭탄’ 캠페인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웨일러는 1970년대 캐나다에 모인 그린피스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이다. 당시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해 미국을 떠났다. 그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에는 생태 운동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평화 운동과 여성 운동, 시민 권리 운동 같은 사회 운동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 규모를 가진 환경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웨일러는 당시 책 출판을 기념 전국 투어를 하던 한 캐나다 작가를 통해 고래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알게 됐다.

그는 “당시 사람들은 고래잡이에 대해 ‘모비딕’에 나오는 이미지를 떠올렸다”며 “작은 배를 탄 작은 사람들이 골리앗 같은 거대한 고래와 맞서는 모습이 고래잡이의 이미지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1970년대 고래잡이 업자들은 디젤 모터에 113kg짜리 치명적인 작살을 장착한 거대한 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골리앗이 상징하는 것을 뒤집고 현실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포착해내려고 했습니다.”

고래잡이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 그 무렵에는 매년 약 8만 마리 고래가 사냥으로 희생됐다. 사냥 기술이 발달하면서, 포경업자들이 고래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배와 작살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물론 1937년에 만들어진 ‘포경 규제에 관한 국제 협약’ 등 다양한 고래 보호 조치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처럼 이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고래를 포획하는 국가들이 있었다. 때문에 1900년부터 1999년까지 약 290만 마리의 대형 고래가 포경 산업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실제 희생된 고래의 숫자는 이 추산보다 훨씬 더 많다는 주장도 있다.

1990년대 초 그린피스 스웨덴에서 활동했던 해양 운동가이자 아이슬란드 자연보호협회 회장인 아르니 핀손은 “고래는 이미 196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1954년에 국제포경위원회(IWC)가 북대서양에서 대왕고래 사냥을 금지했지만, 관리 체계가 취약해 과도한 고래잡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핀손은 1972년에는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10년간 고래잡이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IWC는 국제 사회의 이러한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 무렵 그린피스는 태평양에서 무자비하게 고래를 사냥하던 소련의 고래잡이 선박을 초점에 두고, 저항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신생 단체였던 그린피스는 2~3년에 걸쳐 배와 항해 대원을 마련했다. 웨일러는 “1975년에 우리는 조그마한 조디악 고무 보트를 타고 포경선을 찾아나섰다”고 말했다.

“우리 캠페인의 아이디어는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경선을 막아서고 고래와 작살 사이로 들어가기로 했죠. 그렇게 포경선을 찾아다니다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러시아 포경선을 발견했어요.”

1988년 백악관 근처에서 ‘일본의 포경선단 반대 시위’를 벌인 환경운동가들

그린피스 활동가들 중 다수는 미디어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이 대결이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되려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웨일러는 ‘정신적 폭탄’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디어가 그린피스 캠페인의 초석이 되었다고 했다. 그린피스의 또 다른 초기 멤버였던 밥 헌터가 구상한 정신적 폭탄은 미디어를 활용해 캠페인에서 말하려는 주장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핵심이다. 헌터에 따르면 혁명은 무력 투쟁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투쟁이었으며, 무기는 실제 폭탄이 아닌 정신적 폭탄이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진은 극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기록해 뉴스로 만들고 사람들이 전 세계의 고래가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극적인 시도를 한 것입니다.” 웨일러의 말이다.

하지만 이 시도가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웨일러는 “우리들은 모두 거친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작은 보트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영상을 찍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몸을 고정하기 위해 허리에 줄을 묶고 조디악 뱃머리에 섰습니다. 그 줄에 기대어 삼각대처럼 보트의 흔들림을 흡수했고, 이를 통해 카메라를 그나마 덜 흔들리게 할 수 있었습니다.”

고래를 카메라에 담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고래는 작살을 실은 포경선에 쫓기면서, 수면 위로 올라와 호흡만 하고 다시 물로 들어 갔습니다.” 웨일러는 고래가 작살에 맞기 전까지는 촬영할 수 있는 장면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웨일러는 “나는 주로 노출과 셔터 속도 등 카메라 작동에만 집중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사진을 어느 정도 찍고 카메라를 내려놓은 후에야 눈 앞의 상황을 제대로 보게 됐다고 한다.

“정말 끔찍했어요. 그런 광경은 처음 봤습니다. 포경선은 고래를 작살로 찔렀고,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졌어요. 몸부림치던 고래가 숨이 끊어지며 몸을 뒤집을 때는 물보라가 일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어요. 보트에서 바다를 바라보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조금 전 우리가 본 상황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죠.”

웨일러는 동료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한 항구에 도착했을 때 부두가 미디어로 가득차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저희는 이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어요. 부두에 모인 모두가 저희가 찍은 사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웨일러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신문 가판대로 달려갔다고 했다. “우리가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나 설레었습니다. 가판대로 뛰어갔더니, 거의 모든 신문 1면에 그 사진이 실려 있었어요. 정말 놀라웠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는 상업 포경을 전면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고래잡이를 허용하고 있다

웨일러가 생각한 사진의 핵심은 시위자들이 “인권이나 평화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 종을 위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변화는 대중이 그 변화를 주장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줘서, 사람들이 정부를 향해 ‘이 생물 종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 특별한 이미지가 여러 면에서 오늘날 세계적 차원의 기후 운동 발발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린피스의 포경 캠페인 이후,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는 상업적 목적의 포경을 금지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1985년부터 고래잡이가 전면 금지됐다. 그 결과 혹등고래와 같은 일부 고래 종의 개체수는 산업적 사냥이 이루어지기 전의 93%까지 회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 일본 등에서는 여전히 상업적 목적의 고래잡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핀손은 “그린피스의 저항 활동은 대중에게 영감을 주었다”며 “오늘날에도 유효한 1982년의 상업적 목적의 포경 금지 결정이 나오기까지 그린피스와 다른 비영리 단체들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