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분쟁 장기화 조짐, ‘국가핵심기술’ 지정이 변수

이인아 기자 2024. 10. 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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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 하이니켈 전구체 핵심기술 지정 신청
양극재 핵심 전구체, 中 의존 97.4% 국산화 시급
해외 매각 시 세계 1위 제련업 노하우 유출 우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이 고려아연 지분을 공개매수로 추가 취득하고 법원이 자사주 취득으로 경영권을 방어하겠다는 고려아연의 계획에 손을 들어주면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향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정부가 고려아연의 이차전지 관련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인정할지가 변수가 될 전망이다. 정부가 고려아연의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인정하면 단순한 경영권 분쟁이 아니라 국가 경제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될 수 있다.

고려아연 지분 38.34%를 확보한 영풍과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이하 MBK)는 고려아연 지분을 추가로 확보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경영권을 가져온다는 계획이다. MBK는 향후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도 절반 이상 인수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고려아연의 최대주주가 된다.

그래픽=손민균

고려아연은 영풍·MBK 연합이 지분 공개매수 계획을 발표한 직후 산업통상자원부에 ‘하이니켈 전구체 가공 특허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판정해달라고 신청했다. 이차전지에서 전구체는 양극재가 되기 이전 단계의 물질로, 니켈·코발트·망간 등 원료들을 섞은 화합물이다. 여기에 리튬을 더하면 양극재가 된다. 양극재는 음극재, 분리막, 전해액과 함께 배터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다. 전구체는 양극재 원가에서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다.

고려아연의 하이니켈 전구체는 전구체의 공정 시간, 비용 등을 줄여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이달 4일 열린 산업기술보호전문위원회에서 해당 안건이 심의 대상에 올랐다. 통상 신청에서 지정까지 2~3개월이 소요되지만, 업계에서는 정치권·지역사회의 우려를 반영해 이보다 빨리 심의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사모펀드는 일정 기간 후 지분을 팔아 수익을 챙기고 떠난다. MBK는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해도 나중에 중국에 팔지 않겠다고 했지만, 국내에 팔 상대방이 없으면 해외 기업이나 기관 투자자에 팔 가능성이 크다.

만약 고려아연이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인정받으면, 매각·이전 시 정부 심사를 받아야 해 해외 매각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 그간 고려아연은 MBK가 경영권을 확보하면 국가 기간산업이 중국에 통째로 넘어갈 수 있다고 지적해 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가핵심기술 지정은 한국 기업이 가진 핵심기술, 인력 등을 보호하고 기술 안보와 국가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어서 정부 심사가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한국의 배터리 기업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지만, 지난해 기준 국내 이차전지 소재 업체의 중국 전구체 의존도는 97.4%에 달했다. 이 때문에 한국이 배터리 산업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전구체의 국산화가 시급하다는 우려가 컸다.

고려아연은 전구체 국산화를 꿈꾸며 자회사 켐코를 통해 지난해 11월 울산시에 ‘올인원 니켈 제련소’를 세웠다. 이곳에선 황산니켈, 황산코발트, 전구체 등을 생산한다. 현재 전구체 품질을 높이기 위해 시운전을 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에는 납품이 가능할 것으로 회사 측은 예상했다. 켐코와 LG화학은 2022년 합작법인 ‘한국전구체’를 만든 바 있다.

고려아연은 특히 니켈 비중이 높은 전구체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전구체 내 니켈 비중이 높을수록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고 1회 충전 시 주행할 수 있는 거리도 늘어난다.

2023년 11월 15일 울산 온산국가산단 내 켐코 니켈제련소 부지에서 열린 ‘고려아연-캠코 올인원(all-in-one) 니켈제련소 기공식’./뉴스1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분야 전 세계 1위 기업이다. 제련업은 비철금속을 함유한 원광석, 스크랩(금속 부스러기) 등을 용광로에 넣고 녹인 뒤 금속을 분리·추출해 순도 높은 금속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제조 과정에서 탄소, 오염물질 배출이 불가피하고 전력 사용량이 많아 이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핵심 노하우(knowhow)다. 고려아연의 제련업 노하우는 하이니켈 전구체처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해외 기업에 매각되면 국가 경쟁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고려아연은 아연, 연(납), 금, 은, 구리 등의 비철금속을 생산해 국내외 기업에 판매한다. 이렇게 뽑아낸 비철금속은 자동차 부품·배터리부터 카메라, 철선, 보석까지 실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제품에 필수 재료로 쓰인다. 반도체 공정 필수 소재인 반도체 황산의 경우 고려아연 생산량의 95.9%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서 받아 간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가진 고려아연은 96분기(24년) 연속 흑자를 달성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제련업 방식은 이미 다 공개돼 있다. 여기서 1등을 한다는 건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이고, 다른 제련소는 따라가기 어렵다는 뜻”이라고 했다. 고려아연은 폐고철 매입→리사이클링→이차전지 소재 공급으로 자원순환 체계를 구축해 중국산을 대체할 ‘원재료 공급처’를 꿈꾸고 있다.

MBK는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하고 나중에 다시 되팔 때 중국에 매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고려아연이 매물로 나오면 전 세계 공급망, 제련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기업이 탐낼 가능성이 크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영풍·MBK 연합은 고려아연 지분을 주당 83만원에 공개매수했는데, 수년 후 이를 회수하려면 더 높은 가격에 팔아야 한다. 지난 18일 종가 기준 고려아연 시가총액은 약 17조원인데, 국내에서는 영업이익률이 낮은 제련업에 수조원을 투자할 기업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다.

고려아연의 고객사와 협력업체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 경영진이 교체되면 그간 고려아연과 진행하던 사업의 전망이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고려아연 핵심 기술진은 MBK가 경영권을 인수하면 회사를 떠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이 생기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계와 진행하던 수천억원대 니켈 공급 계약이 무산됐고, 이차전지 핵심소재 공급 계약도 중단 위기에 처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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