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라는 문자에 900만원 보냈는데.." 은행 직원의 한마디에 결단했다

자식이 급하다고 하면 부모는 앞뒤 가리지 않고 지갑부터 엽니다. 자식의 목소리만 들어도, 자식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마음이 먼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기꾼들은 바로 그 부모의 마음을 가장 먼저 노립니다.

충남 천안에 사는 송미숙 씨는 올해 예순아홉입니다. 천안 성정동에서 30년 동안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5년 전 세상을 떠났고, 두 딸은 모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미숙 씨의 미용실은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파마를 하러 온 손님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 갔습니다. 미숙 씨는 손님들의 이름과 머리 스타일, 다음 예약 날짜를 공책에 꼼꼼히 적어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손님들 사이에서는 가끔 자식 사칭 문자에 속아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미숙 씨는 그때마다 "어머, 어떻게 그런 데 속아요" 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봄 어느 날 아침, 미숙 씨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들어왔습니다. [엄마, 나 은지. 휴대폰 액정이 깨져서 수리 맡기고 임시폰으로 연락해. 이 번호로 문자 줘.] 큰딸 은지의 이름이었습니다. 미숙 씨는 별생각 없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문자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엄마, 휴대폰 보험 처리하는데 급하게 결제할 게 있어. 내 폰이 안 돼서 그런데 엄마가 대신 보내 줄 수 있어? 저녁에 바로 갚을게.] 딸이 알려 준 계좌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수리점 사장님 계좌야.]

미숙 씨는 잠시 망설였지만, 딸이 곤란하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통화를 하자고 했더니 [지금 회의 중이라 통화가 안 돼. 문자로만 해 줘]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미숙 씨는 딸이 깔아 준 휴대전화 은행 앱으로 900만 원을 보냈습니다.

돈을 보내고 나서도 문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엄마 고마워. 그런데 수리비가 더 나왔대. 1,500만 원이 더 필요한데, 계좌 이체 한도가 걸렸으면 현금으로 찾아서 우리 회사 직원한테 전해 줘. 오후에 미용실로 보낼게.]

미숙 씨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딸이 회사 직원까지 보낸다니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미숙 씨는 적금 통장을 챙겨 은행 창구로 갔습니다. 그리고 1,500만 원을 현금으로 찾겠다고 했습니다.

창구 직원은 미숙 씨의 얼굴과 통장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머님, 큰돈인데 어디에 쓰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미숙 씨가 딸 이야기를 하자 직원이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따님과 직접 목소리로 통화해 보셨어요?"

그 한마디에 미숙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딸과는 한 번도 통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직원의 권유로 미숙 씨는 그 자리에서 은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호가 두 번 울리고, 은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엄마? 웬일이야, 이 시간에?"

딸의 휴대전화는 멀쩡했습니다. 미숙 씨는 수화기를 든 채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습니다. 아침에 보낸 900만 원은 남편이 남긴 보험금에서 떼어 둔 돈이었습니다. 미숙 씨는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그때 창구 직원이 미숙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어머님, 지금 바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돈을 보낸 계좌에 지급정지부터 걸게요.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직원은 곧바로 은행 본점에 연락하고 경찰에도 신고했습니다.

직원은 미숙 씨를 상담실로 안내하며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사기에 쓰인 계좌는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묶을 수 있어요. 남아 있는 돈은 절차를 밟으면 돌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이 생명이에요." 미숙 씨는 직원의 말을 들으며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켰습니다.

미숙 씨는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가방에서 미용실 예약 공책을 꺼냈습니다. 아침에 돈을 보내면서 습관처럼 받는 사람 이름과 계좌번호, 보낸 시각을 공책 한쪽에 적어 두었던 것입니다. 사기꾼과 주고받은 문자도 한 통도 지우지 않은 채였습니다.

은행에 도착한 경찰관은 미숙 씨의 공책과 문자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머님, 오후에 돈 받으러 온다는 사람이 있지요? 저희가 미용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어머님은 평소처럼만 계시면 됩니다."

미숙 씨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미용실로 돌아왔습니다. 사기꾼의 문자에는 [네, 현금 찾았어요. 미용실로 오세요]라고 답했습니다. 사복 차림의 경찰관 두 명이 손님인 척 의자에 앉아 머리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오후 네 시, 말끔한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은지 씨 회사에서 왔습니다. 맡기실 물건 받으러 왔어요." 그 순간 손님인 척하던 경찰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책이었습니다. 그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다른 피해자들의 연락처가 줄줄이 나왔습니다. 미숙 씨의 신고 덕분에 같은 조직에 속아 돈을 보내려던 다른 어르신 두 명도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경찰서에서 "고액 아르바이트라고 해서 했다"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경찰관은 미숙 씨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계좌번호와 시간을 적어 두시고 문자를 지우지 않으신 덕분에 윗선까지 추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침에 보낸 900만 원도 일부가 계좌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급정지가 빨리 걸린 덕분이었습니다. 미숙 씨는 은행 직원의 안내에 따라 피해 구제 신청을 했고, 몇 달 뒤 남아 있던 돈 대부분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두 딸이 한달음에 내려왔습니다. 은지는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엄마, 나한테 전화 한 통만 하지. 앞으로 돈 이야기는 무조건 목소리로 확인해요." 미숙 씨는 딸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습니다. "그래, 이 엄마가 오늘 공부 제대로 했다."

며칠 뒤 미숙 씨는 미용실 거울에 종이 한 장을 붙였습니다. [자식이라는 문자에 돈 보내기 전에, 꼭 목소리로 확인하세요!] 그리고 파마하러 온 할머니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할머니들은 "나도 그런 문자 받은 적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얼마 뒤 미숙 씨는 경찰서에서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은행 창구 직원도 함께 표창을 받았습니다. 미숙 씨는 그 직원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한마디가 아니었으면 나는 1,500만 원을 더 날렸을 거예요."

감사장을 받은 날, 미숙 씨는 두 딸과 함께 미용실 근처의 오래된 추어탕집에 마주 앉았습니다. 들깨를 넉넉히 풀어 걸쭉하게 끓인 추어탕 세 그릇과 부추무침 한 접시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큰딸이 말했습니다. "엄마, 그 공책이 진짜 효자네." 미숙 씨는 웃으며 딸들 그릇에 산초 가루를 조금씩 뿌려 주었습니다.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는 여우와 고양이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금화를 땅에 묻었다가 모두 잃고 맙니다. 급하다고 재촉하는 말,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말 앞에서는 한 번 더 멈춰 서야 합니다.

요즘 사기는 가족의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옵니다. 자식이라며 돈을 보내 달라는 문자를 받으면 반드시 목소리로 직접 확인하세요. 만약 돈을 보냈다면 바로 은행과 경찰에 알려 지급정지를 요청하세요. 빠른 신고 한 번이 내 돈을 지킵니다.

올가을 미숙 씨는 두 딸과 함께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길 양쪽으로 붉은 단풍이 터널처럼 이어졌고, 나뭇잎 사이로 저녁 햇살이 금빛으로 쏟아졌습니다. 세 모녀는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숲길을 걸었습니다.

출처 : '피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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