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질병, 병원, 의사, 의학 뒤집어 보기
● 건강한 상태와 질병 있는 상태 구별하기 어려워
"건강한 상태와 질병이 있는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는 분이 있을까요?"
쉬운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두 상태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답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질문을 하나 더 해보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은 몇 가지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시는 독자들도 꼼꼼히 되짚어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목이 칼칼하더니 기침이 한 번 나와서 감기를 의심할 수도 있고 피부를 잘 살펴보면 빨간 반점이나 염증 소견이 보일 수 있다. 아침식사한 것이 뭔가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최근에는 기억력이 전보다 못하고 깜빡깜빡 뭔가를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 건망증이 생기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머리를 감으면 전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흰머리가 하나둘씩 생겨나는 것은 성인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다 보니 과거에 쉽게 가능하던 동작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유연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어제 안 좋은 소식을 들어서 그런지 기분이 가라앉은 것이 우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위에서 나열한 것들은 병이 아니라 증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증상은 병이 있을 때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건강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 때 잠시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증상이 있는 경우에 질병 유무는 검사를 철저히 해야 판단이 가능하다.
게다가 과거에는 질병이 아니었지만 현재는 질병인 경우도 있다. 나이가 들어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허리를 꼿꼿이 펴지 못하는 것이 농경사회에서는 질병이 아니라 평생 살아온 생활환경이 몸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현상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질병 취급을 받고 있다.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가는 노화도 과거에는 질병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고쳐야 할 질병으로 여긴다. 어린이가 말을 빨리 배우지 않으면 과거에는 시간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지금은 언어치료를 시작한다. 피부미용이나 성형처럼 의학의 힘을 빌려서 뭔가를 더 좋게 만들려는 노력도 소화를 잘 하도록 소화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질병치료와 큰 차이가 없다. 피부에 점이나 검버섯이 생기는 것도 질병으로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누구나 질병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는 이상을 서너 가지쯤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를 질병이라 하기는 어렵고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우니 질병과 건강한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 변화하고 있는 병원과 의사의 역할
요즘은 과거보다 중고생들에게 진로지도를 하는 시간이 늘어난 듯하다. 필자의 경우에도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하여 의료계에 관심을 지닌 청소년들이 견학을 갈 수 있느냐는 문의를 흔히 받곤 한다.
병원과 의대를 방문한 청소년들과 함께 의학교육시설을 둘러보고 방문객들에게 아무 영향이 없도록 병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교실에서 접할 때와는 다르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더 많이 대할 수 있다.
"병원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흔히 "질병을 고쳐주는 곳"이라 한다. 뒤를 이어 "의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질병을 고쳐주는 사람"이라 한다. 오래 전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옳은 답이라 할 수 없다.
19세기가 시작할 때까지 의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19세기가 되자 위생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주변환경을 위생적으로 유지할 경우 당시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감염병 발생이 크게 줄어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보건학이 대두되었다.
이와 함께 1796년에 영국의 제너(Edward Jenner)가 종두법을 발견했고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닭콜레라, 탄저, 광견병 백신을 발견하면서 예방을 할 수 있는 감염병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예방을 위한 백신 개발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위생을 통해 감염병을 예방하는 방법과 함께 19세기가 전해 준 위대한 의학적 발견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 뚜렷한 약이 없었지만 20세기가 되자 수많은 약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백신으로 예방하지 못한 감염병은 각 감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약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결실을 거두면서 이제는 질병 진단을 받으면 바로 약을 투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19세기가 공중보건의 시대라면 20세기는 치료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하면 21세기는 예방과 건강관리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평소의 건강관리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의 건강에 가장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정기적으로 무료 건강검진을 해 주고 있다. 병이 생겼을 때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병이 있다고 판단하여 병원에 방문하기 전에 검진을 함으로써 조기에 병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국민들의 건강 유지에도 더 바람직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질병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병원에 와서 건강검진을 받는 시기가 찾아온 만큼 병원은 "건강을 관리해 주는 곳" 의사는 "건강을 관리해 주는 사람"으로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 세상이 달라지니 병원과 의사의 정의도 바뀌게 된 것이다.
● 의학의 목표 세 가지
몸에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찾아온 사람이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후 병명을 알게 되면 다음으로는 치료를 하여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의학의 목표는 질병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병의 치료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되어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의사가 이렇게 절망적인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 집으로 돌려보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말기 암환자라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치료가 어려운 다른 병이 있는 경우는 상급종합병원이나 요양병원과 같이 여러 형태의 병원에 머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의사가 더 이상 의학의 힘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가 없어 포기를 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환자가 통증을 느끼는 경우 진통제를 놓아 주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한 경우에는 마약성 물질을 사용하기도 한다. 치료를 포기한 경우 의학은 환자의 고통 완화를 다음 목표로 한다.
의학의 또다른 목표로 질병 예방을 들 수가 있다. 무슨 질병이든 생기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앞에서 병원과 의사의 역할이 바뀐다는 글에서 소개했듯이 의학은 질병을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질병 치료, 고통 완화, 질병 예방은 의학에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목표라 할 수 있다.
● 건강한 개인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비결
주위를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경우 개인의 잘못이 질병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음주운전을 하는 운전자가 제한속도를 지키지 않고 과속으로 달려와 인도를 걷고 있던 사람을 덮쳐서 부상을 입힌다면 이는 남의 잘못으로 병을 얻은 것이 된다.
개인에게 발생한 질병은 그 개인의 잘못으로 발생한다고 하기 쉽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잘못보다 사회환경이 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황사와 같이 공기 오염이 심하여 호흡기질환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개인보다는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크다.
개인의 문제도 다른 사람에게 보건상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반드시 사회문제가 아니라도 정책당국은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에 백일해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일해는 신생아 예방접종표에 나와 있는 백신접종 대상인 감염병이므로 이미 오랜 기간 우리나라에서는 신생아들이 예방접종을 받아왔다. 백신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백신의 효과가 감염병을 100% 예방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미생물의 특성이 변하여 백신의 효과가 약해지기도 한다.
의학과 생명과학이 수학이나 물리학과 다른 점은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생명체의 성질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회사에서 동시에 만든 백신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몸에서 보여줄 수 있는 면역력은 실제로 그 백신에 대항해서 싸울 미생물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 미생물이 침입하는 경우 숙주인 사람의 몸 상태나 침입한 미생물의 수와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등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인류가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자의 건강관리는 물론 사회 전체의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19세기에 사람의 병이 사람의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세포병리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의 피르호(Rudolf Virchow)는 인체의 최소단위인 세포가 사람에게서 병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회도 개인이 모여 이루어지고 개인의 이상이 사회의 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질병 발생양상을 보면 한 세기 반도 더 전에 제시된 그의 주장이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인류가 질병의 위협에서 벗어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자는 물론 사회전체가 질병해결을 위해 항상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준비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다양하여 모두 하기 힘들 정도지만 그래도 모든 인류가 건강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질병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의학지식이 많아지니 병원과 의사에 대한 개념이 변했다. 질병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하니 의학의 목표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개인의 노력으로 질병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전체가 나서야 개인과 사회에 건강유지가 가능해질 수 있다.
질병, 병원, 의학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태도와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의학이 과학 이상의 뭔가가 더 담겨 있는 학문임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헨릭 울프. 의학철학. 이호영 이종찬 역. 아르케, 1999
재컬린 더핀. 의학의 역사. 신좌섭 역. 사이언스북스. 2006
아커크네히트, 세계의학의 역사. 민영사. 1991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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