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한계 아는 자가 더 현명한 결정 내려”

“민중과 괴리된 법은 시대의 족쇄…변화하는 가치관 반영해야
정치 영역서 대화·타협 대신 ‘법대로’…바람직한 현상은 아냐”
나치 독일 의회는 1935년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독일인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뉘른베르크 법’을 통과시켰다.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에 순응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만약 당시 다수 의견에 맞서 ‘소수(유대인)의 권리도 중요하다’며 제동을 걸 장치가 작동했다면 어땠을까? 이후 독일은 1951년 연방헌법재판소를 도입했다. 이를 모델로 삼은 게 한국의 헌법재판소다.
김기영 전 헌법재판관(현 단국대 법학과 석좌교수)은 “때론 다수의 의견이 아닌 합리적 판단을 우선하는 게 헌법재판소”라며 “소수자나 약자의 권리도 보호하는 게 헌법의 취지 중 하나”라고 했다.
김 전 재판관은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재판관을 지냈다. 재임 기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대법원과 헌재 사이의 법 해석 권한을 둘러싼 갈등 등 굵직한 이슈가 나왔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인 그는 법원 재직 당시 ‘사법농단’의 피해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최근 책 <헌법을 생각하는 일>을 냈다. 지난 15일 만난 그는 “계엄 사태 등을 계기로 헌법 정신의 수호는 국민 모두의 의무라는 생각에 책을 냈다”고 했다.
나치 독일의 집단적 광기와 다수의 열기가 만든 비극은 민주주의가 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플라톤은 ‘철인’(인격적·지적으로 우월한 자)이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 민주주의는 ‘철인’의 역할을 개인이 아닌,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다듬어진 법과 제도에 맡겼다.
“법학이 축적해온 원칙과 판단 기준을 토대로 국민의 대의자들이 민의를 반영해 법체계를 만들었어요. 특히 헌법은 국민 투표 절차를 거쳐 다시 한번 국민의 의사를 묻죠. 즉 사회가 오랜 시간 다듬어온 이성과 합리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헌법은 때론 다수 의견과는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1980년대 이후 노무현, 박근혜, 윤석열 등 3번의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가 있었어요. 헌재는 2명에 대해선 의회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한 명에 대해선 기각했습니다. ‘헌정질서 훼손의 중대성’을 기준으로 삼은 거죠.”
동시에 여론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도 했다. “날씨(일시적 여론)에 휘둘려선 안 되지만 기후(시대정신의 변화)에는 영향을 받아야 한다”며 “법원은 법을 적확하게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지만, 헌재는 변화하는 가치관과 시대의 흐름을 법 정신에 반영해야 할 의무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대의 기후를 읽는 일은 쉽지 않아요. 너무 빨리 읽으면 성급한 결론에 이르고 너무 늦게 읽으면 시대착오가 됩니다. 한때의 헌재 소수 의견이 몇년 뒤에는 다수 의견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호주제 폐지, 간통죄 폐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등은 법이 시대와 함께 호흡한 결과라고 봅니다. 민중과 괴리된 법은 시대의 족쇄일 뿐이에요.”
‘말할 자유와 침묵할 권리’ ‘진실을 알리는 것과 명예의 훼손’ ‘폐쇄회로(CC)TV의 필요성과 개인의 사생활’ 등 기본권이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 역시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해당 사안만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안에서도 이 원칙이 합리적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과거 선례와 비교해 일관성이 있는가, 반대로 과거 선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게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적합한가 등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판단합니다. 시대정신과 헌법적 가치 두 가지가 기준이죠.”
그는 이 같은 헌법적 가치를 제대로 읽고 이를 실행하는 ‘종복’(공복처럼 섬기는 자), 즉 법관의 자세가 그래서 중요하다고 봤다. “9명의 재판관은 각자가 다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사안을 여러 각도에서 사각지대 없이 살펴야 하거든요. 그래서 임명 과정에서부터 특정 개인이나 집단, 정파나 진영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에 따르면 헌재에서 ‘호(號)’를 쓰는 문화가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했다. “재판관으로 처음 출근할 당시 호를 정하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저는 ‘저울처럼 균형을 잃지 말고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라’는 뜻의 ‘형암(衡岩)’이었습니다. 저 또한 선배에 대한 호칭을 ‘선배님’이 아닌 ‘호’로 했고요. 헌재에는 또 평의 절차에서 막내가 제일 먼저 발언을 하도록 하는 룰이 있습니다. 선배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안배한 거예요.”
다만 자신의 관점만이 옳다는 ‘확신’이 재판관에게는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확신에 차 있는 자보다 의심하는 자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자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고 했다. “저 역시 헌재의 결정과는 다른 의견(소수 의견)을 낸 적이 많아요. 하지만 다른 재판관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인 적도 많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되 다른 의견이나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는 거죠.”
특히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하는 요즘엔 헌법재판소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는 경우가 잦아진다”며 법을 섬기고 그 의지를 실행하는 법관의 책임 역시 더 막중해졌다고 했다.
“(정치의 사법화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에요. 정치 영역에서도 대화와 타협 대신 ‘법대로 하자’는 얘기니까요. 그러나 그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판단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면 제대로 해야죠.”
그래서 법관은 인간으로서의 욕심은 물론 개인적인 신앙이나 신념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법복을 입고 있을 땐 헌법적 가치와 시대정신을 자신의 신앙이자 신념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은퇴 후 정치를 할 생각을 하거나 변호사 개업할 때를 대비해 잠재 고객을 염두에 두면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결론을 낼 수도 있어요. 이는 헌법의 가치를 오염시키고 시대정신을 왜곡합니다.”
그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공부에 비유하자면 공부 자체에서 재미를 찾으려 노력한 셈이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요. ‘사법농단’ 당시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은 것도 승진이나 상사의 인정보다는 재판을 제대로 하는 것 자체에서 의미와 재미를 찾으려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한 선배 법관이 남긴 말을 전했다.
“법관은 뭐가 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람들과 헌법의 가치를 나누는 일에서 재미를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글·사진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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